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현 ⎟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사무처장
1. 들어가며 - 노동법 개악의 통과가 의미하는 것
2006년 11월 30일 2시 30분, 비정규직법안이 임채정 국회의장에 의해 직권 상정되면서 20분 만에 2년여를 국회에서 표류하던 비정규 3법은 결국 통과됐다. ‘기간제및단시간근로자보호등에관한법률안’은 재석199인 중 찬성 169, 기권 30, 반대 0으로 가결되었고, ‘파견근로자보호등에관한법률’ 중 개정 법률안은 재석198인 중 찬성 169, 반대 1로 가결되었고, 마지막으로 차별금지 조항이 들어있는 ‘노동위원회법중개정법률안’은 재석 205인 중 찬성 172, 반대 1로 가결되어 모두 통과되었다. 그리고 22일 뒤 노사관계로드맵을 본회의에 통과시켰다. 이로써 정부는 98년도 정리해고제와 파견근로제를 시작으로 신자유주의 노동의 유연화의 구체적 내용인 ‘비정규직노동자 만들기’에 제도적인 공세를 마무리했다.
2006년은 그렇게 허망했다. 그러나 더 허망한 것은 이제 노동법 개악이 통과되었기 때문에 투쟁은 끝난 것이라는 일각의 생각들이다. 어쩌면 우리의 싸움은 여기서 끝이 아니라 다시 기나긴 2라운드로 돌입해야 할 채비를 해야 할 때가 아닐까 싶다. 제도적 완성은 이제 이데올로기 공세로 나타날 것이다. 정확히 말해 그 싸움의 본판은 이제 시작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먼저 내부의 균열로 시작될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라도 이제 지난 2년간의 싸움을 정리하고 우리의 오류와 균열의 조짐을 찾아내는 것이 지금 우리의 임무다.
2. 투쟁의 경과
1) 전사(前史) - 노동법 개악의 시작, 2000년 비전형근로자 보호대책
정리해고와 근로자파견제에 대해서 막지 못하고, 2000년에 무수히 많은 파견노동자들이 2년 이상 정규직 간주 조항을 피한다는 명목으로 길거리로 내몰렸을 때 노동운동 진영은 이에 대해서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했다. 그러면서 파견은 일반화되었다. 정부는 이미 2000년에 파견법의 성공을 교훈삼아서 다른 비정규직을 양산할 계획을 세웠다.
2000년 4월 노사정위원회 경제사회소위원회에서의 비정규직 관련 논의를 시작으로, 10월 4일에 발표된 비전형근로자 보호대책이 그것이었다. 이 안에는 특수고용 노동자의 준근로자화, 기간제의 자유로운 활용, 파견법 허용대상 확대 등 2004년에 제출된 법안의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 이후 2002년 5월 노사정위원회 비정규직특별위원회의 “비정규근로자 대책 노사정 합의문” 발표, 2003년 노동부의 “노사관계법·제도 선진화방안” 발표 등으로 이어진 비정규직 관련 법 개악안의 완성본은 2004년 9월 입법 발의한 비정규법안으로 완성된다.
2) 노동법 개악 저지투쟁의 본격화
(1) 비정규 주체들의 처절한 몸부림으로 시작된 개악저지 투쟁 (04년 7월부터 05년 3월까지)
- 정부 개악안 발표와 열린우리당 점거 농성(04년 7월부터 04년 9월까지)
- 국회 타워크레인 농성과 총파업 철회(04년 11월부터 12월까지)
- 계속되는 투쟁과 민주노총 대의원대회 사태(05년 1월부터 3월까지)
2004년 9월 발표된 정부안은 2000년부터 진행된 정부의 비정규직 관련한 논의 속에서 가장 후퇴한 입장을 담았을 뿐 아니라, 비정규직을 정상적 고용형태로 간주하여 이에 맞춰 법제도를 정비하겠다는 구상을 분명히 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 법안의 의미는 법안 자체가 아니라 그야말로 이데올로기이고, 신자유주의 유연화의 완성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열린우리당 점거 농성은 운동진영에 개악저지 투쟁에 나서게 한 공헌도 컸지만, 비정규직 당사자가 스스로 정부의 법안이 개악안임을 천명하는 것이었다. 정부의 개악안에 맞서 운동 진영이 정부의 안이 개악안임을 명확히 선을 긋게 하는 동시에,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투쟁에 나서야 함을 일깨웠다. 이로 인해 9월 21일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는 총파업 결의안 통과되었고, 9월 22일 '비정규직 노동법 개악저지와 노동기본권 쟁취를 위한 공대위'가 발족하여 노동법개악에 맞선 광범위한 전선을 형성했다.
그러나 04년 11월 26일에는 11월 총파업을 앞두고 4인의 비정규 노동자들의 국회 타워크레인 고공 농성이 있었지만, 비정규직들을 ‘위해서’ 투쟁해야 하는 것으로 왜곡되어 인식되었기 때문인지 11월 26일 총파업은 그다지 힘이 없었고, 결국 2004년 11월 2일에 총파업은 철회되었다. 노동법 개악저지와 권리보장 입법 쟁취라는 기조로 총파업을 조직했지만 결국 당시 이수호 위원장의 “이제 권리보장 입법 쟁취를 향해 나아갑시다!” 라는 마지막 선언으로 마무리 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 선언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내포한다. 처음부터 비정규노동자들이 단병호의원의 이름으로 발의한 ‘권리보장입법안’을 원칙으로 내세웠던 그 의미를 모두 다르게 해석하며 갈등과 논란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잠복해 있던 각자의 동상이몽은 이때부터 시작한다. 비정규노동자들은 이 의미를 수세적 요구가 아닌 공세적 요구이자 투쟁을 통한 노동기본권을 쟁취할 원칙으로 여겼다. 그러나 어떤 이는 투쟁이 아니라 노사정교섭을 하자는 의미로 생각했고, 어떤 이는 국회 안에서 조금이라도 얻어서 입법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묘하게 ‘정부의 개악안’ 과 단병호의원이 발의한 ‘권리보장입법안’이 분리되지 않은 채 권리보장을 하자는 말이 과연 누구의 안을 바탕으로 하는 것인지 쟁점이 섞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 당시는 사회적 합의주의 관련한 논란이 한 축으로 등장하고 있었기에 이런 쟁점이 섞이기 시작한 것은 이후에 상당한 문제로 발전한다. 특히 이 문제는 2월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와 2월 임시국회 상황에서 여전히 불씨로 남았다. 비정규 개악안에 대한 대중의 분노와 투쟁이 여전히 존재했고, 투쟁 주체들의 투쟁의 의지도 꺾이지 않고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민주노총이 비정규법안 저지를 위해서 교섭을 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미 사회적 교섭과 비정규 개악안이 하나의 덩어리로 존재하는 상황이었다. 폭력사태라며 언론에 집중 공격된 2월 1일 영등포 구민회관에서의 대의원대회 등 교섭이 아니라 투쟁으로 돌파하자며 민주노총의 교섭 방침에 대한 내부의 투쟁이 존재했던 상황이었다.
실제로 2월 임시국회에서도 사회적 교섭과 노동법 개악과 관련된 문제는 관련이 있었는데, 대의원대회 사태로 보인 이 당시의 중요 쟁점은 극좌 맹동주의 폭력성에 있지도 단순하게 사회적 합의에 대해 찬성이냐 반대냐에 있지도 않았다. 과연 비정규 노동자의 삶의 문제를 가져올 비정규 노동법 개악 안에 대해 어떻게 고민할 것인가에 있다. 이 쟁점이 풀리지 않은 채 대의원대회는 3월로 연기되고 2월 23일과 24일 양 이틀을 걸쳐 긴장으로 몰아넣던 강행처리 방침도 결국 4월 논의로 넘어간다.
(2) 국가인권위 의견 발표와 비정규 노동법 수정안의 등장 (05년 4월부터 05년 9월까지)
- 국가인권위 노동법 개악에 대한 의견의 문제점 (05년 4월)
- 노사정대표자교섭과 민주노총의 수정안 (05년 4월부터 5월까지)
- 비정규노동법 개악 저지 공대위 해소 (9월)
2월 임시국회 일정도 끝나고 다시 법안의 문제가 불거진 것은 05년 4월부터였다. 4월 12일에 국가인권위는 정부의 비정규개악안에 대해 기간제 사용사유제한과 동일노동-동일임금 원칙 명기, 파견허용대상 현행 유지를 제안함에 따라 정부의 입지는 좁아졌지만, 정부의 강경 방침은 변하지 않았다. 인권위 의견이 나오자 민주노동당은 인권위 의견에 환영의 의사를 보였고, 민주노총은 정부 입법에 대한 수정안을 내놓으며 인권위 의견에 환영을 비추었다. 그러면서 민주노총은 4월 21일 중집에서 ‘개악안 저지’에서 ‘인권위안 존중, 권리보장 입법 쟁취’로 교섭방침을 전환하고 ‘4월 국회 인권위 입법’ 의 현실화를 최대목표로 전향적인 안을 끌어내 이후 입법과정에서 가이드라인이 상향될 수 있도록 한다는 내용을 논의했다. 한국노총도 “인권위안으로 4월 처리한다”는 기조에 동의한다며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은 단식과 함께 공조의 의사를 보였다.
그러나 당시 인권위 의견이 정부의 개악안보다 전향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인권위 의견에는 문제가 있었다. 명백히 파견법 폐지가 아니라 파견법 허용의 메시지도 문제였지만, 심각한 것은 인권위 의견을 빌미로 본격적으로 수정안의 등장이다. 이때 인권위가 의견을 내기 전인 4월 5일 8개월 만에 ‘노사정대표자교섭’이 재개된다. ‘노사정대표자교섭’의 주요 문제는 노사관계로드맵이고 비정규 노동법 개악안에 대해서는 별도의 틀로 논의하겠다고는 했지만, 이미 2월 환노위 처리 공방 당시와 3월 대의원대회 무산이후 위원장 직권으로 추진된 ‘노사정대표자교섭’ 은 비정규직 법안의 운명을 좌우하고 있었다. 즉, ‘노사정대표자교섭’은 비정규노동법 개악안과 분리되었다고 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4월에 열린 '노사정대표자교섭'에서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수정안을 제출하면서부터 노동계의 동요는 본격화되었다. 기간제 고용에서 사유제한원칙을 포기하고, 파견법 철폐가 아닌 현행 파견법 유지를 골자로 하는 이른바 ‘노동계 단일안’이 교섭석상에서 제안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른바 ‘4월 교섭’ 은 결국 5월 2일 노사정교섭 결렬이 되면서 마무리 되지만, 경총의 견해 번복 및 정부의 강경입장으로 4월 교섭 자체가 파탄나면서 이 문제는 분명한 매듭을 짓지 못한 채 수면 아래로 가라앉게 되었다. 잠복된 ‘4월 교섭 내용’은 이후 11월에 와서 노사대표자교섭이 재개되면서 떠오른다.
인권위 권고안으로 수정안이 제기되고, 노사정대표자교섭이 결렬된 이후 다시 정기국회가 열려 쟁점이 부각되던 11월이 될 때까지 투쟁은 소강되고 말지만, 비정규 주체들이 투쟁을 이어 나가기 위한 흐름을 여전히 만들어 갔다. 작지만 끊임없는 투쟁의 흐름이 있었기 때문에 이후에도 투쟁의 흐름은 계속 될 수 있었는데, 이 당시 상황에서 또 한 번 눈여겨 볼 것은 ‘비정규노동법 개악 저지 공대위’의 해소였다. 04년 12월 민주노총의 총파업 철회부터 나오기 시작한 공대위의 분열은 결국 9월에 해소로 그 수명을 다 하였다. 이는 노동시민사회단체가 함께 공동대책위라는 것을 왜 만들었는지, 그 목적과 위상에 대해 심각한 의견차이가 있음을 보여줬다.
이러한 운동진영 내부의 입장 차이의 핵심은 비정규직 철폐냐 차별철폐냐의 문제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비정규직 노동기본권이냐 차별철폐냐의 문제인 것이다. 사실 이 문제는 비정규 문제의 근본적인 입장을 달리하는 것이기 때문에 시기 시기 마다 등장한다. 더구나 정부가 노동법 개악을 발표한 상황이기에 ‘비정규직 철폐’는 단지 원론적인 구호가 아니라 정부의 개악안을 막아서야 한다는 현실적인 상황을 반영하는 정세적 구호였다. 이처럼 운동진영 내부는 비정규직화 하는 제도에 반대하느냐, 일정정도 비정규직의 처우를 개선하는 것에서 문제의 해법을 가지느냐의 차이를 가졌다. 그런 까닭에 공대위의 분열과 해소는 당연한 귀결이었고 이는 이후 11월에 와서 더욱 노골화 되는데, 11월 한국노총의 최종안 발표가 그 차이를 작동케 하는데 불을 댕긴다.
(3) 민주노동당의 수정안 발표 환경노동위 법안 통과 (05년 11월부터 06년 4월까지)
- 국회 앞 농성투쟁 돌입 (05년 11월)
- 민주노동당의 수정안 등장 (05년 11월 29일부터 12월 9일까지)
- 노동법 개악안의 국회 환노위 통과 (06년 2월부터 06년 4월까지)
작지만 지속되는 노동법 개악 저지의 흐름이 있었기에 11월에는 이를 바탕으로 국회 앞 농성이 이루어졌고 노동법개악 저지를 위한 실천들을 벌였다. 민주노총 서울본부, 전비연 등을 중심으로 ‘비정규권리입법 쟁취와 투쟁사업장 승리를 위한 공동투쟁본부’(이후 ‘공투본’)가 꾸려졌고, 지역과 현장조직 중심으로 ‘비정규직 철폐 현장투쟁단’(이후 ‘현투단’)이 꾸려져 국회 앞 농성에 들어갔다. 잠복된 ‘4월 교섭 내용’은 민주노총이 11월 노사대표자교섭이 재개되면서 다시 떠오르게 되었다. 4월 교섭당시 제기하였다가 교섭결렬로 사라졌다던 수정안이 민주노총에 의해 노동계의 공식요구로 재등장하였다. 이에 전국비정규노조연대회의 및 공두본, 현투단 등 국회 앞에서 농성투쟁을 전개하고 있던 단위들이 이러저러한 통로를 통해 민주노총(비대위)에 문제를 제기하였으나 역시 분명한 해결을 보지 못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11월 29일 한국노총이 ‘최종안’ (기간제 2년 사용 후 정규직화, 불법파견 고용의무, 특수고용 관련 내년 상반기 중 논의)을 발표하며 전선이 분열되더니, 민주노동당이 12월 6일 차별시정을 중심으로 단계적 분리처리를 제안과 환경노동위 법안심사소위가 열리던 8일에 기간제 사유제한 관련 수정안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국회 앞에서 농성을 하던 전비연(공투본), 현투단 등은 민주노동당에 항의 간담회를, 그 외 단위들도 각종 성명서 등을 통해 문제제기를 계속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12월 8일 법안심사소위 논의까지를 거치면서 정부·여당의 법안은 ‘몇 가지 쟁점’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통과되었다. 그리고 법안심사소위를 통과한 노동법개악은 06년 2월 27일 국회 환경노동위에서 질서유지권까지 발동하며 통과된다. 2년 여 가까이 오랫동안 매 시기마다 통과에 대한 긴장과 대치가 계속되었던 터라 이날의 환노위 통과는 많은 사람들을 허탈하게 했다. 미처 어떻게 손도 써보지 못하고 날치기 통과가 되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이후의 무기력은 더 심했다. 민주노총은 다음 날부터 총력투쟁으로 대응했지만, 그나마도 철도 파업으로 온 관심이 집중되어 비정규 법안 환노위 날치기 통과에 대한 분노는 이후에 보이지 않게 된다.
(4) 비정규 노동법 관련 ‘재논의’ 안의 등장과 시행령 개입 전술 (06년 5월부터 06년 12월까지)
- 다시 불거진 노동법 개악 재논의 안 (06년 4월부터 11월까지)
- 한국노총의 노사관계 로드맵 밀실 합의 (06년 9월 11일)
- 노동법 개악 국화 본회의 통과 (06년 11월 30일)
- 시행령 개정안 개입 전술 (06년 11월 30일 노동법 개악 통과 이후)
환노위 통과 이후 민주노총은 노동자대회를 통해 노동법 개악안에 대한 재논의 입장을 스리슬쩍 비추었고,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의 공조가 다시 얘기되기도 했다. 6월에는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이 공동투쟁본부를 구성하여 어느새 노동법 개악 ‘재수정’은 기정사실화되어 갔다. 실제 이 입장은 그 이후로 변하지도 없어지지도 않았고 잠복해 있었다. 9월 노사관계로드맵에 대한 한국노총의 밀실 합의를 기점으로 정세는 노사관계 로드맵에 반짝 주목하는 것 같더니 북핵과 국정감사, 한미 FTA로 이 문제는 방치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다른 투쟁의 사안 때문이 아니라 국회에서 아직 이 문제를 다루지 않았기 때문이다.
2월 환노위 통과 이후 제동이 걸리지 않던 노동법개악은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전격합의로 11월 7일에 법사위에 긴급 상정된다. 결국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공방으로 이날 법사위 상정은 지나가지만 11월 29일 법사위 상정은 다시 시도된다. 실제 11월 30일 노동법 개악이 통과되던 날도 산별대표자회의에서는 수정안 얘기가 나왔지만 크게 다뤄지지는 않았다.
문제는 그 잠복해 있던 노동법개악안 재논의의 입장이 법안 통과 이후 시행령 개입이라는 형태로 들어난다는 점이다. 물론 민주노총은 ‘비정규법안 무효’를 선언했지만, 이후 투쟁방향 설정에서 시행령에 개입에 대한 입장을 드러낸다.
3) 비정규법안이 통과된 전후의 상황
정부가 8월에 발표한 ‘공공부문 비정규대책’은 공공부문 노동자 5만 4천명 정규직화라는 타이틀로 다가섰다. 그러나 그 실내용을 살펴보면, 외주화를 가속화하고, 차별을 고착시키는 무기계약근로로의 전환일 뿐인데도 그것을 정규직화라고 선전하고 있다.
또한 노동부가 10월 25일 발표한 ‘특수형태근로종사자 보호대책’ 역시 산재보험 적용, 불공정거래행위 방지 등을 골자로 하여 “보험설계사, 골프장 경기보조원, 학습지 교사, 레미콘 기사 등 특수형태근로종사자 보호의 길이 열렸다”며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이 두 사안이 기간제법안 신설과 파견제 개정, 노동위원회 개정으로 요약되는 노동법 개악의 통과 전후에 일어난 일이다. 일단 공공부문 노동자부터 노동법 개악의 구미에 맞게 길들이기 위해 대책을 내놓았고, 이 법안이 통과된 이후에 특수고용이라는 비정규직마저 나락에 떨어뜨리기 위해 법안을 손질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이 법안들이면 개별적 노사관계에서의 손질은 끝난다. 그리고 남은 것은 98년 정리해고제에 이은 ‘노사관계 로드맵’이라는 집단적 노사관계 시나리오의 완성이다. 결국 ‘노사관계 로드맵’은 한국노총의 9․11 합의 이후 12월 22일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되고 만다.
정부의 의도는 노동법 개악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실제 위에 열거한 상황들만 보더라도 교묘하고 치밀하게 준비된 시나리오에 맞춰 노동유연화 전략을 세우는 것이다. 그 각각의 법안이 맞물리고 상호 작용하여 몇 배의 작동을 하여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투쟁에서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 각각의 상황을 개별적 대응한 것이 일차적 문제였겠지만 그 나름으로 어떠한 지점에서 문제인지 살펴보기로 하자.
3. 노동법 개악 저지 투쟁, 왜 문제였는가.
(1) ‘비정규직’을 위한 대리투쟁의 성격을 버리지 못한 채, 전체 노동자투쟁으로 만들어지지 못했다.
노동법 개악 초기에는 현장에서부터 투쟁을 만들기 위해 농성을 비롯한 여러 노력들이 존재하기도 했고, 해마다 겨울이면 집중투쟁을 배치하기도 했으나 실패로 귀결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으나 노개악 저지 투쟁이 비정규직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체 노동자들의 몫이라는 사실을 인식시키지 못했던 점이 가장 큰 이유가 되겠다.
애초에 자본의 ‘비정규 보호’라는 이데올로기는 노동법 개악이 결국 악법이라는 것을 밝힘으로써 파탄난 것처럼 보였지만 ‘보호’라는 측면만 문제제기된 것이지 이것이 ‘비정규직들에 대한 것’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여전히 살아있었다. 이 법안은 비정규직들의 문제가 아니라 정규직인 노동자들을 비정규직으로 만드는 법안이며,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기본권의 문제와는 다른 성격이라는 점이 충분히 설득되거나 이야기되지 못한 채 ‘비정규직 문제’라는 당위로만 접근되었다. 그래서 투쟁이 ‘비정규직을 위해’ 해주는 대리투쟁 정도로 인식되면서 현장의 투쟁 동력을 만들지 못한 것이기도 하다. 비정규직의 노동기본권 보장이 곧 전체 노동자의 노동기본권을 실질적으로 확장시키는 과정이라는 인식 위에 투쟁을 전략적으로 배치해야만 했다.
(2) 대중투쟁이 아닌, 교섭과 협상으로 매몰되었다.
비정규직 법안의 문제는 국회가 열리는 기간 동안, 교섭의 대상 이상이 되지 못했다. 보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민주노총 조합원의 다수를 차지하는 정규직들을 교육·선동하여 총파업 투쟁으로 조직해내고, 각개 투쟁하는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을 노동법 개악 저지와 권리입법 쟁취 투쟁전선으로 엮어 내려는 노력이 극히 부족했다.
04년 9월 정부 법안이 발표되고 나서 2년이 넘는 시간이 있었고, 그 속에서 정부 법안이 결국은 노동자대중 전체의 일자리를 위협하고 노동기본권을 제한하려는 것이라는 점을 교육·선전하면서 조합원의 의식과 실천을 끌어 올릴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또한 곳곳에서는 아직도 상시적 구조조정의 공세가 계속되고 있었고 현장의 사안들은 넘쳐나는데, 이러한 현장의 투쟁을 조직하고 끌어올려 정부의 노동유연화의 공세에 함께 갔어야 했다. 이러한 시도들이 대중투쟁으로 조직될 수 있었던 것인데, 민주노총의 ‘총파업’은 국회 일정과 노사정교섭에 맞춰 '선언'하고 '동원'하는 것이었고 그러다 보니 점점 지쳐가고 대오는 줄어만 갔다. 더구나 민주노총의 총파업은 노사정 교섭의 과정에만 매몰된 것이 아니라 민주노동당의 국회투쟁과 맞물리며 더욱 심하게 나타났다. 민주노동당의 국회 안 투쟁 바라보기에만 급급하여 투쟁이 어디에서 나오는가에 대한 기본 원칙을 잊어버리고 동원에만 몰두한 결과는 암담했다. 언제부터 우리가 우리의 의견을 대변하는 국회의원이 있기 때문에 투쟁해왔는가. 누군가 대신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요구를 우리의 목소리로 직접 선전하고 투쟁해왔던 것이 우리의 역사다. 그런데 노동법 개악 저지 투쟁에서는 우리가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적나라하게 말해 민주노동당 국회의원들이 국회 안에서 투쟁하고 밖에서 응원해주는 들러리로 전락한 것은 아니었는지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노동자 투쟁의 최고 전술인 총파업은 국회의 의사결정에 압박을 가하기 위한 대대적인 대중동원, 상징적인 경고의 형태로 어느덧 변질되어 갔다. 총파업은 조합원들을 정치적으로 교육하고 단련시키는 공간이어야 하며 새로운 대중투쟁을 촉발하는 출발점이어야 한다. 총파업의 성과는 대중동원의 수가 아니라 조합원들의 정치적 의식의 변화를 기준으로 평가되어야 하며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실질적인 정치적 행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교섭과 협상에 매몰된 민주노총의 총파업은 애초부터 시들해지는 것을 전제로 한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이처럼 계속되는 국회 안에서의 타협 놀음에 조합원 대중을 동원하면서 말장난을 해왔던 과정에서, 조합원들은 힘을 발휘할 기회와 능력을 잃어버렸다.
(3) 대중투쟁으로 배치하지 못한 비정규직 주체들의 한계
비정규직 노동조합들은 전국비정규연대회의의 선도적 투쟁을 통해 정부 법안이 '개악안'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비정규직 당사자 스스로가 이를 분쇄하기 위해 투쟁한다는 점을 대내외적으로 분명히 하였다. 비정규직노조 대표자 수준에서는 정세에 대한 공유나 어느 정도의 실천이 이루어졌으나, 대표자를 넘어 해당 노조에까지 긴장감이 형성되지는 못했다. 단위 사업장의 현안을 놓고서는 그야말로 치열한 투쟁을 전개하였으나, 노동법개악저지 투쟁에 있어서는 적극적으로 임하지 않았다. 물론 노동조합 유지 자체가 어렵고 사용할 수 있는 전술이 극히 제한되어 있는 비정규직노조의 조건을 감안해야 하겠지만, 비정규직 노조마저도 자신의 현안과 권리입법을 별개의 것으로 바라보았던 점은 분명히 평가해야만 한다. 더구나 투쟁이 시기가 지나면서 비정규직노조 역시 대중적인 투쟁과는 점점 멀어지게 된다. 대중투쟁을 만들지 못해 간부 중심의 선도투쟁이 계속 고민되고 대중 투쟁으로의 가능성은 점점 멀어지게 되었다.
4. 앞으로의 투쟁 방향
(1) 투쟁의 원칙을 지키자 - 노동기본권 박탈하는 비정규악법 전면 폐기하라!
누구는 이 기조에 대해 낡은 기조, 또는 원론적이기만 하고 현실적이지 못한 기조라고 말한다. 그러나 혼란의 시대, 무력함의 시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바로 원칙을 잃지 않고 초심을 버리지 않는 것이다. 벌써부터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계약해지가 점점 나타나고 있다. 모두들 아우성이다. 비정규악법의 핵심적 문제는 노동자의 고용이 불안해지는 것도 있지만, 비정규직을 정상적 고용형태로 만든다는 점이다. 그나마도 무권리 상태에 놓여있던 비정규직들이 그동안 투쟁으로 쟁취한 많은 권리들을, 고용형태를 바꾸어서 송두리째 빼앗아가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비정규직을 정상적인 고용형태로 만드는 비정규악법을 절대로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비정규직을 정상적 고용형태로 만들어서 전체 노동자들을 유연화의 늪에 빠뜨리는 정권과 자본의 전략을 절대로 허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현실은 인정하고 (잘못된 현실을 받아들이고) 조금만 고치자고 한다면 무엇이 나아지겠는가. 우리가 원칙을 얘기하는 이유는 현실의 논리로는 당장 간신히 살 수 있지만 언젠가는 모두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우리 스스로 만들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노동운동 진영이 언제 실현 가능성을 두고 투쟁해왔던가. 사실 그 투쟁의 역사라는 것도 원칙 아래서 끊임없이 외치고 두드리며 결국에는 우리의 것으로 만든 것이다. 그렇게 실현 불가능하다고 하면 국가보안법 폐기를 위해 왜 그렇게 오랫동안 투쟁하고 많은 사람들이 투쟁해오고 있는가. 결국 원칙을 저버리지 않고 투쟁하는 것만이 진정한 해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노동법 개악이 통과된 마당에서 가장 현실적으로 해 나갈 것은 시행령 개입 투쟁이라고 말한다. 이미 비정규직 법안이 통과되었으니 이제 내년 7월까지 만들어야 하는 ‘시행령에 개입’하여야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저들이 노리는 것은 비정규직을 정상적인 고용으로 인정하고 고착화 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이에 단호히 선을 긋고 결코 노동법 개악에 대해 인정하면 안 된다. 이를 인정하는 순간 지난 7년간 투쟁했던 비정규직의 진정성은 모두 사라지고 만다. 우리의 역사를 저들에게 바칠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시행령 개입 투쟁이 아니라 비정규악법 폐기 투쟁을 선언하고 가야한다. 과거 피해최소화 논리로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을 받아들이고, 구조조정을 받아들였던 결과가 어떠했는가. 구조조정은 일상적인 형태로 우리의 삶을 침투해 들어갔고, 전선은 후퇴하고 우리의 일상은 파괴되었다. 잘못된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원칙을 놓지 말고 가야 한다. 가장 먼저 우리의 투쟁의 전제는 비정규악법에 대한 폐기투쟁의 천명이다. 우리 스스로 정부가 만들어 놓은 법안을 인정하지 말자는 얘기다.
(2) 차별시정을 피해가기 위해 확산되는 자본의 시도를 막고, 비정규직문제를 차별문제로 왜곡하려는 행보를 저지하자!
정부의 노동위원회 법안이 통과되고서 많은 차별 시정을 우려한 흐름들이 나타나고 있다. 자본 측에서는 차별시정을 피하기 위해 오히려 비정규직을 별도의 직군을 만들어 놓고 있다. 대표적으로 정부의 공공부문 비정규대책에서 나타난 ‘무기계약근로’ 전환이 그러하고, 우리은행의 ‘독립직군제’가 그러하다.
정부에서는 공공부문 상시업무는 모두 무기계약근로로 전환하겠다고 했다. 자세히 보면 각종 차별은 여전히 유지된다. 외냐하면 새로운 직군을 만드는 셈이기 때문인데, 법안은 2년 이상 정규직화인데 정규직화 하기는 싫고, 노동자들을 2년마다 한 번씩 자르려고 하니까 새로 뽑기 귀찮고, 그래서 ‘무기계약근로’라는 별도의 직군을 만들어서 차별을 유지하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은행의 독립직군제 역시 비정규직 노동자만을 별도 직군으로 묶어 고용은 보장하되 임금은 정규직의 절반 정도로 유지하겠다고 하는 것이 골자이다. 자본가들은 고용을 보장하되, 비정규직을 쓸 수밖에 없는 요인인 임금 저하를 용인하는 기가 막힌 제도라고 격찬하고 있지만 특정한 노동자들의 신분을 묶어두고 차별을 영속화하는 반노동자적인 제도이다. 임금과 노동조건, 그리고 승진의 기회에서 정규직들과는 다른 완전한 차별을 받게 되고, 우리은행 자본가측은 독립직군제 도입 이유도 당시 국회에 계류 중인 노동법 개악안 중 ‘차별금지조항’ 때문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또한 차별 시정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직접고용 비정규직은 오히려 이로 인해 ‘외주화’의 압력에 시달리고 있다. 많은 공공부문 직접고용 비정규직들이 현재 외주화 바람에 몸살을 앓고 있다. 외주화 배경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지만 차별시정을 피하기 위한 것도 한 축으로 작동한다.
한편, 노무현 정권이 노리는 것은 비정규직 문제를 자신의 손아귀에 넣고 그간 진행된 비정규운동의 쟁점을 ‘차별’로 전화시켜 비정규직 노동운동의 싹을 아예 자르려고 하는 것이다. 비정규직이라는 고용형태 자체가 비정규직이라는 이름으로 표현되는 문제들의 근본적이고 직접적인 원인인 것이다. 차별은 그로 인해 불거진 현상의 한부분이다. 그런데 정부는 비정규직 문제의 쟁점을 차별의 문제로 전환시키려 하고 있다. 영구히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시혜의 대상인 불완전한 존재로 남겨둔 채, 자신들이 비정규직노동자들의 '보호자'임을 자처하려 하고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자신들의 노동조건을 개선하려는 투쟁에 나서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운동진영 일각에서 나타나고 있는 차별 시정에 대한 논리는 위험한 것이다. 이미 비정규운동의 초반에 나타난 ‘비정규직 철폐 vs 차별철폐’ 의 논쟁이 다시 첨예하게 나타난다. 차별은 없어져야 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본질을 외면한 채 시작되는 차별에 대한 집중은 사실 그 의도가 음흉하다.
(3) 제도 개입이 아닌, 노동유연화를 둘러싼 이데올로기 투쟁이 필요하다!
노무현 정권은 정권 초기부터 정규직노조 죽이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2003년 취임이후 첫 미국방문 당시 노무현은 글로벌 스탠더드를 외치며 내외신 기자회견 등을 통해 "국내 노동인력 중 비정규직 비율이 56%가 넘는 점은 시정해야 하지만 강력한 노동조합이 버티고 있어 정리해고가 어려운 대규모 사업장은 타협을 통해 노동유연성을 높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미 과도하게 늘어난 비정규직에 대해서는 '보호'라는 미명하에 '합법적·제도적으로 인정하여 활성화'하고, 정규직에 대해서는 공격을 지속하여 노동조건의 ‘하향평준화’를 통한 글로벌 스탠더드를 완성하겠다는 것이 노동문제에 대한 구상이었다. 결국 노무현 정권은 집권 4년 내내 지하철노조․철도노조 등의 대규모 공기업 파업, GS 칼텍스 노조 파업 등 대규모 노조마다 이 논리로 선전해냈고, 사회양극화라는 표현으로부터 더욱 이 논리를 굳혀갔다.
문제는 정부가 제도를 완성시키고 이제는 판단도 흐려진 노동운동 진영에게 차별을 하면 안 된다는 상황으로 이에 대한 내부 교란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정규직노조에 대한 도덕성 공격도 계속 된다.그나마도 노사관계로드맵 통과이후 힘도 없어질(?) 정규직노조에게 양보와 미덕을 발휘하여 비정규직을 생각하라니, 우리는 왜 이런 문제에 침묵하고 있는 것일까. 민주노동당이 양극화 해소를 위해 ‘소득연대전략’을 내놓으며 대선을 준비하고 있고, 정규직노조인 우리은행노조가 자신의 임금을 동결시켜가며 비정규직 3100명을 정규직화 한다는 사실이 언론에 대서특필 되었다. 모두들 이 문제에 대해 갸우뚱 한다. 뭔가 약간 찝찝하지만 어쨌든 함께 나눈다는 것은 좋고, 정규직화는 환영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민주노동당의 ‘소득연대전략’은 노동자들이 먼저 나서서 소득세와 사회복지 기여금을 추가로 부담하겠다고 결의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본과 부유층에는 증세를, 자영업자들에는 공평과세를 압박하고 이에 따른 재정 확대분을 복지확대와 공공부문 일자리 창출에 투입하도록 하는 것이 핵심이다. 모두가 공평에게 빈부격차 없는 사회를 만들고 싶은 소망이야 가득하고 종합부동산세나 부유세 같은 고민이야 필요하겠지만 어째 ‘고소득 노동자의 소득세 인상과 미래 급여 인하를 통한 저소득 노동자 지원’이라는 민주노동당의 순진한 발상이 맘에 걸리는 것은, 왜 하필 정권이 정규직노동자가 많이 가져서 비정규직 문제가 생긴 것처럼 호도하는 이 시기에 저런 전략이 나오는가에 있다.
우리은행의 경우도 그 파장이 만만치 않다. 우리은행 노사는 1만 1천 여 명 노동자 중에 정규직의 임금동결을 전제로 직접고용 비정규직 3100명을 내년 3월부터 정규직화하기로 합의했다. 이들은 창구업무를 담당하는 Mass Marketing 직군, 사무지원직군, 콜센터 업무를 담당하는 Customer Satisfaction(고객만족) 직군에서 일하는 노동자들로 대부분 여성노동자였기에 여성단체에서도 환영 성명을 내보내기도 했다.
그런데 우리가 언제부터 정규직 임금을 양보해서 비정규직을 구제해왔는가 말이다. 역시나 의심의 눈초리를 버릴 수 없는 것은 ‘정규직 노동조합의 양보를 통한 비정규직 문제 해결’이라는 노무현 정권 4년 내내 귀가 달토록 들었던 그 얘기가 노동법 개악이 마무리되는 이 시점에 부각되느냐에 있다. 이건 환영할 만한 얘기가 아니다. 노무현 정권의 시나리오가 그대로 재현된 것이다. 이제 비정규직 문제의 해결은 정규직노조가 양보해서 노동자 스스로 알아서 하라는 얘기다. 여기서 우리는 벌써 노무현 정권의 덫에 걸려버리고 만 것이다. 노무현 정권이 집권 초기부터 누누이 강조해왔다. 정규직노동자가 나쁜 거라고. 불쌍한 비정규직 등 소외된 계층을 영원히 불쌍히 여겨 보호하고, 그 책임을 정규직노동자에게 돌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선동을 해왔는가. 우리는 거기에 고스란히 말리고 이제는 판단도 흐려져서 적(敵)과 아(我)를 구분할 줄도 모르는 흐릿한 상태가 되어 왔다.
문제는 정부는 이렇게 이데올로기 공세를 펼치는데 우리의 대응은 미진하다는데 있다. 정규직 죽이기 이데올로기로 비정규직 문제를 길들이기 시작한 것처럼, 앞으로 비정규직 문제를 호도하고 쟁점을 선도하기 위한 정권의 시도는 계속될 것이다. 우리는 이에 제도 개입과 같은 수세적 방식이 아니라 우리의 논리로 우리의 무기를 만들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혼란의 시기 일수록 내부의 교란을 막기 위해 정부와의 이데올로기 투쟁을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더 힘든 싸움이지만 진짜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지금 필요한 것은 원칙을 잘 지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