<38호>
프랑스 CPE 저지 투쟁과 우리의 노동법 개악 저지 투쟁
김혜진 /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집행위원장
이 글은 경기비정규연대에서 5월 19일에 연 “비정규직, 예외는 없다”는 주제의 토론회에서 발제한 내용입니다.
4월 10일 프랑스 드 빌팽 수상이 최초고용계약제 철회를 발표하면서, 1월 16일 최초고용계약제 발표를 시작으로 벌어진 프랑스 학생들과 노동자들의 투쟁은 한 국면을 넘어섰다. 하지만 아직 투쟁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이 법안에 대한 대체 입법 논의가 시작되고 있고, 이 법안과 유사한 다른 법안을 없애야 하는 과제도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정부에서 추진하는 신자유주의적인 노동유연화 정책의 한 부분을 후퇴·철회시켰다는 점에서 2년이 넘도록 노동법 개악을 갖고 투쟁하는 우리나라 노동자들이 검토해야 할 점이 많다고 본다.
1. CPE(최초고용계약제도)의 성격과 우리나라 노동법 개악
(1) 최초고용계약제는 왜 도입되었나?
최초고용계약제와 우리나라의 노동법은 동일한 점이 있다. 그것은 신자유주의적 노동유연화 정책의 한 부분이라는 점이고, 결국 비정규직을 양산하기 위한 법이라는 점이다.
프랑스에서 최초고용계약제는 ‘실업률 해소’를 명분으로 내세우며 제기되었다. 프랑스에서는 10년 동안 실업률이 계속 상승해왔고 2006년 1월에는 9.6%의 실업률을 기록했다. 청년실업률은 더욱 심각해서 18세~25세 사이의 실업률은 23%에 이르고, 청년실업률은 40%~50%에 달한다. 작년 하반기 프랑스 전역을 불태웠던 이민자 2세들의 시위도 인종차별과 실업문제가 결합되어 나타난 것이었다.
프랑스에서 이렇게 실업률이 높은 것은 프랑스의 기업들이 신규채용을 하지 않고, 해외이전을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업들은 더욱 싼 임금과 규제완화를 찾아서 계속 이동해간다. 그리고 유럽통합 이후 계속 낮은 성장률을 계속해왔기 때문이다. 11년간 집권해온 우파정부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계속 추진하면서 노동자와 민중의 사회적 권리를 공격해왔다. 1994년에는 최저임금안을 삭감하는 안을 추진했다가 수십만 명의 시위로 좌절되었다. 2003년에는 노동자들의 퇴직연금에 대해 납입기간을 늘리고 수급액수를 낮추는 퇴직연금 개악을 추진했다. 2005년에는 주35시간 근로제의 조건이 완화되었고(주35시간제는 2000년에 실업률을 낮추기 위한 방안으로 도입된 것이었다.) 연장근로 허용도 180시간에서 220시간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정부는 공공부문도 사유화해왔다.
우파정권의 이런 정책들은 실업률을 낮추지 못하고 오히려 확대해왔다. 그런데도 우파 정권은 실업문제의 해결은 ‘노동유연화’에 있다고 부르짖으면서 노동유연화를 가능하게 하는 법률적 장치들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 학생들과 노동자들은 이것이 오히려 고용불안을 가중시켜서 노동자 보호를 약화시키고 실업률 악화로 이어질 것임을 알고 있었다.
이것은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이다. 90년대 중반부터 신자유주의 정책이 기업단위에서 시행되고 많은 노동자들이 용역화하거나 외주화하거나 아웃소싱 되었고, 신규채용에서 비정규직이 늘어났다. 이것을 제도화한 것이 96년 노사관계개혁위원회에서 제출한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였고, 이것이 97년에 통과된 이후 다시 비정규직을 확산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서 2004년에 노동법 개악안이 제출된 것이다. 우리나라는 경제위기 이후 국가가 살아날 길은 유연화밖에 없다는 논리가 횡행했고, 조직된 노동자들이 구조조정 투쟁에서 패배하면서 기하급수적으로 비정규직이 확대되었다. 그리고 그 틈새를 노려 다시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법을 만든 것이다.
(2) 최초고용계약제의 내용과 우리나라의 노동법 개악 비교
우파정권은 노동유연화를 위해서 3단계 정책을 도입했다. 첫 번째가 2005년에 시행된 조치였는데 CNE(신고용계약)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20인 미만 기업에 대해서는 신규노동자를 채용할 때 2년간의 수습을 거쳐 고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2006년에 제출된 CPE는 20인 이상의 사업장에도 이것을 적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 조치는 현재 존재하는 기간을 정하지 않은 고용계약(CDI)과 기간을 정한 고용계약(CDD)를 합쳐서 유연한 단일 고용계약 체계를 만든다는 것이다.
이 최초고용계약제는 26세 미만인 노동자들이 계약을 맺을 때에는 수습기간이 2년으로 연장되어서 그 안에는 자유롭게 노동자를 해고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정부에서는 이렇게 되면 기업들은 청년노동자들을 신규 고용할 것이므로 청년실업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것은 이후 모든 노동자들을 비정규직으로 고용할 수 있도록 해서 해고를 자유롭게 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계속 새로운 노동자들을 교체사용하게 될 것이므로 사실상 청년 노동자들을 비정규직으로 활용하게 되더라도 26세가 넘게 되는 순간은 다시 실업자가 되는 법안이기도 하다. 프랑스에는 이미 기간제에 대한 법안이 있다. 다만 사용사유가 명시되어 있어서 그 사용사유를 제외하고는 기간제를 사용할 수 없는데, 그 법안을 개악하여 사용사유 없이도 자유롭게 2년간 비정규직을 쓸 수 있게 만든 법이므로, 이 법은 ‘기간의 정함이 없는 고용’을 원칙으로 하는 프랑스의 고용관계법 자체를 흔들어 이후 비정규직을 양산하려는 법안인 것이다. 이 법이 바로 그 신호탄이다.
우리나라에서 제출된 기간제에 대한 법안은 훨씬 더 심각하다. 그것은 나이 제한 없이 자유롭게 노동자들을 기간제로 쓰고 2년이 되기 전에 자유롭게 해고할 수 있는 법안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기간제 노동자에 대한 교체사용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 된다.
사실 어떤 법이 더 문제가 되는지에 대해 말하기는 어렵다. 일단 기간제로 노동자들을 사용하고 해고를 자유롭게 한다는 점에서 똑같고, 이것이 이후 새로운 노동법 개악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결국 모든 유연화의 목표인, ‘모든 노동자들을 자유롭게 고용하게 해고하기’를 원하는 자본의 전략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2. 투쟁 과정에서 보인 특징들
(1) CPE 도입 저지를 위한 투쟁 과정
프랑스에서의 투쟁 과정은 매우 역동적이었다. 2006년 1월 16일 드 빌팽 수상이 CPE를 발표하자 같은 달 19일 청년학생들은 이의 철회를 요구하며 투쟁을 선언했다.
그리고 1월 24일 공산당의 영향력이 강한 CGT(노동총동맹)을 위시하여 보다 급진적인 FO(노동자의 힘)을 선두로, CFDT(민주노동총동맹-2003년 연금투쟁에서 정부와 이면교섭을 해서 배신행위를 했다는 비판을 받은 바 있다), 6개 노동조합과 전국학생공동투쟁위원회(사회당 계열의 전학련, CFDT계의 프랑스학생연맹, 전국고교생 연합 등이 참가)가 함께 2월 7일의 공동투쟁을 호소했고 이것이 노조와 학생운동의 연대의 시작이었다.
2월 7일에는 40만 명이 항의시위를 전개했고, 3월 7일에는 100만 명으로 확대되었다. 3월 9일에는 국회에서 신기회균등법(CPE,가 포함된 법)을 강행 의결했다. 하지만 학생들은 그치지 않고 3월 12일에는 45개 대 학에서 투쟁에 돌입했다. 그러자 정부에서는 기동대를 투입하여 점거학생들을 강제해산시켰다.
제1야당인 사회당은 이 때에 와서야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CPE가 헌법 위반이라고 헌법평의회(우리나라 헌법재판소)에 제소한 것이다.
투쟁의 파고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3월 16일에는 50만 명이 항의시위를 했고, 18일에는 150만 명으로 확대되었다. 이 때부터 시위대에 대한 대량체포가 시작되었고, 1,000명 가까운 학생들이 체포되었다.
이렇게 탄압이 강화되는 가운데에 학생들의 투쟁이 계속되면서 3월 24일 수상과 노동조합의 첫 회담이 시작되었지만 별 성과 없이 결렬되었다. 그러면서 이제 전국파업이 시작되었고 3월 28일에는 국철노동자 30%, 교사 40% 등 노동조합과 60개 대학 600개 고교가 투쟁에 돌입하였다. 그러면서 300만 명으로 투쟁의 인파가 늘어났다. 그리고 투쟁하는 대오에 대한 정부의 탄압도 강화되어 800여명이 체포되기도 했다.
30일에는 부당하게 헌법평의회에서 합헌 평결을 내렸고, 시라크 대통령은 31일에 이것을 시행하겠다고 공포하였다. 하지만 이에 항의하여 4월 1일 새벽까지 계속 투쟁이 진행되었고, 310만 명의 학생과 노동조합이 공동투쟁을 벌였다. 4월 2일부터 이 법안을 사실상 시행했지만 투쟁에 밀려 총리는 결국 4월 10일에 이 법안의 철회를 공포했다.
우리나라에서 노동법 개악이 발표된 직후 비정규노동자들이 열린우리당을 점거농성하면서 이 법안의 문제를 알렸고, 민주노총에서는 이것을 받아서 총파업 투쟁을 선언한 바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정부에서 법안 처리를 연기하자 국회일정과 교섭에 매달려서 투쟁의 고삐를 늦추고 주도력을 정부에게 내주었다. 그 점에 비하면 매우 역동적으로 투쟁이 이루어지고, 정부에서 강행처리 의사를 밝히고 실제로 그렇게 강행처리를 했는데도 투쟁은 확산되어갔던 것이다.
(2) 투쟁이 확산될 수 있었던 배경
프랑스에서 CPE에 대한 투쟁의 과정은 우파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반대투쟁의 연장선에 있다. 우파정부에서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계속 추진해서 사회적 권리를 계속 공격했고 이에 맞선 투쟁이 지속되었다.
이런 대중적 거부운동은 2005년 5월의 유럽연합 헌법 국민투표 부결로 나타났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유럽연합 헌법조약을 부결시키기 위한 캠페인에 아탁을 비롯하여 사회운동, 여성운동, 프랑스 공산당, 혁명적공산주의동맹(LCR), 노동총동맹(CGT)이 연대하였다. 그러한 투쟁이 있었기에 이번 투쟁도 확대될 수 있었다.
또 한편으로 보면 이번에는 노동운동진영과 학생운동 진영의 연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1995년 알랭 쥐페 총리의 연금개혁을 일치단결해서 패퇴시킨 이후 처음으로 성향이 다른 프랑스의 12개 노조가 최초고용계약제에 반대하여 모였다. 2003년 퇴직연금제 개악에 대한 대규모 투쟁이 노동총동맹 등 일부노조의 전열 이탈로 패배한 것과 대조된다.
또한 이 투쟁이 이렇게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이 법안이 직접적으로 희생시키는 구체 대상이 있었다는 것이고, 그 대상은 바로 학생들이었다. 그래서 그 학생들이 주체로 나서서 투쟁할 수 있었다. 그 전 CNE 역시 문제가 되는 법안이었지만 20인 미만의 사업장에 대한 것이었으므로 아직 많이 조직되어 있지 않은 그들로서는, 그리고 그들을 조직하지 않고 있는 프랑스 노동조합들로서는 그 투쟁에 강력한 동인을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CNE 저지 투쟁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다시 CPE 법안으로 연결이 되고, 이것이 결국 ‘기간의 정함이 없는 고용계약’이라는 원칙을 전면 폐기하는 데에까지 나아갈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당장 이 법안의 희생자가 될 학생들부터 시작하여 노동조합에 이르기까지 투쟁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노조들이 이렇게 투쟁전선에 함께 모인 데에는 이 법안의 문제점이 크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겠지만 우파 정부의 오류도 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 총리가 장관으로 재임하던 전임 정부가 제정한 2004년 법안에 보면 노동관계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치는 법안은 제정에 앞서 노동조합을 의미하는 "사회 동반자들"과 논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 바로 밀어붙이기를 했기 때문에 노조들이 분노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노조들은 대부분 공공부문 중심으로 조직이 되어 있고 유연화 정책 전반에 대해 일관된 목소리를 내지 않는 곳이 있기 때문에, 이후에 지속적으로 고용유연화 정책 전반에 반대하고 대체입법에 대한 투쟁을 하는 데에는 균열이 생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 번의 승리가 지속적 승리를 보장하지 않는데, 이번 정부의 철회 결정은 오히려 투쟁하는 주체들 내부에서 다른 태도를 가진 집단들이 나타나게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처음에 비정규노동법 개악안이 제출되면서 이에 대해 한국노총, 민주노총이 공동으로 반대의 목소리를 내면서 투쟁을 시작했다. 하지만 정부에서 논의테이블을 구성하자 일부 시민단체들이 먼저 이탈하고, 한국노총에서도 수정안을 제출하면서 사실상 정부의 입법안에 힘을 실어주고 투쟁전선에서 이탈하였다.
(3) CEP에 대한 정치조직들의 태도
자본가들은 이번 법안에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자신들이 발언을 하면서 민중들의 불만을 높이기보다는 우파 정권을 앞세우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그런데 드 빌팽 총리는 2007년에 있는 대선에서 후보로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서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기를 했다. 높아진 실업률에 대해 뭔가 가시적인 조치가 필요하다는 점, 그리고 자본가들에게 분명한 우파 강경파로서의 입지를 보여야 한다는 점 등이 부담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래서 드 빌팽 총리는 이 법안을 상정하는데 하원의 의견 수렴 과정을 제대로 거치지도 않았다. 정부의 권한을 명시한 프랑스 헌법의 한 조항을 들어 의회의 토론을 생략해버린 것이다. 정부 안에서도 노사관계 장관인 장-루이 볼루가 CPE 구상 단계에서부터 반대 목소리를 분명히 했으며 법안의 윤곽이 드러나자 총리에게 강력하게 항의한 바 있다. 드 빌팽 총리는 이런 비판적 견해들을 철저히 무시하고 법안을 의회에 상정했다. 이것이 이 법안에 대해 대중적 분노가 높아질 때 정권 안에서도 지지를 완전히 확보하지 못했던 요인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파 정권 못지않게 문제였던 것은 프랑스 사회당이다. 사회당은 제1야당인데도 대안세력으로서의 위상을 보이지 못하고 법안의 의회통과를 사실상 방관했다. 그리고 3월 14일 위헌소송을 제기하고 3월 말에야 거리로 나섰다. 이미 승리 분위기가 높아지자 나선 것이다. 사회당은 영국의 노동당 등 다른 사민주의 정당들과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에 대한 일관된 반대 입장을 갖고 있지 않다. 오히려 정세가 유리하니까 반사이익을 얻기 위해 나섰던 것이다.
이미 2002년 사회당 후보였던 조스팽 전 총리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을 내놓기는 커녕 경쟁력 강화라는 명목으로 우파와 비슷한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했고, 극우파 르펜에게도 뒤져서 결선투표에서 탈락했다. 그들은 대선을 위한 정치적 행보에 바쁘다. 사회당 정책연구소장의 한겨레 신문 인터뷰에 의하면 “오늘날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기업에 필요한 유연성과 임금노동자의 안정성을 함께 추구할 다른 대안을 모색 중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사회당은 세계화를 거부하지 않는다. 현재로서는 세계화는 거스를 수 없는 추세이다.”라고 말하면서 일단 고용유연화를 수용하고 안정성을 추구하자고 말한다. 이러한 태도로 인해 사회당은 신자유주의 유연화 정책 자체를 반대하는 프랑스 민중들의 대안으로 자리잡지 못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민주노동당은 사회당에 비하면 계속 투쟁대오에 함께하고 있다는 점에서 낫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입법안 관철이라는 미명 아래 수정안을 내고 이것이 오히려 투쟁대오 내부를 흔들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당장의 협상에 연연하여 정부에 오히려 힘을 실어주기보다 투쟁하는 대오의 앞이 바로 좌파정당이 서야 할 위치라는 점을 되새겨야 한다고 본다.
법안이 철회된 이후 쉬드(SUD)연대노조나 대학 점거농성을 계속하는 일부 대학생들이 CNE(신규고용계약)도 철회할 것을 요구하고 있으나 대부분의 학생들과 일부 노조는 이 전선에서 물러서 있다.
3. 우리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
아직 프랑스에서의 투쟁은 승리한 것이 아니다. 다만 일시적인 정부의 후퇴를 이끌어냈을 뿐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투쟁은 전망을 갖지 못하고 신자유주의를 자꾸 대세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사고에 많은 문제제기를 던진다. 그 점을 이야기해보자.
(1) 이데올로기전에서 승리하기
프랑스에서는 청년 실업 해결이 매우 큰 과제이다. 정권은 고용유연화 정책이 이민자들과 실업자들의 일자리를 만드는 정책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68혁명과 비교하면서 CPE 반대투쟁은 대학졸업자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라고 이야기해왔다. 하지만 노동자들과 학생들은 이에 대해서 분명하게 대응했다. 이 법안 자체가 일자리를 불안정하게 만들 것이며, 결코 일자리 창출의 대안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직시했다. 이 법안은 결국 다른 노동유연화 정책과 연동되어 노동조합의 힘을 약화시킬 것임도 분명하게 했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선전을 잘 했기 때문에 66%나 되는 국민이 법안이 문제 있고 폐지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민중들의 생존을 공격하는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누구보다 민중들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논리의 허구성을 다시 거론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핵심은 민중들이 일단 숨죽이고 자기 혼자 살아남는 것보다 투쟁이 희망을 준다는 점을 투쟁의 역동적 과정에서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대중투쟁의 힘이 이 사태에 대한 본질을 알려준 것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자본과 정권이 노동법 개악안을 마치 비정규직 ‘보호조치’인양 치장하려고 했다. 그런데 바로 ‘보호’의 대상이라던 비정규직들이, 법안이 제출되자마자 ‘악법 폐기’를 주장하며 열린우리당 점거농성을 했고, 그 결과 이 법안이 ‘개악’이라는 점이 분명해졌다. 그 이후 민주노총이 총파업을 결정하면서 이 법안의 성격이 분명해졌고, 국민들 70%가 이 법안에 반대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노동자들이 투쟁을 선택하는 대신 국회에서의 논의를 다시 시작하는 순간 ‘개악’이라는 점은 눈에 가려지고, 무언가 그 안에 의미있는 것도 들어있고, 일부를 다시 손보면 되는 것으로 인식된다. 즉 이 법안의 문제가 유연화를 위한 제도적 장치라는 점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우리가 뭔가를 얻어내야 하는데 그것이 불충분해서 반대하는 것처럼 인식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교섭에서는 주고받기가 필요하다는 등, 모든 것을 얻으려고 하다가 그마나 일부 있는 것도 놓쳤다는 등의 허위 이데올로기가 판을 치게 된다. 그러면서 결국 법안을 인정하는 상태에서 문구를 갖고 재논의하는 상황으로 가고 있다. 투쟁의 정당성, 법안의 본질적 문제에 대한 이데올로기 대응에서 밀리고 있는 것이다.
(2) 대중투쟁의 힘을 믿는 것
우리나라에서는 노동법 개악 저지투쟁을 하면서 대중투쟁과 가두투쟁을 조직하는 데에 실패했다. 실제로 대중들은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고, 위력적인 파업이 되지 못했다. 조직된 노동자들은 노동법 개악안을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지 못했고, 조직되지 않은 노동자들은 투쟁할 수 없었고, 학생들은 학생운동의 퇴조로 인해서 새로운 투쟁을 조직하는 주체로 서지 못했다. 하지만 이런 객관적 조건 역시도 역사적인 것이다. 96·97년 투쟁이 왜곡되게 마무리되고, 그 이후 개별사업장의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 투쟁에서 패배하면서 투쟁에 대한 신뢰가 많이 떨어져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대중투쟁을 확산하기 위한 시도보다 협상의 힘을 더 믿는 것은 정말로 어리석은 일이다. 몇 가지 수정안을 낸다고 해서 우리의 요구가 관철되는 것은 아니며, 국회 일정에 따라 투쟁일정이 왔다갔다 하면서 스스로 진을 빼는 행위는, 비록 얼마 없는 힘이라도 투쟁의 동력을 오히려 삭감시키는 행위가 되고 있었다.
프랑스의 지도부들은 전술을 제한하려고 하지 않았다. 학생들의 시위는 격렬한 가두투쟁과 결합했으며, 주요 도로와 철도역, 공항, 관청에 대한 기습점거와 시위를 했다. 물대포와 시위진압 장비로 완전무장한 경찰에 맞서서 바리케이트를 치고 저항했다. 이러한 격렬한 가두투쟁은 수많은 체포자를 낳았지만 투쟁은 오히려 확대되었다. 지금의 우리처럼 '책임질 수 없다‘는 이유로 투쟁을 폴리스라인 안으로 가두지 않았다.
또한 법안에 대한 국회 일정에도 연연하지 않았다. 초조해하며 일단 작은 성과라도 내기보다는 계속 투쟁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최초고용계약제에 대해 노동자와 학생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회에서 의결을 했으며, 합헌결정이 내려졌고, 시행을 공표하기까지 했다. 이미 투쟁이 끝났을 것이라고 예상되는 시점에서도 투쟁은 오히려 수그러들지 않고 확대되었다.
이것을 프랑스 노동자들의 특징이라고 말하지 말자. 물론 프랑스에서는 투쟁이 일상화되어 있고 자신의 권리를 투쟁으로 쟁취해야 한다는 인식이 훨씬 높다. 그런데 우파 정권의 신자유주의 정책 아래에서 프랑스 민중들은 투쟁하지 않고는 자신들의 권리를 조금이라도 지킬 수 없는 상황에 내몰렸다. 그래서 투쟁에 나서는 것이다. 지금의 우리는 그보다 더 절박하다. 자본과 정권은 더욱 완고하고 폭력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투쟁의 전술을 제한하고 협상에 기대고, 국회 일정에 따라 투쟁의 수위를 조절하는 것은 투쟁의 역동성을 가두고, 승리의 가능성을 더 줄여나가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우리도 2004년에 처음 노동법 개악안이 제출되었을 때 그나마 이 정도 수준으로라도 투쟁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비정규노동자들의 치열한 투쟁으로 수위를 높일 수 있었다. 설령 이 노동법 개악이 통과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끝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지금 당장 작은 성과라도 남기기 위해 전전긍긍하지 말고 투쟁의 역동성을 믿고 지치지 않는 투쟁을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우리에게 어떤 전망이 있겠는가.
(3) 투쟁을 할 때 단결은 가능하다.
이번 노동법 개악 법안에 대해 우리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이해관계가 다른 것처럼 인식한다. 비정규직들이 오히려 투쟁을 선도하고 정규직 노동자들은 마치 남의 문제인 것처럼 여겼다. 하지만 프랑스 노동자들은 이 문제가 곧 자신의 문제가 될 것임을 알았다. 그러하기에 지금 당장 자신과 관련이 없는 문제라고 할지라도 투쟁에 나섰다. 프랑스의 특성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신자유주의와 맞서 노동자들이 싸우기 쉬운 나라는 없다.
노동자와 학생들의 연대가 운동의 새로운 국면을 창출했다. 학생들의 투쟁에 대해 노조가 화답을 하는 형식이었고, 그것은 서로의 이해관계가 동일하다는 믿음에 근거한 것이었다.
또한 서로 성격이 다른 12개의 노조가 연대했던 것도 투쟁의 힘을 확대했다. 이런 연대를 가능하게 했던 힘은 무엇인가? 그것은 학생들의 선도적 투쟁이었다. 프랑스의 12개 노조 중에는 신자유주의에 반대하지 않는 노조들도 있으나 그곳조차도 끌어들일 수 있었던 힘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대중적 불신이 있었고, 그것을 끝장내보기 위해서 선도적으로 투쟁하는 학생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우리도 한국노총과의 공조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광범위한 시민단체들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한국노총과의 공조, 시민단체들의 지지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요구조건을 낮춰서 그들의 요구조건에 맞추는 것이 아니다. 투쟁의 역동성을 창출하여 스스로 우리를 선택하게 만드는 것이다. 다른 곳과의 공조를 위하여 선도적으로 투쟁하고자 하는 동지들의 열의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열의에 기대서 투쟁을 만들고, 그 힘으로 다른 조직을 끌고 가야 하는 것이다.
초기에 비정규직 법안에 대해 공동으로 반대 입장을 내던 한국노총과 노동법 개악 저지 공대위의 시민단체들이 민주노총이 교섭으로 돌아서자마자 각자의 입장을 적나라하게 나타내면서 공조에 균열이 가고, 그들이 정권의 입장에 동조하면서 오히려 민주노총을 압박하기 시작했던 점을 기억해야 한다. 민주노총이 투쟁하지 않고 공조를 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의 요구를 그들의 수준에 맞추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자본과 정권이 바라는 바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학생들이 선도적 역할을 하지는 않았으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그 역할을 했다. 비록 대중적인 힘을 갖고 있지는 못할지라도 선도적인 문제제기를 통해서 투쟁을 호소했다. 그 호소에 답하면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연대를 만들어내는 것이 우리에게는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이런 연대의 원칙을 분명히 한 바탕 위에서 대중투쟁을 만들 수 있을 때 한국노총이나 광범위한 시민단체들도 자신의 태도를 분명하게 하게 된다.
(4) 노학연대의 새로운 의미
지금까지 우리는 학생들과의 연대에 대해서 협소한 시각을 갖고 있었다. 노동자들의 대중투쟁을 학생들이 지원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비정규직 문제에 있어서 학생들은 지원자가 아니라 그들 스스로의 문제를 갖고 싸우는 주체일 수밖에 없다. 물론 프랑스에서는 최초고용계약제 자체가 학생들을 주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이어서 문제의식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 학생들은 실업률도 높아지고 대학졸업장도 취업이 별 도움이 안 되는 상황에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가중되던 차에 직격탄을 맞았으므로 투쟁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들이 투쟁에 나서게 된 데에는 이미 대학자유화에 대한 투쟁 등 투쟁의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투쟁의 경험들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불안감과 맞물리면서 투쟁을 조직하는데 유리하게 작용한 것이 사실이다.
우리나라에서도 학생들은 비정규직으로 취업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다. 청년실업률도 9%대로 매우 높은 실업률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이미 학생들도 높은 등록금 등으로 인해서 계속 불안정한 노동자로 현재 일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대학 안에서 신자유주의적 경쟁 논리 때문에 학생들은 투쟁에 나서기보다는 일단 도서관에 박혀서 자격증을 따거나 안정적인 직장을 얻기 위해서 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노동법 개악이 실제로는 새롭게 노동시장에 진입할 청년노동자들을 노리고 있는데도 학생들은 이러한 불안을 조직할만한 대중적 힘을 갖고 있지는 못하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이 문제에 대한 투쟁을 시작했다. 이것을 민주노조운동 전체가 받아 안아서 투쟁을 만들어가면, 그리고 투쟁을 확장해가면 오히려 이것이 학생운동을 대중운동으로 다시 조직할 수 있는 계기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투쟁의 동력을 자꾸 만들어내고, 그 투쟁의 경험이 이후 노동운동의 새로운 활력이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러한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프랑스 투쟁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4. 여전히 남은 과제들
프랑스의 투쟁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다만 한 고비를 넘겼을 뿐이다. 드 빌팽 총리는 CEP를 철회하겠다고 했으나 대체입법이 마련될 것이고, 그 대체입법이란 아마도 이미 존재하는 유연화 조치들과 유사한 내용으로 나타날 것이다. 이미 연대전선이 철회 선언 이후 많이 느슨해져 있어서 일부는 대체입법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적당한 수준에서 만족하면서 투쟁전선에서 이탈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신자유주의 유연화에 굳건하게 반대하는 몇 개의 노조와 학생조직만이 남아서 외롭게 전선을 지키다가 사실상 유연화 조치가 다시 도입되는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희망을 발견할 수 있으며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운동 주체들을 조직할 수 있고, 그것을 대중적인 힘으로 만들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것을 통해서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은 계속될 것이고 때로는 승리할 것이다.
그런데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새로운 세상의 전망을 세우지 못하는 이상 투쟁은 계속 단발적이거나 수세적이 된다. 설령 우리가 하나의 투쟁에서 승리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런 점에서 ‘노동법 개악’ 요구는 수세적이고 ‘비정규 권리입법 쟁취’는 공세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말장난이다. 요구가 그 무엇이 되든 새로운 사회의 전망에 입각하여 주도적으로 투쟁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아니라면 그 요구가 어떤 이름을 갖고 있든 수세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만약 이렇게 수세적 대응을 지속하지 않고자 한다면 대안 세력을 만들어야 하고,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새로운 세상의 전망을 자기 과제로 하는 정치적인 힘을 길러야 한다. 그럴 때에야 우리의 투쟁은 수세에서 공세로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프랑스에서 투쟁이 일시적으로 신자유주의를 저지시켰다 하더라도 여전히 프랑스에서는 문제가 남을 것이다. 자본의 해외이전과 신규채용을 하지 않는 사태로 인해서 실업률은 여전히 높을 것이다. 고용유연화는 막았지만 자본의 세계화를 막지는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전 세계의 단결 투쟁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전 세계의 투쟁으로 신자유주의 흐름에 저항하지 않는다면 프랑스의 승리는 한순간의 승리로 마무리된다. 대안세계화 운동, 국제 연대에 대한 고민이 더욱 절실하다.
신자유주의는 현실적 힘이자 매우 강력한 이데올로기이다. 노동자들에게 패배감을 심어주고, 유연화는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심어놓는다. 그리고 나라도 살아남기 위해서 경쟁력을 키워야 하고, 끊임없이 경쟁해야 한다는 생각을 심어놓는다. 이런 이데올로기는 단결과 투쟁을 방해하고 우리는 끝없이 죽인다. 살아남기 위해서 숨죽이는 이들의 고통, 투쟁하자고 해도 고개를 돌리고, 비정규직을 희생양 삼아서라도 살아남기를 바라는 이런 상태 자체가 신자유주의의 산물이기도 하다.
프랑스의 투쟁은 우리에게 신자유주의가 대세라고 해도 우리의 저항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며, 우리가 승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 승리는 대중이 들고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먼저 생각한 자들이 나서면서 다른 이들의 연대를 이끌어낼 때 가능한 것임을 보여준다. 저항만이 우리를 살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2년간 끌어온 노동법 개악에서 이제는 지쳐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국회 일정에 끌려 다니다가 국회에서 통과되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하고, 우리의 힘이 미약하니 조금이라도 덜 개악되도록 적당히 합의를 하자고 이야기하는 이런 우리나라 운동 상황에 대해, 그것이 아니라고 설령 국회에서 통과를 시키더라도 대중의 역동성을 믿고, 섣불리 타협하려고 들지 말고, 우리들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지 말고 나아가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저항만이 우리를 궁극적으로 살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