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투쟁에서의 쟁점
하이닉스 투쟁 마무리 과정에서 많은 문제들이 불거졌다. 조합원들의 의사를 거치지 않고 직권조인을 하고 그동안의 투쟁을 돈으로 마무리한 것에 대해서 많이 이들이 비판을 했다. 많은 이들이 이렇게 투쟁을 마무리한 금속노조 중앙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는데도 당사자는 오히려 뻔뻔하다. “하이닉스 조합원들의 요구가 그러했고 그것을 다만 받아들였을 뿐이다. 절차상 사소한 문제가 있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들이 그렇게 당당할 수 있는 이유는 이것이 ‘단지’ 절차상의 문제일 뿐이며, 운동적 원칙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투쟁의 원칙이 다르다는 이야기이다.
하이닉스 투쟁을 통해서 본 ‘투쟁’에 대한 인식의 차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었고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집단적으로 계약을 해지당했다. 그러나 현행법으로는 이것이 부당해고가 아니었고 합법적 계약해지의 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하이닉스 노동자들은 온갖 투쟁을 다 해보았다. 가두도 점거하고 본사도 점거하고 철탑도 올라가고 단식도 하고, 천막농성도 하고, 삼보일배도 하고, 투쟁의 전술이란 전술은 모조리 해보았다. 이 투쟁에 지역이 연대파업을 하고, 많은 돈을 걷어서 투쟁에 함께하고, 구속자, 수배자도 부지기수였다.
그런데 더 이상 투쟁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이쯤 되면 자본이 항복할 만도 하건만 거대 자본은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고 노동자들은 최선을 다했으나 지쳐버렸다. 금속노조는 ‘직권조인’과 ‘돈으로 정리’라는 방식으로 그 투쟁을 마무리했다.
이 상태에서 우리가 부끄러워하거나 반성해야 할 점은 이 투쟁이 그런 상태가 될 수밖에 없도록 두었다는 점이다. 마무리의 파행성도 문제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왜 하이닉스 조합원들이 투쟁할 수 없게 되었는가를 생각하는 것이다. 조합원들이 더 이상 투쟁할 힘을 잃고 눈물로 정리하게 된 것은 처음부터 단위사업장 혹은 지역만의 투쟁으로는 어려운 이 투쟁을 전체 투쟁으로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금속노조는 불법파견에 대한 집단 진정을 하면서 승리의 사례를 만들겠다고 했으나 이 투쟁을 모두 개별의 것으로 만들어놓았다.
그런데 금속노조의 지도부들에게 이런 투쟁의 경과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현재 조합원들이 투쟁할 수 없다는 사실만을 앞에 놓고, 조합원들이 정리를 원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하이닉스 운동이 갖는 상징성도 고려하지 않은 채 단지 투쟁을 ‘정리’하는 것에 몰두했던 것이다. 그들은 지금 당장 싸우지 않는 상태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왜 이런 생각이 가능할까? 그것은 투쟁에 대한 인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투쟁’이란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자 도구이다. 문제를 ‘제기’하는 투쟁은 없다. 때로는 문제의 해결이 어렵다 하더라도 문제를 제기하고 그 문제제기에 온전하게 화답하는 것이 바로 투쟁이자 운동이라는 사실 자체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 운동의 발전이 바로 그러한 어려움을 뚫고 깨지면서도 전진해온 과정임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적당하게 타협해서 마무리하면 되는 것을 왜 원칙을 지키면서 투쟁을 만들어가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은 비정규투쟁에 대한 인식도 다르다. 협상의 기술과 미학만을 생각하는 자들은 왜 정권과 자본이 비정규직 투쟁을 그렇게 집요하게 인정하지 않고 끝까지 파괴하려고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에게 비정규직 문제는 그저 장기투쟁사업장 중 하나이고, 이것을 잘 ‘정리’하는 것이 자신의 과제라고 믿는다. 그렇게 해서 투쟁이 잘 정리되면 조합원들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요구수준을 낮춰서 타협하고, 자본과의 대응에서 조금씩 개선을 하면 되고, 투쟁하기보다는 대화와 타협을 하는 것이 문제 해결에 훨씬 용이하기 때문에 비정규직의 장기 투쟁은 이들에게는 때로는 어리석은 문제처럼 보이는 것이다. 어찌 보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바로 비정규직 문제 자체를 제기하면서 투쟁하는 것 자체가 무리한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비정규직 철폐인가, 차별철폐인가”라는 쟁점
그런데 이런 관점은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다. 캐리어 사내하청 투쟁을 생각해보자. 그 때 어떤 이들은 이렇게 평가했다. “비정규직의 요구가 너무 셌다. 정규직의 현재 상태를 고려하지 않은 높은 요구를 내걸었기 때문에 결국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연대를 하지 못하고 패배했다”고 말이다. 하지만 캐리어 사내하청 노동자들 투쟁의 패배의 원인은 요구가 너무 컸던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아주 사소한 요구조차도 받아들일 수 없는 당시 정권과 자본의 태도에 있었다.
87년 이후 노동자들은 투쟁을 통해서 임금과 노동조건에 대한 권리를 찾아왔다. 자본은 비정규직을 만드는 방식으로, 즉 이러한 권리로부터 배제된 노동자들을 만드는 방식으로 대응해왔다. 노동운동도 이러한 배제전략에 치열하게 맞서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그 노동자들이 투쟁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므로 비정규직을 확산하여 노동자들의 노동권을 무력화시키려는 자본의 입장에서는 비정규직 투쟁에 대해 쉽게 양보할 수 없었다. 그 하나하나의 투쟁은 바로 이후 확대될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자본과 노동이 어느 정도의 노동권을 부여할 수 있는가를 가름하는 문제였기 때문에 자본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양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조합 인정이나 임금인상과 같은 아주 사소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요구조차도 극심한 자본과 정권의 탄압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고, 해고되어 쫓겨나고 탄압에 놓인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정규직화’ 말고는 해결방법이 없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요구가 지나치게 높아서 문제가 된 것이 아니라, 어떤 요구인가와는 무관하게 구조적으로 투쟁이 억압당할 수밖에 없었고 그 과정에서 비정규직이라는 고용형태에 대한 문제제기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이러한 비정규직들의 투쟁 요구를 문제 삼으면서 ‘정규직화가 아닌 차별철폐’를 제기해왔던 것이다. 물론 현실에서는 차별을 철폐하는 것과 정규직화 요구 모두가 중요하다.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서로에 대해 알아가기도 하고 힘을 합하는 방법을 배우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사업장에서는 정규직화를 자신의 요구로 내걸고 싸워야 할 때도 있다. 이것은 대립되는 관점이 아니라 현실에서 무엇을 요구로 내걸고 싸워야 하는지에 대한 전술적 선택의 문제였다.
그런데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폄훼하면서 이러한 쟁점을 제기한 이면에는 ‘비정규직 존재의 인정’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비정규직 차별철폐’라는 쟁점을 마치 투쟁에서의 전술적인 과제로 제기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비정규직을 인정하고 그로 인해 생기는 문제를 해소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나가자는 제안이 숨어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주장에 대해서 ‘비정규직 철폐’로 답했던 이유는 현실의 투쟁에서 정규직화를 요구로 내세우자는 주장이 아니라, 비정규직 문제가 발생하는 근본 원인이 바로 자본의 분할 전략에 있으며 그런 신자유주의적 분할전략에 대한 투쟁이 중요하다는 점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비정규직 철폐, 정규직화’를 주장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마치 개별 사업장의 전술적 판단에 대한 평가인 것처럼 등장한 ‘차별철폐냐 정규직화냐’라는 쟁점은 실은 비정규운동의 전망과 방향에 대한 전제의 차이를 깔고 있었다. 그런데 비정규직이라는 형태가 워낙 극악한 초과착취의 형태였으므로 그 누구도 노골적으로 이러한 비정규직 형태를 인정하자고 말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마치 ‘당장의 투쟁 요구’와 ‘전술’에 대한 쟁점인 것처럼 왜곡하면서 나타난 것이다.
“노조인정인가, 비정규직 철폐인가”의 쟁점
이런 견해는 이후에도 계속 다른 방식과 내용으로 등장했다. 비정규운동이 진전하면서 비정규노동조합 건설이 대세로 굳어졌을 때 자본은 더 이상 비정규노동조합에 대한 강력한 탄압만으로는 대처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노동법 개악의 준비로 어느 정도 비정규직 양산의 골격이 갖춰진 후에는 비정규직에 대한 당근정책이 필요하다는 점도 인식하게 되었다. 그래서 비정규노조에 대해서 힘이 없을 때에는 여전히 계약을 해지하고 길거리로 몰아내지만, 비정규직 노조가 비정규직이라는 고용형태를 인정하는 테두리 안에 있을 때에는 노동조합을 인정하고 요구를 일부 수용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노조인정인가, 비정규철폐인가’의 쟁점이 등장했다. 즉 노동조합의 안정화 가능성이 생기면서 이제는 비정규직이라는 근본문제에 대해 투쟁하기보다는 노동조합 수준의 활동을 하면서 안정화를 구가하자는 입장이었다. 예를 들어 사내하청 노조도 원청에 맞서 투쟁하기보다는 하청업체들과의 교섭을 통해서 일단 노동조합을 안정화하는 데에 주력하자는 것이었다.
단위사업장에서는 노조안정화도 필요하다. 투쟁 과정에서 비정규노조의 역량을 가늠하면서 올해는 하청업체와의 교섭을 통해서 노조를 안정화하고, 비정규직이라는 고용형태에 맞서기 위한 투쟁의 힘을 축적할 수도 있다. 그리고 비정규직 문제에 맞서는 투쟁은 단위사업장의 문제로서가 아니라 전체 노동운동의 과제로 제기하고, 조직화를 통해서 중장기적 투쟁의 과제로 제출하여 준비를 해갈 수도 있다.
그러므로 ‘노조안정화’라는 주장이 현실에서 비정규직 단위사업장의 전술로 채택되거나 단계적인 투쟁의 한 과정이라고 한다면 문제가 없을 수 있다. 하지만 ‘노조안정화’라는 주장이 현재의 비정규운동에 대한 입장으로 제출된다면 그것은 문제가 되는 것이다. 특수고용 문제에 대해서도 ‘노동자성 인정’ 문제보다는 ‘단결권’ 인정 수준으로 받아들이자고 주장하기도 하고, 우리은행의 사례에서 나타나는 ‘무기근로계약’에 대해서도 일단 그것을 받아들이고 노동조합을 안정화하여 이후 임금과 노동조건을 차분히 개선해나가자고 한다.
그러나 비정규직이라는 고용형태를 인정하고, 그 속에서 노동조건을 높여나가는 것은 환상일 뿐이다. 비정규직화는 자본의 위계화와 분할통치전략, 그리고 노동자들에 대한 초과착취를 위한 도구이다. 그러하기에 설령 한 번의 투쟁 과정을 통해 임금과 노동조건을 개선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지속되지 않을 것이며, 노동권의 부재라는 상황을 업고 자본의 공격은 언젠가는 닥치게 된다.
우리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통해서 노동조건을 개선하는 데에 힘을 쓰지만 그곳에서 그치지 않으려고 한다. 노동자들의 삶과 고용을 파괴하는 신자유주의 전략에 맞서 주체를 형성하고, 공동투쟁의 가능성을 만드는데 주력하고자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비정규직 투쟁은 완성되지 않는 지속적인 운동의 과정이다.
단위사업장의 문제인가, 전체 운동의 과제인가
비정규직이라는 고용형태를 인정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마치 일반적인 노동조합 운동의 틀에서 해마다 임금인상투쟁이나 단협을 하는 일이 되풀이 되는 것처럼, 비정규직 투쟁도 단지 조직되어 투쟁을 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일을 반복할 것이라고 믿는다. 자본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고 지속적인 초과착취로 맞설 것임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비정규직 장기투쟁사업장 문제는 단지 ‘문제’일 뿐이라고 사고되는 것이다. 하지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투쟁은 문제의 해결이 아닌 지난한 ‘운동’의 과정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것은 단위사업장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노동운동 전체의 문제이며, 개별의 힘을 축적하면서 전체의 투쟁계획을 만들어나가야 하는 장구한 과정의 일부인 것이다.
하이닉스 투쟁은 바로 그 지점에 서 있었다. 그래서 하이닉스 투쟁을 비정규운동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그 투쟁이 전체 노동운동의 과제가 되어야 하며, 비정규직 노동기본권 쟁취라는 중요한 과제의 선봉에 선 투쟁이어야 함을 이야기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 투쟁에 연대하고 그 투쟁을 모두의 과제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투쟁을 확대하는데 실패하면서 하이닉스 투쟁은 고립되고 힘든 조건에 놓였다.
그런데 비정규직을 인정하고 노동조합을 안정화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보자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은 개별 단위사업장의 문제이지, 전체 운동의 문제가 아니게 된다. 비정규직 투쟁은 그 자체로 전체 노동자들의 문제이고, 단위사업장의 투쟁은 그것을 대표하는 의미를 갖게 되는데 그러한 성격이 인정되지 않는다. 하이닉스 투쟁은 어쩌다보니 장기투쟁이 되어버린 개별 사업장 문제였고, 그래서 해결을 하고 정리를 하면 아무 문제가 없게 되는 그런 사안으로 인식된다.
그런데 하이닉스 투쟁이 이렇게 정리되는 순간 비정규직 투쟁, 특히 간접고용 노동자들의 노동권 쟁취 투쟁은 그만큼 후퇴했고, 비정규직화를 통해서 이익을 획득하고자 하는 총자본은 그만큼의 승리를 획득한 셈이다. 비정규투쟁은 그 하나하나가 의미를 갖고 있다. 불법파견 정규직화라는 과제를 가진 투쟁, 원청의 사용자 책임을 묻는 투쟁, 특수고용 노동자들의 노동자성을 인정하도록 만드는 투쟁, 반복적으로 계약을 갱신한 노동자들이 ‘기간의 정함이 없는 근로로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을 확증하는 투쟁 등 개별의 투쟁은 모두 이 땅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가져야 할 기본권을 대표하여 발언하는 역할을 한다.
자본은 이 투쟁을 개별로 대응하지 않는다. 외형은 개별 자본의 대응인 것처럼 보이지만 정권과 더불어 총체적인 대응을 하고, 자본가들끼리 한 사업장도 쉽게 양보하지 못하게 만든다. 한 사업장의 문제가 미치는 파장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노동운동진영은 이런 비정규운동이 갖고 있는 의미들을 오히려 축소하고 개별사업장의 문제로 다루어버렸다. 비정규직 투쟁을 마치 일반적 단위사업장의 문제인 것처럼 만들었다. 그렇게 고립시키고 그렇게 패배시켰다. 단계적 의미에서의 ‘노동조합 안정화투쟁’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인 ‘노동조합 안정화투쟁’은 그렇게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패배로 만들었다.
물론 몇 개의 노동조합은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한 두해일 뿐이다. 그 노조는 재계약시기마다 다시 싸움을 해야 하고, 임금과 노동조건의 상승도 어느 수준에서 멈춰버리고 다시 생존을 위한 투쟁을 해야 하는 상황으로 계속 내몰릴 수밖에 없다. 노동권이 보장되지 않는 비정규직 노조의 안정화란 허구적이고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
비정규직 투쟁에 대한 입장을 제대로 세우자
지금까지는 비정규직이라는 고용형태가 갖는 비참함으로 인해서 노동운동 진영의 그 누구도 비정규직이라는 고용형태를 인정해야 한다고 말하지 못했다. 그러나 내심 그런 마음을 갖고 있던 이들은 ‘차별철폐를 하다보면 나중에는 정규직이랑 같아진다’거나 ‘일단 노조를 안정화하고 나서 비정규직이라는 고용형태를 바꾸기 위한 투쟁은 나중에 하자’는 등 현실과 거리가 먼 관념적인 논의를 유포해왔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은 ‘비정규직을 인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주장해왔다. 그러면서도 현실에서 어쩔 수 없이 투쟁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많은 이들의 피눈물나는 투쟁을 ‘너무 센 요구를 하는 투쟁’으로 폄훼하고, 장기투쟁이 되면 ‘정리’하는 데에 바빴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는 비정규직이라는 고용형태를 인정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노골적으로 들린다. 비정규직의 확산은 대세이므로 이제는 유연안정성에 대해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생기고 있다.
겉으로는 모두가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는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내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비정규운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 이제 분명해지고 있다. 그리고 비정규직을 일단 인정하고 임금과 노동조건 개선에 힘을 쏟자는 주장이 이제는 공공연하게 이야기된다.
이런 때에야 말로 그런 논리의 허구성을 밝히고, 우리가 왜 비정규운동을 해야 하는지를 제대로 이해하면서 대응해야 한다. 매 사안에서 나타나는 견해의 차이들이 실은 비정규운동에 대한 입장의 차이라는 것을 잘 밝히고, 투쟁의 방향과 전망을 제대로 세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