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전임간부의 하루
세상만사
어느 전임간부의 하루
이영민/ 철도 노동자
<어떤 스님>
어제 일요일인데도 쉬지 못했더니 아침나절이 상쾌하지 않다. 전철역까지 걸어가는데 몸도 발걸음도 무겁다. 걸어가며 담배 한 대를 피운다. 건널목을 두 개 건넌다. 건널목에서 잠자리에서 읽었던 어떤 스님의 일대기를 생각한다. 그 사람은 일자무식이었다. 부모가 일찍 죽어 머슴살이를 하다 스님이 되었다. 절에 가 행자가 되었는데 삼년 동안이나 나무를 하거나 농사를 지었다. 대성한 뒤에도 끝내 글을 익히지 못하고 온갖 노동으로 도를 닦았다. 노동이 선이고 선이 노동이었다는 것이다. 평생 노동으로 도를 닦았다니까 사이비는 아니었을 것이다.
<일지>
출근하면 우선 컴퓨터를 켠다. 메일을 살펴보고 카페 세 군데를 뒤진다. 조합 홈페이지로 들어가서 어떤 놈이 또 욕을 써놓았는지 훑어본다. 요즘도 최소한 한명 이상은 우리를 욕하고 있다. “왜 집행부 구성하는데 협조 안하냐?” “노동조합 장악에 혈안이 된 정파주의자, 물러가라.” 늘 이런 식이다. 실명으로 욕을 하는 놈들도 있다. 나도 여러 번 입질에 오르내렸다. 그놈들 욕한 대로 되었으면 위원장이 되어도 열 번은 되었겠지. 구정물통 같은 홈페이지 게시판은 정말 싫다. 그래도 안볼 수는 없다. 구정물 속에도 흐름이 있기 때문이다.
일지를 펴놓는다. 그제가 어제 같고 어제가 오늘 같은 컴퓨터 일지, 할 일은 산더미인데 늘 뒤로 밀린다. 파일을 복사해서 날짜를 바꾸고 할 일을 가늠해 본다. 꼭 해야 할 일, 미뤄도 되는 일, 전화 한통으로 끝낼 일을 나누어 본다.
일지 따위는 정말 싫다. 쪼잔하게 신경쓰지 않고 굵게 굵게 처리하며 가고 싶다. 하지만 써야 한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담배를 많이 피워서 그런 것인가 기억력이 아주 다 되었다. 일지를 쓰지 않으면 일정이고 약속이고 깡그리 까먹는다. 당장 원망이 쌓일 것이다. 원망이 쌓이다가 뭔가 큰 실수를 할 것이다. 아마 한 달 안에 퇴출될 것 같다. 그래서 죽자하고 일지를 쓴다.
<어르고 뺨치기>
며칠동안 KBS 사람들하고 현장을 돌아다녔다. 비정규직 차별실태를 찍는다 한다. 이게 웬 떡인가 싶어 투기를 했다. 방송은 여전히 매력이 있다. 멍청한 관리자들, 쥐도 새도 모르더니 이제야 반응이 온다. 지역본부 부장이 한사람, 인터뷰를 했던 현장 관리자가 또 한 사람,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몇 명이 찍었냐, 나는 모른다.” “어디서 찍었냐, 말해줄 수 없다”. “왜 찍었냐, 비정규직 차별하지 말라고 찍었다.” 꼬치꼬치 캐묻는다. 웃기는 소리, 방송을 봐라. 당신같으면 대답을 해주겠냐고 점잖게 대꾸한다. 그게 뭐 비밀이냐, 웃사람에게 보고해야 하니 알려주면 안 되냐고 사정도 한다. 당신들이 구조조정할 때 노조 허락받고 했냐? 당신들이 그렇게 하면 나도 친절하게 알려 주겠다. 전화를 탁 끊는다. 한심한 놈들. 속으로 이를 갈겠지. 나중에 두고 보자, 벼를 것 같다.
아무래도 인터뷰한 사람들이 걱정스럽다. 몇몇은 뒷모습만 찍었지만 자의반 타의반으로 얼굴 내놓은 사람도 있다. 우리가 시켜서 한 것이다. 모자이크 하면 안되냐고 울상인 것을 괜찮을 것이라고 달랬다. 예방주사를 놓아야지. 방송나가면 본사에서 난리를 칠 것이다. 지역본부를 거쳐 현장까지 내려올 것이다. 내려올수록 강도가 세질 것이다. 감사관이 뜨고 모조리 호출당하고.... 울고 불고 원망을 할 것이다. 우는 데는 아주 질색이다.
소장에게 전화를 한다. 그거 다 내가 시킨 거다. 그러니 할 말 있으면 내게다 해라. 그 사람들 괴롭히면 재미없다. 어르고 뺨치니 걱정 말라고 한다. 잘 부탁한다는 흰소리도 한다. 그래도 걱정이 된다. 그래서 세 사람에게 차례로 전화를 걸어 달래 놓았다. 소장이 괴롭히면 즉시 신고하라고 부탁했다.
<요구안>
비정규직 요구안을 내일 모레까지 넘겨야 한다. 노사협의회가 곧 열리는데 요구안이 있으면 달라고 한다. 철도에는 비정규직 모임이 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함께하는 모임이다. 거기서 함께 안을 짜기로 했다. 회의를 열어 검토한 뒤 조합에 넘기기로 했다. 그런데 시간이 총알같이 흘러갔다. 회의 한 번도 하지 못하고 마감 날이 다가왔다. 부랴부랴 사람을 끌어 모은다. 회의를 한다. 자료를 검토한다. 안을 짠다. 공문을 작성한다. 그런데 웃기는 일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그런 일이 있는지도 모르고 있지 않나. 노사협의회를 하면 되기는 되나? 모르긴 몰라도 될 일이 하나도 없다. 정규직, 비정규직이 일주일간 함께 총파업이라도 하면 모를까.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관철을 목표로 하지 말자. 쟁점으로 만들고 알리는 것으로 만족하자. 그렇게 합의했다. “비정규직 노동자 여러분, 당신들이 직접 나서지 않으면 안됩니다. 싸움없이 되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렇게 선전하기로 했다. 참 공자님 말씀이다. 그런 식으로 해서 비정규직이 팍팍 조직된다면 안될 일이 뭐가 있나.
하여간 공문에 이렇게 썼다. “이 안은 모두 단체협약에서 다룰 안이다. 하지만 쟁점을 만들기 위해 제출한다. 적당한 절충은 하지 말아 달라. 차별철폐를 하려면 원안을 끝까지 고집해야 한다.”고 단서를 붙여 놓았다. 보는 사람들이 잘 이해를 해줬으면 좋겠다. “이게 도대체 뭐하자는 거야, 우리더러 그냥 트집만 잡다 오라는 거냐?” 이런 반응이 아니었으면 한다.
<그밖에 오늘 한 일>
대회에서 쓸 결의문을 쓰라고 해서 한 장 썼다.
사업보고 중 총괄계획을 손봐 달라고 해서
그렇게 했다. 대의원대회 최종 점검회의가
있었다. 나보고는 외부 사람들 접대를
하라고 한다. 접대라고 해봐야 차 한잔씩 주고,
활동보고서 한권씩 주고 배웅만 하면 될 것이다. 점심때는
보기 싫은 사람이 왔길래 잠시 피해 있었다. 이렇게 낯을
가리면서 만 명 가까운 조직의 상근 간부를 한다는 게
우습다. 내일 집회를 알리는 문자를 때려 달라고 후배에게
부탁했다. 운수노동자 학교를 알리는 포스터를 들고 왔길래 부지런히 조직하겠다고 했다. 사무실에서 함께 사는 개 두 마리하고 십분쯤 놀면서 머리를 쉬었다. 저녁때는 선배가 술에 취해 사무실에서 기다린다 하여 헌책방에도 다녀왔다. 술에 취한 사람 이야기를 들어 주는 것은 정말 고역이다. 결국 두 번째 사람을 피한 셈이다. 여자 화장실이 막혔다고 여성간부가 울상이길래 자전거를 타고 철물점에 갔다. 고무로 된 빨판하고 전문가들이 쓴다는 “뚫어!”라는 이름의 기구를 사다 삼십분간 화장실에서 씨름했다. 대충 뚫어 놓았는데 아직도 시원찮은 것 같다. 내일 아침 다시 손을 봐야 할 듯. 내일 오후에 연대집회를 할지 현장 간부와 의논하고 포기했다. 아직 조합원들 분위기가 뜨지 않는다고 한다. 지난주에는 비정규직 집회 뒤에 그럭저럭 연대집회를 했는데 간부들 자신감이 붙지 않은 것 같다. 정규직이 비정규직 연대투쟁을 해도 시원찮은데 한심한 일이다. 벌써 비정규직 집회 참가자들이 두 번이나 정규직 집회를 떠받쳤다.
책꽂이에 너절하게 꽃아 두었던 서류, 문서들을 책상위에 올려놓고 정리를 마쳤다. 어느새 저녁 여덟시. 연구소 원고를 쓸까 하다가 머릿속이 휑하니 비는 느낌이라 그냥 퇴근한다. 전철 안에서 방송국 구성작가에게서 전화가 왔다. “임금표가 정확하지 않은데 정확한 것을 보내 줄 수 없느냐?”고 한다. 가장 자신없고 싫어하는 일이 마지막에 걸렸다. 통계, 계산, 이런 일은 아주 젬병이다. 하는 수없이 후배에게 전화를 걸어 부탁했다. 전화가 없는 걸 보니 적당히 처리한 것 같다. 집에 와서 한참 원고를 쓰고 있다.
둘째날, 마지막 승부
<농성>
서울역 농성에 들어갔다. 새마을호 여승무원 정규직화를 요구하는 농성이다. 이제는 정말 끝장내고 싶다. 작년 11월부터 시작한 싸움이니 벌써 6개월째다. 속전속결을 위주로 하던 내게는 참으로 긴 시간이었다. 그래도 길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싸움방식이 주로 발로 뛰어 품을 팔아야 했고 그동안 온갖 사건이 꼬리를 물었기 때문이다. 2000년 직선제 투쟁 때 말고는 가장 열과 성을 다해 뭔가 하고자 하였던 투쟁이었다. 나만 그랬던가. 그렇지 않았다. 특별채용 시험으로 전체가 흔들리는 속에서도 끝까지 굴하지 않고 홀로 세 달을 버틴 여승무원 동지가 있었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차례씩 밤샘작업을 하면서 불평하지 않고 늘 선두에 섰던 지방본부 간부들과 본부장들의 태도는 늘 변함없었다. 나는 이 투쟁을 진행하면서 정규직 조합원들이 꼭 옳다고 하여 전폭적으로 지지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정규직도 구조조정 아래 당하고 있는데 여승무원 꽁무니만 쫓아 다니냐는 오해도 많이 받았다. 어떤 때는 터벅터벅 외롭게 몇몇이 걸어가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을 되씹었다.
공동대책위에 결합한 동지들에게는 진한 동지애와 고마움을 느낀다. “공대위는 늘 몸만 대주냐?”는 불평도 있었지만 늘 몸만 대주는 일에 빠지지 않았다. 나는 진정한 연대는 몸을 대주는 일에서 비롯한다고 믿고 있다. 다만 우리가 운동에서 지켜야할 최소한의 원칙이나 약속을 버리지 않으려 노력할 때 공대위 동지들 언제나 몸을 대주러 우리에게 달려왔다.
특히 여러 차례 있었던 새벽작업에 우리보다 더 정확하게 시간 맞춰 와주었던 학생동지들에게 감사한다. 그들은 아마 나중에 대중운동의 간부로 훌륭하게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불과 이십 여명에 불과한 여승무원들이었지만 대중운동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사건들은 모두 등장하였다. 단결의 기쁨도 있었지만 갈등, 대립, 반목이 있었고 절망 끝에 좌절하는 동지들도 나타났다. 그런데 어떻게 교착의 세 달을 견딜 수 있었을까? 다시는 이 투쟁을 하지 않겠다고 떠났던 동지들이 하나 둘 돌아오고 그래서 철야농성을 시작할 수 있을 정도로 힘을 비축할 수 있었을까?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나는 그것을 지방본부 간부들이 가졌던 “사람에 대한 여유” 때문일 것으로 생각한다. 좌절할 때는 기다려주고, 힘들 때는 쉬라고 하며 기다릴 줄 알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늘 암탉이 알을 품듯 조심스러운 마음이었다.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애처로운 생각이 들어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한번은 크게 당할 것이다. 훌쩍 성장해서 “그런 식으로 우리를 보지 마라.”는 항의를 받을 것이다. 그런 날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
늘 함께 연대투쟁을 해온 철도매점동지들하고 같이하는 농성이다. 철도매점 동지들은 벌써 석 달째 파업투쟁을 벌이고 있다. 다행히 노동조합 방침이 바뀌어 철도매점 투쟁을 받치고 있다. 두 개의 투쟁이 완강하게 장기간 끌어왔으므로 태도변화를 이끌어 내었을 것이다. 둘 다 승리로 끝내고 한 기간을 매듭짓는 때를 맞이하고 싶다. 지는 일은 생각하기 싫다. 패배로 점철된 투쟁경험이지만 또 패하기는 싫다. 비정규직과 정규직이 연대하여 투쟁하고 끝내 이긴 경험을 하나 만들고 싶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정규직 간부 몇몇쯤 해고되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내가 거기에 한다리 끼어들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활동의 자취>
한번도 신변에 관한 글을 쓴 일이 없는데 그렇게 되었다. 이런 저런 주장은 늘 하는 일이다. 글로 하기도 하고 말로 하기도 한다. 골목대장 스타일이라 (연구소에서 친한 사람이 붙여준 별명) 마음에 맞으면 주장도 세고 앞장도 잘 선다. 그런데 이제는 이런 저런 흔적을 남긴다는 게 두렵다. 활동에 꼭 필요한 문서나 실무적인 글은 쓰되 발표용 글은 사양한지 오래되었다. 무언가 자취를 남기는 게 싫고 부질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연구소에서 꼭 써야 한다고 부탁하니 당분간은 써야 할 것 같다. 미리 작정한 것은 없고 그때 그때 닥치는대로 짬을 내어 쓰겠다고 마음먹고 있다. 그러다 이제 되었다 하면 한시름 놓을 수 있겠다.
그 어떤 활동이든 농사짓는 일과 같다고 생각한다. 거두는 일은 잠깐이지만 지루하고 힘겨운 일상의 연속이라고 생각한다. 밭을 갈지 않고 김도 매지 않으면서 거두려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탄한다. 농사는 이렇게 짓는 것이라고 소리 높여 다투는 사람들은 더 많은 것 같다.
힘 닿는 데까지 농사꾼의 마음으로 활동을 하고 싶다. 그러다 진짜 게으르게 되고 농사일이 싫어지면 툭툭 털고 일어서려 한다. 노동조합을 하지 않게 되면 나는 진짜 노동자가 된다. 좋은 일이 아니랴?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고, 할 만큼 하다가 싫어지면 진짜 노동자가 된다는 일이. 의무감이나 마지못해 하는 활동은 사양하고 싶다. 기쁨을 느낄 때까지만 하고, 싫어지면 당장 때려 치우련다. 그리고 방랑에 나서련다. 삼류 서부영화 막판에 떠나는 장고처럼. 사막 한가운데로 쓸쓸하게, 말 대신 기차를 타고 칙칙폭폭 철커덕 철커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