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환 ⎟ 철폐연대 회원
‘비정규직과 문화’
이러면 지금이 어떤 상황인데 그런 한가한 소리 하냐고 할 수도 있겠다. 고용불안에, 장시간 노동에, 쉴 새 없이 몰아치는 탄압에, 쉴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없는 상황에 문화타령이나 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물론 그렇기도 하다. 그렇지만, 비정규직에게 문화는 없는 것일까? 곰곰이 한번 생각해보자. 언뜻 생각하면 비정규직에게 문화는 굉장히 멀리 있고, 사치스러운 소리 같지만, 또 어찌 생각해보면 그리 멀리 있는 것 같지도 않고, 아니 오히려 너무 밀접하게 가까이 있어서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살면서 ‘문화’라는 말을 접할 때를 생각해보자.
흔치 않은 일이겠지만 어쩌다 영화 한편 보고나서 “오랫만에 문화생활 한번 했네” 할 때의 문화. 정부기관이나 언론에서 떠들어대는 문화도시, 문화의 해, ‘문화가 곧 경쟁력이다’, 21세는 문화의 세기 등등의 각종 구호들에서 쓰는 문화도 있고. 청소년문화, 군사문화, 노동자문화, 농민문화 할 때의 문화도 있고. 서양문화, 동양문화, 대중문화, 소비문화, 아파트문화, 음주문화, ‥‥‥. 00문화라는 말을 찾자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 게 문화다.
또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듯 보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생활하는 지역에 있는 문화예술회관, 문화원, 문화의집도 있고, 동사무소가 주민복지문화센터로 바뀐다고도 하고, 문화관광부도 있고, 이럴 때 사용되는 문화도 있다. 이렇듯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아보고 접할 수 있는 게 문화라는 말이고 비정규직 노동자에게도 일상적으로 찾아볼 수 있고, 적용해볼 수 있는 말이 문화이다.
그럼 문화는 도대체 무엇일까?
선배 사회주의 활동가이면서 문화학자인 영국의 윌리엄즈는 문화를 네 가지로 정리하였다.
1) 지적, 정신적, 미적 개발과정 일반과 같이 문화는 읽기 능력, 학업 혹은 세련된 억양이나 취향 등에서 드러나는 ‘획득된 정도’, ‘교양수준(cultivated)’이라는 의미.
2) 사람들, 일정 시기 혹은 집단이 공통의 정신(common spirit)을 매개로 하여 획득된 특정한 삶의 양식.
3) 지적 작업 혹은 지적 실천, 특히 예술적 활동으로서 문화의 정의는 가장 널리 통용되는 정의. 여기에서의 문화는 음악, 문학, 그림, 조각, 연극, 영화 등이 된다.
4) 특정한 사회질서가 소통되고, 재생산되며, 경험, 탐구되는 기호적 표현의 체계로서의 문화. 경제, 사회, 정치적인 모든 제도들의 특정한 차원으로서, 의미, 가치, 주체성을 구성하는 일련의 물질적 실천으로서 문화. 사회 구성원들에 의해 생산되고 유통되며, 그들의 사고와 행동을 규제하는 규정력을 발휘한다는 점에서 물질화된 기호적 실천. 이때의 문화는 권력과 주체 위치 및 주체화 양식 사이의 관계, 그리고 정체성의 구성 혹은 의미를 둘러싸고 전개되는 투쟁으로서 정치, 이데올로기적 과정이 지닌 중요성에 주목할 수 있게 해준다.
이와 같은 ‘문화’의 정의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문화’라는 용어는 한가지로 정의할 수 없고, 굉장히 많은 범주들과 복잡하게 얽혀 있는, 여러 측면을 고민해야 하는 용어이다.
윌리엄즈의 정의내용이 좀 어렵기도 하지만, 위에서 얘기한 여러 가지 문화라는 말을 이러한 정의에 따라 나눠볼 수 있다.
이를테면, 영화를 보고 문화생활을 했다고 했을 때의 문화는 1)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고, 청소년문화, 농민문화, 노동자문화 할 때의 문화는 2)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정부나 언론에서 떠들어대는 각종 문화담론들은 아무래도 4)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비정규노동자들의 삶의 이야기
7조각 테트리스
물론 문화라는 말을 사용할 때 위 네가지 중 한 가지에 딱 맞아 떨어진다고 할 수는 없다. 때로는 그중 하나나, 두 개의 정의, 혹은 네가지 정의 모두와 연관이 있을 수도 있다. 그때 그때 문화라는 말이 사용되는 맥락에서 어떤 측면을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인가를 따져봐야 할 일이다.
그렇게 비정규직 노동자에게도 문화는 있는 것이다.
현재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가지고 있는 지적인 능력이 있는 것이고, 독특한 생활양식이 있고, 작긴 하지만 비정규직을 그린 음악과 시, 그림과 영상이 있고, 비정규직 노동자와 관련된 이데올로기와 담론이 있는 것이다. 그렇게 문화란 늘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것들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어떻게 만들어져 있는가, 어떤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가와 어떻게 변화해가고 있는가이다. 또 당연히 우리가 거기에 어떻게, 어떤 내용으로, 개입할 것인가 하는 점이 중요하다.
1990년 당시 파업전야 포스터
내년이면 20주년이 되는 87년 7,8,9 노동자 대투쟁과 그 이후 발전했던 민주노조운동의 초기모습을 생각해보자.
구사대들의 공격을 막기 위해 여성노동자들만이 있는 사업장에 수백 명의 지역노동자들이 교대로 출퇴근하면서 함께 철야농성 하던 모습, 옆 사업장에서 구사대 침탈 소식이 들려오면 일하다가도 바로 일손을 놓고 수백 명이 달려가서 구사대를 격퇴하던 모습, 88년 연세대 노천극장에 모여 한목소리로 ‘파업가’를 부르던 노동자대회의 모습.
단위사업장과 업종의 벽을 넘어 지역으로, 전국으로 연대를 확대하고 강화하고 단결하여 건설한 전노협의 모습, ‘노동해방’, ‘평등세상’으로 표현했던 천만 노동자의 희망, 꿈.
그 모습들 속에 노동자의 철학과 사상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고, 그게 바로 노동자의 교양이었다. 우리가 만들었던 삶의 양식이 있었다. 우리가 쓰는 언어, 논리, 관점, 생활방식, 문제를 풀어가는 방식, 가치관이 있었다. 그 속에서 살아가고, 변화하고, 발전하는 노동자의 모습이 있었고, 삶이 있었고, 문화가 있었다. 그렇게 떠오른 노동자의 형상들이 있었다. 우리는 그 형상에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변혁을 꿈꾸었다.
그러나 2006년을 살아가는 현재 노동자의 형상은 어떠한가? 어디서 노동자의 미래를 희망으로 그릴 수 있는 노동자의 형상을 찾을 수 있을까? 군대처럼 줄맞춰 앉아 누구나 뻔히 예상할 수 있는 파업을 벌이고 있는 대공장 노동자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을까? 1년에 7번씩 총파업을 한다고 언론에서 떠들어대는 그 총파업의 현장에서 찾을 수 있을까? 민주라는 글자를 빼도 이상할 게 없는 현재 ‘민주’노총의 모습과 수많은 ‘민주’노조에서 찾을 수 있을까?
한국 노동운동을 표상하는 현재의 노동자 형상은 1,300만 노동자의 절대 다수를 이루는 비정규직의 삶과 투쟁, 조직에서 찾아야 한다. 그 노동자의 형상을 만들어가는 것이 노동자의 문화를 만들어가는 것이고 그것이 노동자문화운동의 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