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임금과 불안정노동으로 내모는 비정규직 독립직군제 철폐하자!
정지현 ⎟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사무처장
8월 4일 우리은행이 지난해 도입한 신인사제도에 따라 창구 업무를 담당하는 계약직 직원들에 대한 독립직군제 시행에 들어갔다. 계약직 직원들은 △영업점 단순 창구 업무를 맡는 매스마케팅 직군 △콜센터 업무를 주로 하는 고객만족 직군 △단순 사무를 지원하는 사무지원 직군 등 세 직군으로 각각 나눠졌다. 계약직 직원들은 앞으로 각자가 속한 직군 외의 업무는 원칙적으로 맡을 수가 없게 된다. 영업점에서 예금출납 등을 맡은 창구 여직원 1,800여명은 매스마케팅 직군, 콜센터 직원은 고객만족 직군이다. 은행 관계자는 “기간제 근로자의 고용을 보장하면서 정규직의 50~60% 수준인 임금을 한꺼번에 올리는 것은 비용 부담이 너무 크다”며 “직무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국민은행도 곧 직군제를 도입한다. 국민은행 인사정책 담당자는 3일 “정부의 비정규직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자연스럽게 직군제로 넘어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신한은행 인사정책 관계자도 “이른 시일 안에 직군제를 포함해 다양한 방안을 마련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비정규직 노동자만을 별도 직군으로 묶어 고용은 보장하되 임금은 정규직의 절반 정도로 유지하겠다고 하는 것이 골자이다. 자본가들은 고용을 보장하되, 비정규직을 쓸 수밖에 없는 요인인 임금 저하를 용인하는 기가 막힌 제도라고 격찬하고 있다. 하지만 특정한 노동자들의 신분을 묶어두고 차별을 영속화하는 반노동자적인 제도이다.
이의 문제점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직군을 구분하면서 기간제 노동자들의 계약기간을 3년에서 1년으로 조정하고, 2년간 계약을 연장한 후에 성과를 판단하여 A, B, C, D 등급으로 나누고, 그 중에서 C등급과 D등급에 대해서는 다음 계약에서 탈락을 시킨다는 것이다. 겉으로는 노동자들의 고용을 보장한다고 이야기했지만 2년간 계약직으로 유지한 후 노동자에 대한 평가를 통해서 고용을 유지시킬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게다가 그 기준이라는 것도 주관적인 것이라 은행권의 모든 노동자들은 일단 2년까지 시험인생을 거쳐야 한다. 통과할 수 있을지도 불분명한 시험 말이다. 이미 은행권의 비정규직은 반복적으로 고용이 갱신되어 왔으므로 사실상 정규직으로 간주되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이제 이 노동자들을 2년 동안의 시험을 거쳐서 무기계약으로 전환할지 아닐지를 결정하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다가 이렇게 2년의 평가 기간을 두게 되면 노동자들은 일단 A, B 등급을 받아야 ‘기간의 정함이 없는 고용계약’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이제 2년간은 오로지 고용을 유지하기 위해서 숨죽이면서 자본이 시키는 대로 실적을 내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한다. 자본가들은 지금까지도 고용계약의 유지라는 명분으로 노동자들을 경쟁시켜왔다. 근로복지공단의 계약직 관리지침에서는 일정한 성적을 내지 못한 하위 노동자들을 재계약에서 탈락시키도록 명시하고 있으며 실제로 탈락한 사람이 없다 하더라도 자발적 경쟁을 유도해서 노동강도를 강화시켜왔다. 노동자들에게 재계약을 빌미로 한 경쟁의 격화는 죽음과 같은 노동을 강제하고, 그것은 이미 고용이 유지된 노동자들에게도 계속 그 속도와 실적을 맞출 것을 강요하는 기준이 된다.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 동료들을 짓밟아야 할 것인가.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노동강도를 높이면서 실적을 내기 위해 노력할 것인가.
그리고 아직은 몇 명이나 ‘기간의 정함이 없는 고용계약’으로 갈 수 있을지 알 수 없게 된다. 그것은 자본 마음대로이며, 2년이 지나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2년 이후 재계약에서 탈락한 노동자들의 빈자리는 다시 죽음의 노동을 반복하는 2년짜리 비정규직으로 채워지게 될 것이다. 실제로 자본이 노리는 바는 계약직 노동자들의 반정규직화가 아니라 일정한 비율로 2년짜리 기간제를 계속 유지하는 것이다.
두 번째로 2년 후에 간신히 ‘기간의 정함이 없는 계약’을 하게 되더라도 이것이 정규직과 동일한 노동조건을 갖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임금과 노동조건, 그리고 승진의 기회에서 정규직들과는 다른 완전한 차별을 받게 된다. 현재 은행에서는 단독직군제가 되면 정규직 임금의 50% 수준 정도가 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런 식으로 만드는 이유는 국회에 계류 중인 노동법 개악안 중 ‘차별금지조항’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미 노동부가 용역보고서에서 이야기했듯이 비정규직을 다른 직군으로 분리하게 되면 차별금지조항의 적용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은행들은 비정규직 단독직군제를 실시하면서 차별금지 조항에 걸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같은 일을 하는 정규직들을 모두 철수시키는 등 완전한 직군제를 하겠다고 이야기한다. 우리은행 뿐 아니라 몇몇 은행이 비정규직 차별이 법으로 금지될 때를 대비해 새로운 직군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일선 창구업무 같은 일을 이들의 전용 업무로 만들고 직군까지 분리함으로써, 정규직과의 비교를 불가능하게 하자는 게 취지다. 이렇게 되면 비정규직 차별을 주장할 근거가 사라진다. 결과적으로 정부가 자랑스럽게 말한 노동법 개악의 차별 금지 조항이라는 것이 명백히 허구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특히 단독직군제 노동자들은 승진도 불가능한 상태로 이 직군 안에만 평생을 있어야 한다. 이 직군에서는 능력에 따른 임금인상의 요인은 있을지언정 직급 안에서의 승진 시스템은 없다. 한번 그 직군 안에 편입되면 평생을 같은 일을 하면서 승진 없이 살아야 한다. 은행권 안에서 새로운 신분제를 만드는 것이다.
이런 조처가 확산되면 노동자들은 정규직, 독립직군 비정규직, 2년짜리 기간제 등 세 가지로 나뉘게 될 것이다. 결국 독립직군제 시행은 차별 금지법이 차별을 구조화하고 영구화한다는 점을 뒷받침해 줄 뿐이다.
세 번째로 이렇게 ‘기간의 정함이 없는 고용계약’을 체결한 독립직군의 노동자들이 차별을 받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철저한 성과급제로 운영된다는 것이 문제이다. 노동자들의 기본급을 낮추고 모든 것을 성과에 따라서 분배하는 방식이다. 성과에 대해 객관적인 인사고과를 실시하겠다고 하지만 영업점 사무지원이나 창구 업무의 경우 그 성과의 객관성이란 찾기 힘들 것이다. 이번의 개편안에 보면 업적평가와 역량평가를 나누고, 지점장과 목표설정계약을 통한 평가를 실시하고, 핵심가치와 일반역량, 전문역량에 대하여 개인이 보유하고 있는 잠재역량을 평가한다고 한다. 결국 그것을 평가하는 팀장과 지점장, 영업본부장들에게 어떻게 보이느냐에 따라서 성과가 결정된다. 이것에 기초하여 연봉조정, 초과업적 인센티브, 성과급, 연수선발 등을 하므로 노동자들은 자본에게 잘 보이려고 끊임없이 경쟁하게 된다.
임금체계의 내용을 보면 기본연봉에 종합평가 결과에 따라 차등지급하는 개인성과급, 그리고 초과업적 인센티브를 더하는 체제로 개편한다고 한다. 예전에 기본급에 가급하던 개인성과급을 기본연봉에 편입하는 것이다. 그 중에 기본연봉은 총연봉 기준 84%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스스로 노동강도를 높여야 임금을 보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게다가 기본연봉은 평가에 의해 차등 인상되므로 더욱 노동강도를 높일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성과급제 방식의 임금체계 때문에 생존을 위해 과다한 노동을 감내해야 했던 학습지교사 등 특수고용 노동자들의 사례를 보더라도 이런 식의 성과급 운영은 노동자들의 삶을 파괴한다.
그리고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은행에서 이후에 구조조정을 통해서 이 노동자들을 다시 특수고용으로 전환시킬 가능성도 높다는 점이다. 이미 텔레마케터에도 특수고용 노동자들이 있듯이 노동자들에게 개인사업자 등록증을 내게 하고 자신이 도급계약을 해서 성과에 따라서 돈을 가져가는 것처럼 위장하는 것이다. 물론 업무 지시는 철저하게 은행자본이 하겠지만 형식만 그렇게 변화시킬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노동자들을 100% 성과급, 완전경쟁으로 내모는 것이 자본에게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넷째로, 은행 비정규직의 대다수가 여성이라는 점에서 보면 명백히 여성차별의 소지가 높아진다. 과거 은행권에서 존재하여 논란이 됐던 ‘여행원 제도’가 새롭게 변질하여 나타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990년 전에 은행들은 여성노동자들에 대해 ‘여행원 제도’라고 해서 직군을 분리하고 승진과 인사에서 차별을 받도록 만들어왔다. 1991년 노동부는 남녀고용평등법에 따라 은행권에 대해 여행원 제도를 폐지할 것을 지시했고 시중은행들은 여행원 제도를 폐지했다. 그리고 1999년 남녀고용평등법이 개정돼 간접차별 개념이 도입된 이후 하나은행에 대해서 'FM/CL직군제'도 노동청에서 성차별적 제도라고 인정을 함으로써 직군제 자체가 여성에 대한 차별임을 분명하게 한 바 있다.
그런데 지금 은행들은 여성노동자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직군에 대해서 다시 단독직군제를 부활함으로써 비정규직 차별에 여성차별까지 이중적 차별을 다시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제도는 절대로 인정되어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 은행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기간제 노동자로서 차별대우를 받아왔다. 반복적으로 계약이 갱신되어왔고 은행의 주요 업무를 담당하면서도 차별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제 다시 단독직군제라는 이름으로 노동자들을 영원히 저임금과 승진 차별 등 차별의 굴레에 가두려고 한다. 끝없는 경쟁의 틈바구니로 밀어 넣으려고 한다. 은행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이런 기만적인 제도에 굴복하지 말고 노동자들의 권리를 당당하게 이야기해야 한다. 반복계약 갱신된 노동자들은 정규직이 되어야 하며, 어떤 종류의 차별도 인정할 수 없음을 말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노동조합으로 뭉치고 힘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이 사안이 단지 비정규직의 문제로 그치지 않을 수 있다. 이런 방식의 직군제 편성으로 은행 노동자들을 갈기갈기 찢고 정규직들도 성과를 중심으로 재편하여 내부 경쟁을 강화하는 방식의 구조조정이 동시에 진행되는 것이다. 정규직-비정규직 가릴 것 없이 노동자 내부를 위계화하고 경쟁시키는 이런 비인간적 제도에 맞서서 힘을 다해 싸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