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5일 미국 플로리다 주 대법원은 주의 헌법에 의거하여
기존의 무상공교육제도를 대체하는 사립학교에 공공자금을
지원하는 것은 위헌이라며, 바우처 제도에 대해 최종적으로
위헌판결을 내렸다. 플로리다 주는 주지사 제브 부시가
강한 의지를 갖고 미국에서 유일하게 주 의회가 바우처
제도에 대한 법제화를 통해 주 전체에 영향력을 미치도록
조치를 취해놓은 곳이다. 이로써 플로리다 주 뿐만 아니라
미국 내 다른 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학교선택제 논쟁에
큰 반향을 일으킬 것으로 전망된다. 그리고 최근 국내에서도
바우처 제도를 비롯하여 학교선택권을 확대하려는 일련의
시도들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이번 판결이 주는 의미는
남다르다 할 것이다.
미국의
구조적인 교육불평등
가.
교육재정의 불평등 미국에서는 일정한 지역을 기초로
지역교육구(School District)를 설치하고 이 교육구가 구내의
공립학교의 운영을 관장한다. 지역주민들은 특별히 사립학교에
다니지 않는 한 자신의 교육구 내에 있는 공립학교에 자동으로
배정이 되며, 학비는 무료다. 교육재정은 지역교육구, 주,
연방정부에서 지원하는 세금으로 조성된다. 이 가운데 지역교육구와
주가 90% 가까이 부담하며, 연방정부는 10% 가량만을 지원한다.
특히 지역교육구는 교육재정을 해당 지역주민이 부담하는
직접세(특히 재산세)로 조성하기 때문에, 지역주민의 구성에
따라 지역간 교육재정의 격차가 극심하게 나타난다. 미국은
대체로 경제력이 높은 중상류층은 도심 주변에 발달한 교외(suburb)에
모여 사는 반면, 흑인이나 히스패닉계가 주축을 이루는
저소득 빈민층들은 주로 도심의 집값이 싼 지역에 모여
산다. 이처럼 미국에서는 사회계층이나 인종에 따라 주거지의
구분이 명확하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이나 비백인이 모여
사는 지역의 교육재정은 백인 중산층 이상이 모여 사는
곳의 그것과 현격한 격차를 보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교육재정의
격차는 응당 학교간 격차를 초래하여 교육자원, 교육시설
및 여건, 교사임금 등에 있어서 차이를 낳고 이것이 결국
지역간 학력격차를 낳고 있다. 즉 교외의 공립학교는 넉넉한
학교재정, 좋은 학교시설과 풍부한 교육자원, 높은 교사임금
등의 특징을 지니고 있는 반면, 도심 빈민지역의 공립학교는
부족한 학교재정, 무직이나 알콜중독 학부모, 낮은 교사임금과
상당수의 무자격 교사, 불안전한 주변환경 등으로 인해
이 지역에 거주하는 가난한 흑인,히스패닉계 아이들은 사회적
이동의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으며, 학업성취도 또한 낮을
수밖에 없다.
나.
사립학교의 상대적 우위 현재 미국의 초중등학교
가운데 약 20% 정도가 사립학교이며, 전체 학생의 10% 정도가
사립학교에 재학하고 있다. 이러한 수치는 한국과 비교했을
때 그리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설립초기부터
상류층을 위한 교육이나 종교교육을 담당해오면서 미국교육의
중요한 축을 이루고 있다. 미국의 사립학교는 재정적으로
완전히 독립해 있기 때문에 학생들이 부담하는 수업료의
비중이 높고 기타 기부금과 후원금으로 운영이 되고 있다.
그래서 만약 교육구 내에 있는 무상 공립학교를 포기하고
사립학교에 자신의 자녀를 보내려 한다면, 지역 교육세도
내고 비싼 사립학교 등록금도 내야 하는 이중의 부담을
지게 된다. 따라서 아무나 자신의 자녀를 사립학교에 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이들 명문사립학교들은 높은 수준의 교육과정을 운영하고
있으며, 대학수준의 수업(AP제도)을 개설하여 명문대학으로
직통하는 코스로 인식된다. 실제로 중산층 이상의 가정배경을
지닌 아이들이 이들 명문사립학교를 독점하면서 계층간의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다.
교육격차를
선택권 확대로 해소
하지만
미국은 이렇게 뿌리 깊게 존재하는 불평등 구조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보다는 ‘도심지 공립학교의 실패’라는
현상을 해소하고자 경제적 접근방식을 택했다. 즉 ‘실패한’
공립학교에 강제로 다녀야 하는 교육소비자들에게 사립학교나
다른 지역의 공립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선택권’을 주어
학교간 경쟁을 유발하면 자연스레 교육의 질이 높아지리라
본 것이다. 학교 선택권을 보장하기 위해선 비교적 단일한
공립학교 체제에서 벗어나 다양한 형태의 학교제도를 도입해야
하고, 이들 학교에 쉽게 다닐 수 있도록 행?재정적으로
지원을 해야 한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협약학교(charter
schools), 특성화학교(magnet schools)이며, 사립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재정적으로 지원해주는 바우처 제도(school
voucher)가 등장했다. 하지만 공립학교의 규제완화와 선택권의
보장은 결국 선별(tracking)의 심화로 이어져 계층간 인종간
불평등을 더욱 확대시키기 십상이다.
가.
특성화학교 특성화학교는 ‘특별한’ 교육과정을
운영함으로써 교육구내의 학생들에게 다양한 선택을 보장하자는
취지로 설립된 공립학교제도이다. 즉 특별한 교육수요에
부응함으로써 사립학교나 다른 교육구로 빠져나가는 학생들의
욕구를 충족시키자는 것. 실제로 특성화학교는 도심지에
위치해 있는데, 특성화학교로 인해 그나마 우수한 학생들이
빠져나가고 이렇게 남은 공립학교는 더욱 열악해질 수밖에
없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나.
협약학교 협약학교도 특성화학교와 마찬가지로 학력향상에
실패했다고 여겨지는 도심 공립학교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된
것으로써, 공립학교에 대한 불만을 등에 업고 급속하게
성장했다. 학부모, 교사, 지역인사 등이 특정한 교육목표를
달성하겠다는 협약(charter)을―학력향상에 관한 약속은
반드시 포함된다―주정부와 맺고 어느 정도 재정지원을
받는다. 하지만 교사자격, 교육과정, 학교운영 등에 있어서
상당한 자율권을 누리고 있다.
이렇게
선택과 경쟁에 기반한 협약학교 또한 기존의 도심 공립학교를
더욱 악화시킨다는 비판도 있다. 즉 실제로 선택권을 향유하는
계층은 도심지역에 사는 일부 백인중산층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또한 협약학교의 빠른 성장은 학교운영에 있어서
영리재단의 등장을 촉진시켰다. 즉 에디슨 회사와 같은
영리단체가 주나 교육구와 계약을 맺고 공립학교를 위탁운영한다.
이들은 결국엔 비용을 최소화하는 효율성과 오로지 소비자의
욕구에 의해 학교를 운영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교육적
목적을 추구하는 데 문제가 있을 것이라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바우처
제도와 이를 둘러싼 논쟁
가.
바우처 제도 현황 바우처 제도 또한 실패한 도심
공립학교에 대한 대안으로써 사립학교에 다니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재정적으로 보조를 해주는 것을 말한다. 더
나아가 소비자의 선택에 따라 학교간 경쟁을 유도하여 소비자의
선택을 받지 못하는 학교는 자연스레 도태되도록 하겠다는
취지라 할 수 있다. 학생은 주정부로부터 상품권(voucher)을
받아 사립학교에 등록금으로 납부하고, 사립학교는 정부에
이 바우처를 지불하고 재정을 받는 방식이다. 물론 정부로부터
바우처를 지원받기 위해서는 가계소득이 일정한 기준 이하여야만
한다.
바우처
제도를 처음으로 실시한 곳은 위스컨신 주의 밀워키 시인데,
밀워키는 1990년에 바우처 제도를 최초로 도입하여 처음엔
7개교의 337명의 학생들에게 바우처를 제공했고, 1998년에는
종교계 학교들도 참여하게 됨에 따라 급속도로 팽창했다.
2004~5학년도 말에는 115개 학교에 15,000명(15%)에 이르는
학생들이 참여하게 되었다. 바우처 제도가 시작된 이래
사립학교들은 거의 5억 달러의 돈을 지원받았다. 아리조나
주는 2003~4학년도에 19,000명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교육세를
공제해주었다. 플로리다 주는 지난 1999년 주 의회가 주
전체에 영향력을 미치는 법으로 제정함으로써 바우처 제도를
도입했다. 그밖에 오하이오 주의 클리블랜드와 펜실베이니아
주, 유타 주, 워싱턴 D.C에서 소규모로 바우처 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나.
바우처를 둘러싼 논쟁 그동안 바우처 제도는 미국
헌법이 명시하고 있는 정/교 분리원칙에 어긋난다는 논란이
있었다. 왜냐하면 바우처 제도에 참여하고 있는 절대 다수의
학교가 종교계 학교들이며, 이로 인해 공공자금으로 종교계
교육을 지원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 것이다. 따라서
특정 종교를 교육하는 학교에 정부의 공공재정이 지원되는
것은 정/교 분리를 명시하고 있는 미국 헌법에 위배된다는
내용의 소송이 제기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난 2002년
미 연방대법원이 오하이오 주의 바우처 제도에 대해 합헌판결을
내린 바 있다. 당시 대법원은 정부의 자금은 종교계 학교가
아니라 부모에게 지급되었다는 점, 그리고 종교계 학교를
선택한 것은 학부모였다는 점을 들어 바우처 제도가 정/교
분리 원칙을 어기지 않고 있다고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당시 연방대법원의 판결이 바우처의 지원대상을 저소득층으로만
제한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았기 때문에 바우처
도입 운동은 저소득층을 주요 대상으로 삼으면서 정치적
정당성을 얻고자 했다. 그러나 실제로 대법원의 합헌판결에도
불구하고 많은 주들이 바우처 제도를 전격적으로 도입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연방대법원이 합헌판결을 내렸지만, 작년에는
각 주가 비종교계 학교뿐만 아니라 종교계 학교에도 재정지원을
해야 할 의무가 없음을 명시한 바 있다. 이러한 조치들로
인해 각 주가 바우처 제도가 합법적인지 여부와 바우처
제도에 대한 정책적 판단(즉 바우처 제도가 공립학교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한 여부)을 내려야만 했다. 실제로
각 주에선 정책적 논쟁이 바우처 제도의 도입에 있어서
중요한 장애물이 되었다. 이를테면 지원액수, 학력향상에
대한 책임, 공립학교 부실화 등의 논쟁이 첨예하게 대립되면서,
바우처 제도의 도입이 지지부진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바우처 제도가 공립학교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대다수 빈민 아동들에게는 오히려 불이익이 된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바우처 제도를 통해 지원받는
돈은 사립학교 등록금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며, 이를
감당할 능력이 없으면 어쩔 수 없이 공립학교에 남아야
하기 때문이다. 교육재정은 교육구에 등록된 학생수를 기준으로
책정되기 때문에, 일부 학생들이 재정지원을 받아 사립학교로
빠져나가면 기존의 공립학교 예산은 감축될 수밖에 없으며,
이는 남아 있는 학생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셈이다. 게다가
원하는 사립학교로 모두가 입학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즉 사립학교의 학생선발은 학교의 자유이기 때문에 이를테면
교외의 좋은 사립학교들은 빈민층 아이들을 달갑게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
바우처를
지원받는 사립학교의 책임성도 문제가 되고 있다. 이들
학교는 학력평가 결과를 공개할 의무도 없거니와, 학생들의
정학률이나 중도 탈락률, 인종분류에 관한 정보를 공개할
의무가 없다. 밀워키의 경우 바우처 제도에 수억 달러의
돈이 투여되었지만 학생들의 학업성취도에 관한 어떤 자료도
알려진 게 없다. 심지어 교사자격에 관한 규제도 받지 않기
때문에 애초 바우처 제도의 도입 취지였던 ‘학력향상’
책임을 다 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플로리다
주 대법원의 위헌판결의 내용과 의미
판결은
꽤나 명쾌하다. 플로리다 주 헌법 제9조 1항은 주가
보장해야할 교육의 의무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주는
주내에 거주하는 모든 아동들에게 적절하게 교육을 제공해야
하는 최고의 의무를 지닌다. 적절한 제공은 단일하고, 효율적이며,
안전하고, 안정된, 양질의 무상공립학교에 관한 법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1999년도부터
주 전체에 시행되고 있는 ‘기회 장학금제도’ Opportunity
Scholarship Program 는 실패한 학교로 판명 난 공립학교에
다니고 있는 학생들에게 사립학교로 옮길 수 있도록 장학금을
지원해주고 있으며, 현재 733명의 학생들에게 세금으로
조성된 공공재정을 지원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헌법에
따라 주가 아동들을 교육시켜야 하는 유일한 수단인 무상공립학교와
경쟁관계에 있는 별도의 사립학교에 공공재원이 흘러들어가는
셈이다. 이로 인해 공립학교에 지원되어야 할 재정이 감소될
뿐만 아니라, 공립학교 혹은 다른 사립학교와 비교했을
때 결코 ‘단일하지 않은’ 사립학교에 돈이 지원되고 있다는
것이다. 바우처를 지원받는 사립학교들은 학업성취도평가
결과의 공개나 자격있는 교사의 채용, 교육과정 편성운영
등과 같이 공립학교에 적용되는 숱한 법적 기준을 적용받지
않기 때문에 ‘단일’할 수가 없다. 따라서 대법원은 바우처
제도가 단일한 무상공교육제도를 통해 모든 아동들을 교육시켜야
한다는 헌법의 규정을 위반하고 있다고 판단을 내린 것이다.
지난 항소심에서는 바우처 제도가 헌법에 규정된 정/교
분리원칙을 위반하고 있다고 판결했었는데, 이번에 대법원은
그 쟁점에 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았다.
이번
판결은 주 대법원이 주로 하여금 공립학교에서 학생들을
교육시켜야 할 의무가 있음을 명시한 최초의 판결이다.
헌터대학의 조셉 비터리티 교수는 많은 주들의 헌법이 공교육은
‘단일할’ 것을 요구하는 플로리다의 조항과 유사하기
때문에 이번 판결은 매우 중요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미국교사연맹
American Federation of Teachers 부의장인 토니 코티지는
이번 판결이 “대법원이 공공자금은 공립학교에 사용되어야
함을 인정했다는 것이 명백하다. 이번 판결은 플로리다에서
바우처의 파멸을 재촉하는 것임이 틀림없다.”며 매우 달가워했다.
물론 주지사 제브 부시는 “독점을 보호하는 정부로부터는
아무런 이득을 볼 수 없다.”며, 이번 판결에 대해 개헌을
포함하여 모든 법적 수단을 강구하겠다고 했지만 이번 판결은
학교선택권 논쟁을 벌이고 있는 다른 주에까지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한편
공교롭게도 플로리다 주 주지사인 제브 부시는 현 조지
부시 대통령의 동생이다. 그가 취임한 이후 보수적 정책을
추진해오면서 민주당의 텃밭이었던 플로리다에서 공화당이
상하원을 모두 장악했다. 주 의회가 주지사의 뜻을 받들어
바우처 제도를 법제화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던 셈이다.
대법원은 제브 부시가 중요한 업적 중의 하나로 여겼던
바우처 제도를 이번 학년이 끝나는 대로 중단할 것을 명령했기
때문에 그 타격은 남다를 것으로 보인다.
공립학교에
다닐 때조차 돈을 내야하고, 거기다 사교육비까지 추가로
내야하는 우리로서는 헌법적 수준에서 양질의 무상공교육의
의무를 보장하고 있는 플로리다가 너무나 부러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미국에서 탄생한 제도가 미국에서 퇴짜를
맞았다는 사실을 교육관료들은 아는지 모르는지 바우처
제도를 포함한 학교선택제를 더욱 확대하려고 하고 있다.
무상으로 양질의 교육을 받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 권리이자
국가의 중요한 의무라는 개념조차 척박한 이 땅에서 학교선택권이
난무하게 된다면 그 피해는 선택할 능력도 없고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이 고스란히 지게 된다. 무조건 미국식 교육제도를
도입하기에 급급한 정부관료, 그리고 국민들에게 이번 플로리다
판결의 내용과 의미를 널리 알리고, 이를 통해 학교선택권
논란에 종지부를 찍고 보다 튼실하고 확대된 공교육체제를
만들어 가는 방향으로 논의가 모아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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