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호]사회적 대화의 가능성? 웃기지 마세요!(07년 1월호)

- 산재보험 개악과 불안정노동자 건강

해미 ⎟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1. 그네들의 이야기

#1. 회사를 그만두고서야 산재를 신청할 수 있었던 계약직 노동자
모 건설회사에서 계약직으로 CAD 작업을 했던 그녀는 매일 12시간씩 일을 했다. 일주일에 하루정도는 야근까지 해야 했고 인력이 없어서 모든 작업을 그녀 혼자 했다. 어떤 날은 점심시간을 쪼개서라도 일을 해야만 했다. 점점 어깨와 목이 심하게 아파오기 시작했고 심지어 손까지 저려왔지만 그녀는 제대로 치료받을 수가 없었다. 자다가 깨기도 일쑤였다. 바른말 잘하는 그녀를 회사는 싫어했고, 심지어 왕따를 시키기도 했고 아픔을 호소하자 ‘체질이 약해서 그렇다’, ‘아픈데 어떻게 일을 하냐? 집에 가서 그냥 쉬어라’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이러다 보니 아파도 참을 수밖에 없었고 작업시간이 길어서 제대로 치료를 받을 수도 없었다. 스트레스가 증가하면서 그녀의 통증은 더 심해갔다. 그 회사는 비정규직에 대한 노무관리가 뛰어나기로 유명했다.
너무 심하게 아파져서 더 이상은 컴퓨터 작업을 못할 지경이 되자 그녀는 회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서야 병원을 찾을 수 있었다. ‘경추신경병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물론, 요양신청서의 사업주 날인은 받지 못했다. 동료 진술서도 그녀와 같은 사무실에서 일을 하다 그만둔 비정규직 동료가 써 주었다. 이런 그녀의 산재요양 신청에 대해 근로복지공단은 “근전도 검사 결과가 확실하지 않다”며 불승인을 내렸다. 근전도 검사는 대학병원 재활의학과에서 정밀하게 이루어진 검사였고, 재활의학과 전문의의 진단서를 첨부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2. 회사의 복직 거부에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하청 노동자
현대중공업에서 사내하청으로 일하던 손창현 동지는 지난 10월 29일 손목과 목을 스스로 칼로 그었다. 그는 8년간 소지공으로 일했다. 130만 시간 무재해 포상을 받았던 한성ENG는 허리가 너무 아파서 일을 할 수 없다는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공상으로 처리를 해 놓고 치료를 해주는 생색만 냈던 한성ENG는 요양연기에 대해서 ‘무급처리를 하겠다’고 했다. 더 치료가 필요했던 손창현 동지는 8월 산재 신청을 하였다. 회사는 '산재처리하면 퇴사한 것으로 알겠다', '복직하려면 완치되었다는 담당의사의 각서를 받아오라'고 했다. 심지어 회사는 출입증을 갱신해 준다며 출입증을 빼앗아 회사출입을 막았고, 휴업급여 신청 과정에서 기만적으로 퇴사동의서에 서명을 받기도 했다. 이런 회사가 10월 1일 무재해 포상을 받았다. 3개월의 요양 후 복직을 요구한 그에게 회사는 복직을 거부했다. 그의 통장에는 10여만 원의 잔고가 남아있었고 그는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3. 노동자로 인정도 받지 못한 학습지 노동자
2004년 4월 갑작스런 호흡곤란으로 사망한 이정연 동지는 학습지 노동자였다. 이정연 동지가 관리했던 200과목 중 130과목은 가짜였다. 이들의 회비 200여만 원을 고스란히 이정연 동지가 부담하고 있었다. 가짜회원의 회비 대납을 위해 그녀는 2천만원의 카드빚을 지고 있었다. 학습지교사들은 몇 명에서 수십명의 가짜 회원 만들기를 강요당하고 가짜회원 회비 수십만 원에서 수백만 원을 매월 교사들이 대납하고 있다. 그리고 회비 미수금을 교사들이 대납하는 비상식적인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이런 압박과 스트레스에 시달렸음에도 불구하고 이정연 동지의 사망사건은 ‘노동자가 아니다’라는 이유로 근로복지공단에서 거절당했다.

2. 40년만의 개혁? 뭐가 개혁인데?

노동부는 작년 12월 제정 40년만의 개혁방안이 노사의 참여 속에 마련되었다며 입법예고를 하였다. 그리고 올해 1월 국정브리프에서는 ‘도입 된 지 40여 년이 지나도록 이해 당사자의 반대로 지지부진하던 산업재해보상보험제도 개혁방안이 4대 사회보험 중 처음으로 노사정간 합의에 이르렀다. 사회적 대화의 가능성을 확인한 이번 합의로 산재보험 서비스가 획기적으로 높아질 것으로 기대된다.’고 논평하였다.
정말 사회적 대화의 가능성을 확인한 걸까? 그리고 이번 개정으로 산재보험 서비스가 획기적으로 높아질까? 대답은 ‘아니올시다’이다. 진정 산재보험 서비스가 획기적으로 높아졌다면 회사를 그만두고서 산재 요양 신청을 했던 계약직 노동자는, 복직을 거부당해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하청 노동자는, 그리고 노동자로 인정받지도 못했던 학습지 노동자들의 사례는 이 땅에서 사라져야 한다. 그러나 이번 개정의 결과는 이런 사례들을 더욱더 증가시킬 뿐이다.

이것부터 없애자! - 사업주 날인과 자문의사제도
산재 요양 신청서에 찍게 되어 있는 사업주의 날인은 고용관계 사실만을 확인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공식적(!)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이는 노동자의 산재 신청을 막는 방법으로 악용되고 있다. 많은 노동자들은 사업주가 도장을 찍어주지 않으면 산재 신청을 할 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특히, 고용 상태가 항상 불안정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사업주 날인은 산재신청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와 같다. 산재 신청을 하기 전 사업주의 도장을 받아야만 하는 지금의 제도에서 ‘아프다’고 산재 신청을 당당히 요구할만한 비정규직이 얼마나 있을까?
또 하나의 대표적인 제도가 바로 자문의 제도이다. 주치의의 소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환자를 만나보지도 않은 자문의사들이 서류만으로 심사를 하며 불승인을 남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불승인에 항의하면 근로복지공단은 자문의사들의 ‘전문적 소견’이라며 발뺌하고 자문의사들의 신분은 절대 공개되지 않는다.
불승인이 났건만 그에 대해 책임질 사람도, 항의할 사람도 없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개정안에서는 업무상질병 판정위원회의 구성을 명문화하고 있다. 심사 기능을 분리하자는 요구가 있는 와중에 오히려 강화를 하는 것은 승인을 줄이겠다는 의도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이런 악질적 제도가 여전히 살아있고 심지어는 강화되고 있다. 이런데도 서비스를 높이는 개악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근로복지공단의 통제권을 강화하라?
이번 노동부 개정안의 명실상부한 핵심은 바로 근로복지공단의 산재환자에 대한 ‘통제’의 강화이다.
이번 개정안은 현재의 보상도 생활 임금에 못 미치는 상황인데도 최고보상한도를 만들고 업무상 재해의 인정 범위를 협소화하였다. 또한 의료기간에서 진료 기록을 제출하게 하고 이의 적정성을 심사하여 치료기간을 변경하는 등 다분히 요양 기간 자체를 근로복지공단에서 좌지우지 하겠다는 의도를 보이고 있다. 여기에 치료 받는 병원을 바꾸는 것에 대해 이유를 명시하게 하고 사전승인을 받게 하는 등 산재 노동자의 진료 선택권마저 침해하고 있다.
또한 장해 등급의 최초 판정 이후 수급권자의 신청뿐 아니라 공단의 직권으로 재판정을 하여 급여의 지급을 변동시킬 수 있게 하였고, 요양에 관한 지시를 위반한 경우에 공단에서 보험급여의 지급을 제한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이는 근로복지공단이 자의적으로 실제적인 급여의 지급 수준과 범위를 결정할 수 있게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치료를 제한하라?
이번 개정안은 부분휴업급여 제도를 도입하여 요양 중 취업(또는 근무 중 치료)이 가능한 상황을 만들었다. 이는 제대로 된 치료에 대한 장벽으로 작용할 것이며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의 경우에는 산재로 인정을 받더라도 병의 경중에 상관없이 일을 하면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황을 강요받을 가능성이 높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경우 산재를 인정받는 것 자체가 어렵지만 부분휴업급여 제도가 도입된다면 힘들게 산재를 받더라도 자의반 타의반으로 전일 휴업치료를 받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이는 제대로 된 치료를 제한하는 역할을 할 것이며 결국 질병의 장기화와 악화로 이어질 것이다.
또한 61세 이상의 고령자에 대해서는 연령에 따라 휴업급여를 삭감하는 안이 제출되었다. 모두들 주지하고 있는 사실처럼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고령자가 집중되는 업종이 있다. 특히 정리해고나 정년퇴임 이후 노년기에 비정규직으로 일을 하는 노동자들이 많다. 이들은 연령으로 인하여 사고와 질병의 위험이 높고 위험하고 어려운 작업이 많으며 대부분 최저임금 수준에서 일을 하고 있고 질병이 만성화될 가능성도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령자의 휴업급여를 삭감한다는 것은 기본적 사회 보장이 부실한 상황에서 노동자들의 기본적 생활을 뒤 흔들어 고령 비정규직들의 목을 이중으로 죄는 꼴이 될 것이다.
한편, 이번 노동부 개정안에는 그 동안 문제가 되어왔던 특수고용직 노동자에 대한 조항이 신설되었다. 골프장경기보조원․보험설계사․학습지방문교사 및 레미콘 차량 운전원을 산재보험 적용 대상에 포함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급격히 확산되고 있는 특수고용직 노동자의 일부에 불과할 뿐이다. 게다가 산재보험료의 절반은 해당 노동자가 직접 내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사회보험이라는 산재보험의 근간을 흔드는 것으로 시정되어야만 할 조항이다. 특수고용직 노동자들의 노동자성을 인정하고 사업주가 비용을 부담하는 것이 당연한 사회보험의 운영원리일진대 노동부의 개정안은 오히려 시대를 거스르고 있다.

3. 이것이, 제대로 된 산재보험 개혁이다.

이번 산재보상보험법의 개정에 대해 정부는 사회적 대화의 첫 성과물로 그 가능성을 확인했다고 이야기한다. 이 개정안이 노사정위원회를 통해 논의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 불가능성을 뼈저리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무리 합리적이고 괜찮은 제도적 개혁이라고 할지라도 노-사-정이 만나 이야기를 하게 되면, 결국 자본과 정부가 유리한 방향으로 변화될 뿐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제정 후 40년 만의 개혁이라는데, 산재보험 서비스가 획기적으로 높아질 거라는데 아무리 이모저모 따져보아도 그 가능성을 찾을 수가 없다. 모든 조항이 알맹이는 빠지고 쭉정이만 남았으며, 그 쭉정이 역시 자본과 정부의 입맛에 맞게 변형되어 근로복지공단의 산재 노동자에 대한 통제는 강화되고 노동자들의 치료권은 제한되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산재 보험 가입률이 30~40% 수준인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건강권이 보장될 구석은 찾아볼 수가 없다. 보험 가입률이 획기적으로 올라갈 것 같지도 않고 오히려 지금보다 더 제대로 치료받기 힘들고 어려워질 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산재보험은 사회 보험이어서 사업주들이 공동으로 부담해서 산재 환자의 질병과 사고에 대해 사업주의 책임을 묻지 않는 대신 아픈 사람 치료해주고 다시 일하게 해주는 보험이다. 내가 돈 낸 만큼 돌려받는 민간보험이 아닌 이상, 일하다가 아픈 노동자들은 누구든지 간에 제대로 치료 받고 다시 일 할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산재보험법 개정은 사회 보험으로서의 역할을 점점 줄이겠다는 발상에 불과하다.
40년 만의 개정이라는데, 사회적 대화의 성과라는데, 산재보험 서비스가 높아질 거라는데…. 앞으로도 계속 퇴직해서야 겨우 산재 신청을 해도 불승인 받고, 재활도 못한 채 복귀를 거부당해 목숨을 끊고, 노동자가 아니라고 죽음을 인정받지 못하는 무수한 노동자들이 생길 것이다. 이러한 노동자들이 생기지 않게 하는 것, 사회적 대화가 아니라 노동자의 요구와 필요에 충실한 보험을 만드는 것, 이것이 진정한 산재보험 개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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