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눈으로 세상을 보자!
권김현영/ 홍익대 강사, 언니네트워크 운영위원
I. 전쟁과 평화에 대한 여성주의적 사유
평화를 위한 전쟁이라는 역설
전쟁과 안보에 대한 이야기는 모순적이고 비일관적입니다. 북한이 망했다는 이야기와 북한이 위협적이라는 이야기를 함께 하는 것처럼 말이죠. 전쟁을 억지하기 위해 가장 강해져야 한다는 논리도 마찬가지이죠. 이러한 군비경쟁에는 끝이 없어요. 그리고 우리가 세계 제 1의 군사대국이 될 수 있는 길은 없으며, 세계 제 1의 인구대국이 되는 길 역시 없다는 것 역시 모두 알고 있지요. 하지만 아이들이 성적이 오르지 않아도 학원에 다니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부모들처럼 이 끝없는 경쟁과 불안의 레일에서 내리는 용기는 쉽게 생기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용기가 생기지 않는 이유는 비겁해서가 아니라, 그 용기가 불러올 세상에 대한 이미지가 구체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전쟁 대 평화라는 이분법의 추상화 과정이 한 몫을 하고 있습니다. 전쟁에 대한 이미지는 국가별 힘의 균형과 국제정치학, 국경분쟁과 인종갈등, 그리고 폭력과 피와 흩어져 있는 살점, 무기들과 비극적인 오열 등 지극히 구체적이고 참혹한 현실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에 비해 평화는 비현실적인 이상론이나 유토피아, 깨끗하고 투명한 것, 자연적인 것으로 이해되지요. 가장 비극적인 장면들 전에는 항상 다정하고 평화로운 가족들의 저녁식사, 아이들의 웃음소리,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는 초록빛 공원 같은 장면들이 등장합니다. 사실 이런 장면들은 그 다음의 비극적이고 폭력적인 장면들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올리버스톤의 최신작 <월드트레이드센터, 2006>(이하 월탯)는 반테러주의와 휴머니즘 영화라고 포장하고 있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영웅으로 나오는 해군이 이라크로 떠났다는 이야기가 시사해주듯 사실인 평화를 위해 전쟁이 필요하다고 보는 전쟁옹호영화이자 보수적인 가족주의 영화입니다. <월탯>에 등장하는 두 명의 남성 소방수들이 그토록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살려고 하는 이유는 가족 - 여성과 아이들이 있는 곳 - 에게 돌아가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은 아내들과 아이들과 충분히 좋은 시간을 보내지 못했었고, 그래서 어느 가정에나 있는 ‘위기’가 가족 안에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존재의 의미를 가족에게 전면적으로 의존하는 순간, 아이들은 엄마를 배신하고, 아내들은 휠씬 관대해집니다.
혹자는 <플래툰>, <7월 4일생> 등을 만든 반전영화로 유명한 그가, 9·11 테러 이후 완전히 바뀌었다며 놀라워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전의 그의 영화 역시 전쟁과 평화의 이분법에 의존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 별로 놀랍지는 않았습니다. 이전의 영화들에서 주인공이 인간성의 의미를 찾게 되는 계기는 여성과 아이, 노인과 같은 약자의 희생, 그리고 아군의 죽음 때문입니다. 그의 영화에서는 언제나 민간인/병사, 여성/남성의 구분은 전쟁/평화처럼 서로 공존할 수 없는 대립쌍으로 그려집니다.
추상적인 전쟁담론과 구체적인 평화현실
하지만 전쟁과 평화의 이분법으로 개념화된 “평화”라는 말은, 세계 평화와 인류의 공존이라는 말은 그럴 듯 해보이지만 거대한 동일성의 범주로 우리 모두를 가두는 개념으로 사용됩니다. 타자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는 없습니다. 인종과 성별, 계급과 국적의 차이들이 만들어내는 의미는 사실 정치적이고 수사적이라는 점에서 지시체와의 관계가 깨져버린 비의들입니다. 나는 유색의 비혼 여성이다. 라는 식으로 나를 설명하는 것은 유색의 비혼 여성에 대한 의미를 만들어낸 시선들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설명일 뿐, 다른 유색의 비혼 여성들과의 관계에 대한 정의는 아닌 것 처럼요.
전쟁을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한, 평화가 비현실적이고 추상적이라는 가정은 깨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말 전쟁은 그렇게 불가피하거나 어쩔 수 없는 현상일까요? 오우삼 감독의 영화 <페이첵, 2003>에서는 미래를 예언하는 기계가 등장합니다. 멸망할 지구의 미래를 본 사람들은 절망에 휩싸여서 정말 인류를 파멸로 이끌어갑니다. 이처럼 실제 위협이 있다고 믿는 것은 위협의 실존 여부와 분리되어, 기표 자체의 의미작용을 만들어나갑니다. 일반적으로 전사의 자질이라고 간주되는 전쟁 수행의 능력은 타인의 고통과 자신의 삶에 대한 무관심에서 비롯됩니다. 여성주의 철학자들은 하트삭과 러딕, 테벨라이트 등은 남성 특권의 유지에 대한 두려움, 여성의 출산에 대한 선망과 공포 등이 소년-남성을 엄마-타인(m)other를 정복해야만 하는 존재로 인식하게 한다고 분석하기도 합니다.
여성 중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받은 베르타 폰 주트너는 “지금 당장 모두 무기를 내려놓는 것”이 평화를 위한 유일하게 현실적인 해결책이라고 말합니다. 무기를 든 채 하는 대화는 불가능합니다. 평화는 공존을 전제로 해야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그리고 공존은 관계에 대한 성찰로부터 나오지요. 하지만 슬프게도 현재의 평화담론에서 관계에 대한 사유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관계가 아니라 게임이 지배하고 있지요. 누가 누구를 속이고 있는지, 누가 누구의 편인지에 따라 도박판의 승패가 결정나는 상황에서 평화는 언제나 전쟁 사이에 잠시 존재하는 예외적 상황으로 이해됩니다. 도박판이라는 건 무사히 돈을 따고 집에 돌아가려고 해도 언제 뒤통수를 치며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승패를 무화시킬지 모르는 동네입니다. 서로 이렇게 속이고 살면 안되지 않냐고, 정직하고 진실한 관계를 맺으면서 살자고 해도 모두 코웃음을 치는 것이 현재의 평화담론인 셈이지요.
저는 평화담론을 군사전문가들과 국제정치학자, 그리고 정치인들이 주무르는게 딱 이런 상황이라고 생각해요. 문제는 서로 어떤 관계를 맺고, 그 관계 안에서의 윤리를 만들어나갈 것인가에 있는데, 관계 자체에 대한 생각은 점점 하지 못하게 되고 관계를 “게임”이라는 틀로 이해하는 거랄까요. 그러고 보니 남자들의 이성애 연애도 비슷하네요. “손목 다음에 키스 그리고 삽입, 클리어!” 이렇게 게임의 법칙으로 관계를 이해하니까 항상 물어보는 질문이 똑같은 거겠죠. “어디까지가 성폭력인가요?”같은 질문들 말이예요. 스스로가 생각할 능력을 잃어버리고 규칙에 의존하기 시작하면 상대방의 마음을 읽지 못하게 되지요. 타인의 고통에 무감해지고 자신의 삶에 대한 질문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 전쟁입니다. 전쟁은 구체적인 개인들을 적 혹은 아군이라는 형태로 추상화시킵니다. 전쟁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과정은 보편적 정의에 호소하면서 개인들의 욕망을 모두 특수한 것을 만들어내면서 가능해집니다. 전쟁이 동일성에 기반해 있다면, 차이를 견디어 내는 과정이 바로 평화입니다. 전쟁의 반대항으로 만들어진 궁극적인 평화라는 개념은 궁극적 여성과 비슷한 개념쌍이예요. 어머니, 여성, 아이들은 무력하기 때문에 평화로운 존재로 그려지지요. 그러나 평화라는 개념이 해체되기 시작하고 동일성 안에 포섭되지 않는 차이들이 드러나는 순간(예를 들어 병역거부자나 탈영자같은 존재자들 말이죠.) 전쟁은 차이들과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한 인간들의 무능함에서 비롯된 지극히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상황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수 있습니다.
평화는 공존을 위한 비폭력적인 고투
상대방과 관계를 맺는다는 건, 게임처럼 법칙을 만드는 과정이 아니라 서로 간에 신뢰를 쌓아가고 신뢰에 기반한 대화를 나누는 과정을 말합니다. 관계에서 생기는 건 역사성과 맥락성이지요. 그리고 법칙이 아니라 윤리가 만들어지는 거구요.
물론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도 전쟁과 평화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습니다. 여자와 남자가 동등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페미니스트들은 왜 성별차이가 차별이 되었는지를 생각하기 보다는, 성별차이가 아무런 근거가 될 수 없도록 만드는데 관심을 쏟습니다. 그래서 “여자도 군대가자”고 말하는 사람들이 나오는 거죠. 저는 이 사람들이 남자와 똑같이 되는 걸 원하면 그렇게 해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제가 원하는 것은 지금의 남자와 여자가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지만, 남자처럼 되고 싶거나 남자의 일에 더 큰 가치를 두는 여자들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여자도 군대 가자”고 하지 말고, “나도 군대를 보내달라”고 말했으면 좋겠어요. 저는 그녀들과는 다른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자”를 한데 묶지 않아주었으면 합니다.
또 여성들이 출산과 양육을 통해 생명과 평화, 지구와의 조화로운 공존에 대한 생각을 발전시킬 수 있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평화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남자들은 수렵을 해오면서 폭력적인 성향이 강화되었고, 여자들은 채집과 농경 및 육아를 담당하면서 평화주의자가 되었다는 식의 설명인데, 역사학자 거다 러너는 이런 남성사냥꾼론이 인류학적 연구를 통해 허상이라는 것이 밝혀졌는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남성사냥꾼론에 기반해서 남성의 폭력성과 여성의 양육적 특징을 강화하는 것을 강경하게 반대합니다. 여성이 어머니이기 때문에 평화적이라는 인과율은 사회관계 안에서의 여성을 다시 자연화시킨다는 거죠. 하지만 <모성적 사유>를 쓴 사라 러딕은 생물학적 운명으로의 모성이 아니라, 사회적인 활동으로서의 모성적 특징을 묘사하면서 여기서 우리가 배울 게 있다고 말하지요. 러딕은 자신이 좋은 어머니 노릇을 규범화한다거나, 어머니가 아닌 사람들을 배제한다거나 하는데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어머니 노릇에 담겨있는 “비폭력적인 고투”에 주목해야 한다는 거예요. 양육은 평화롭고 즐거운 과정만은 아닙니다. 아이의 고통과 어머니의 혼란 속에서 어떻게 해야 둘 모두에게 편안한 상태가 올 것인지를 끊임없이 “사유”하는 과정이지요. 러딕은 바로 이러한 모성적 사유가 전쟁을 멈출 수 있는, 새로운 관계를 찾을 수 있는 방법론이라고 제시하고 있습니다.
관계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페미니즘 윤리학 중 하나인 “care ethics”는 기존 실증 철학이 남성을 보편이라고 간주하고 정의론을 만든 것을 비판하고, 관계성에 기반한 새로운 윤리학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한국의 페미니스트들은 이 영어를 “돌봄 윤리”라고 번역하는 반면, 남성 철학자와 사회학자들은 이 영어를 “배려 윤리”라고 번역한다는 거예요. (물론 예외도 있지만요.) 배려는 보통 마음을 쓰는 것이라고 정의되는데, 이 배려에는 군대에서 만난 대대장이 사병이 뽀글이 라면을 몰래 먹는 것을 보고 일요일 간식 시간에 라면을 내라고 지시하는 것, 영화 감독이 촬영장 막내가 병원에 갔다 오는 걸 허락하는 것, 아버지가 하루 종일 아이들에게 시달린 어머니를 위로하는 것 등이 모두 해당합니다. 하지만 돌봄은 도와주거나 돌봐주는 구체적인 ‘행위’를 의미합니다. 라면을 끓이는 것, 아픈 사람을 돌보는 것, 아이를 돌보는 것이 ‘돌봄’인 것이죠.
전쟁은 결코 여성을 돌봐주지 않습니다. 배려조차 하지 않죠. 전쟁담론에서 여성은 아프간 전쟁처럼 “여성을 해방시키겠다”는 명분이 되거나, 피해자로서의 여성을 민족적 아픔으로 상징화시키면서 전쟁의 당위를 주장하려는 정당성을 확보하는 방식으로만 존재하게 됩니다. 시일야방성대곡을 쓰고, 나중에 점점 친일파가 되어가는 장시연 같은 이는 남자들이 나라를 빼앗겼어도 여자만은 민족적 정절을 지켜야 한다는 소리를 애국부인전 같은 걸 쓰면서 뻔뻔하게 지껄이기도 하지요. 전사의 죽음은 명예롭지만, 강간당한 여성은 불명예 그 자체를 상징합니다. 테벨라이트는 독일병사들의 편지와 글들을 통해 전쟁 시 여성을 강간하는 이유는 그녀들이 약하기 때문이 아니라 여성들의 질과 젖가슴, 입술들이 나와 타자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에 대한 공포심 때문이라고 분석합니다. 대만의 탈식민주의 학자 천광씽은 전쟁터에서 병사들이 굶주림과 공포라는 전쟁터의 비인간성에 직면하지 못하도록 그들의 문제를 “성욕”에 돌리려는 전쟁선전술에 주목합니다. 사실 성욕 따위는 없었다고 말하는 병사들은 그 말을 입 밖에 내지 못합니다. 여성에 대한 두려움을 표현하거나, 죽음을 무서워하는 것은 곧 남성적이지 않은 행동이며, 그런 이들은 전사가 될 자격이 없으니까요. 전쟁은 다른 모든 인간됨에 대한 욕망을 남성성에의 질주로 치환시키는 강력한 이데올로기 장이자, 누가 살아남을 자격이 있는지를 철저하게 병사들의 관점으로 판단하는 “죽음”의 정치입니다. 병사들/남성들이 타자와 자신과의 관계를 적대적으로 위계화하는 것, 절대악의 존재를 설정함으로써 일상적인 폭력들을 눈감게 만드는 비겁함을 용기라고 착각하게 하고, 타자들/여성들이 희생자나 적, 혹은 전사의 어머니이자 아내로만, 혹은 민족의 누이로만 존재하게 하는 것, 이것이 전쟁이 주는 패악들입니다. 오랫동안 감옥에서 살아온 신영복 선생님의 잠언들이 감동적인 것은 감옥 안에서 살아가는 고투를 사유했기 때문이지요. 러딕은 이런 것을 바로 “모성적 사유”라고 합니다. 핵무기적/중심적 사유(nuclear thinking)에서 모성적/타자적 사유(m/otherhood thinking)로 전환하는 것이지요. 관계를 지속하기 위한 고통스러운 노력들,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정이입능력, 갈등을 지리멸렬하게 화해하려는 욕망 등 저는 이것들이 바로 평화를 사유하는 가장 윤리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서울대학교 관악교지. 2006. 12월 발간예정)
II. 성희롱 사회와 남성
최연희 국회의원은 동석한 여기자를 식당여주인으로 헛갈렸다고 고백했고, 이름을 대면 모두 알만한 고명한 한 남자문인은 술자리에서 자신의 제자들에게 “해피, 메리, 쫑” 등 강아지 이름을 붙여주는 버릇이 있다. 회식에 참석한 신입여사원들에게 “이제부터 오빠라고 불러”라고 말하는 과장도 있고, 여자가 옆에서 술을 따라야 제 맛이라며 만취상태로 노래방까지 가서 부르스를 기어코 추고야 마는 모 대기업에 다니는 부장은 다음날 늘 기억이 안난다고 한다.
이들은 종종 “기억을 상실”하거나, 직장 내 혹은 회식자리에 함께 있는 여성들이 왜 거기 있는지를, 심지어는 누구인지를 잊어버린다. 기억상실이라는 것은 무의식이 보여주는 갈등의 징표이다. 무의식의 갈등은 방어기제를 통해 해소되는데, 성희롱 판결이 이루어지는 법정 장면과, 가해자와의 상담 장면에서 드러나는 대표적인 방어기제는 망각(forgetfulness)과 합리화(rationalization)이다. (가정폭력 장면에서는 취소(undoing)의 방어기제가 종종 작동된다. 부인을 때린 남편이 꽃을 선물하는 경우 등이다.) 이때 망각은 합리화와 연결되어, 정신이 통제하지 못한 상태의 육체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자 한다. 성충동에 원인을 돌리거나, 술과 어린 시절 등에 자신의 현재 행동을 설명하려는 경향 등이 해당되는 사례이다. 무의식이 아니라 의식적 차원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이들도 있다. 이들은 호칭(오빠라고 불러, 해피라고 부를게 등)을 통해 관계를 재조정하여 남성의 성적지배가 당연시되는 공간을 재창조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이들에게 무의식이건, 의식에서건 “갈등”을 불러일으킨 것은 과연 무엇일까? 물론 이것은 단지 가설일 뿐이지만, 나는 성희롱은 남성동성사회에 진입하고 있는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집단적 히스테리라고 생각한다. 크리스티나 폰 브라운은 집단적 살육의 공동체에 자기 자신을 일체시키는데 실패한 군인들이 전장으로 돌아가는 것을 거부한 <전쟁신경증>은 집단적이고 이상적인 남성성의 허구를 인식했기 때문에 발생한 남성히스테리의 일종이라고 주장한다. 오직 한 종류의 성에 해당되는 특질만을 가져야 정상이라고 인식되는 사회에서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여성성을 없애기 위해 투쟁해온 남성성과 집단적 남성다움의 허구성과 내면의 양성성 사이에서 갈등하는 남성성 등 이제 남성성이 하나의 단일한 무엇이 아니라 복수의 가능성들로 열려지면서 “나를 나라고 말할 수 있는 기본 단위로서의 성별”이 해체되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의 윤리규범에 일치하는 일관된 행동이 더 이상 불가능해지고, 성적 억압이 모순적으로 작동할 때 히스테리 증상이 찾아온다는 가설을 적용한다면 성희롱을 남성 히스테리라고 보는 것이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남성들의 세계라고 생각했던 곳에 여성들이 침입해오는 것을 법적·행정적으로는 환영하고 있지만 내면에서는 전혀 원하지 않고 있었던 갈등, 자신의 세계에 여성이 공존하게 되면서 자기 자신의 여성성이 드러나게 되는 것에 대한 불안, 소년에서 남자 어른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어머니와의 심리적인 결별을 통해 성장했다고 믿었던 프로이드식 성장곡선이 이제 공적 세계에서 리더쉽을 발휘하는 어머니-여성을 목도하게 되면서 받게 되는 충격과 공포... 끊임없이 여성들을 집으로, 성매매 업소로, 소유물로서의 애완견의 일종이자 말 잘 듣는 여동생이라는 위치로 “헛갈리는” 남성들의 심인성 반응에는 이러한 남성동성사회의 일체성을 깨뜨리는 여성들에 대한 저항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닐까?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리 사회에서 남성들의 이러한 변명들은 합리화의 영역으로 이해되는 것을 종종 넘어서서 정당화되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합리화는 자기방어기제의 일종이며, 선과 악이라는 법적, 윤리적 규범과 무관하게 자기 자신의 심리적 안정에만 기여하는 행위이다. 정당화는 그러한 행동을 윤리적으로 정당하게 만드는 사회적 실천이다. 이때 “사회적 통념에 의거했을 때 합리적”이라고 성희롱 사건을 판단하는 법정의 언어는 남성동성사회의 병적 방어기제인 자기합리화를 집단적 남성동성사회의 권력에 의거하여 정당화하는 아주 전형적인 방식이자, 남성성의 해체와 양성성의 도래라는 새로운 시대적 규범에 저항하는 낡은 로고스이다.
성희롱 예방 교육을 하고 난 후, 남성들은 “어디까지가 성희롱인가요?”라고 질문하고, 여성들은 “이런 것도 성희롱이 되나요?”라고 묻는다. 이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남성들은 여성과 함께 이 사회를 살아갈 수밖에 없으며, 이런 변화가 자기 자신에 좋은 일이라는 점을 통째로, 마음 속 깊이 받아들여야만 성희롱을 할 수 없는 몸으로 변화된다고 대답한다. 이러한 질문은 성희롱을 문제를 제기하는 상대방의 문제로 넘기고 싶어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다. 성희롱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성희롱이 어디까지인지를 아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만 가능하다. 성희롱 가해자의 망각과 자기합리화를 정당화하는 남성동성사회의 정신병리에 대한 해결책은 머리로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몸의 실천과 변화를 수반해야만 가능할 것이다. (월간 인권 2006. 7월호에 실린 글)
III. 과학기술과 여성의 소외
줄기세포 허브를 야심차게 꿈꾸던 한국의 생명공학은 난자의 의심스러운 출처, 함께 일하던 동료 교수들의 이탈에 이어, 논문의 진위여부까지 논란의 대상으로 떠오르면서 일단 벽에 부딪힌 것으로 보인다. 사태가 악화되자, 구제금융 IMF 시대의 금모으기 운동을 연상시키는 “난자 모으기” 운동이 일어났고, 사건을 보도한 MBC PD수첩은 이완용에 비견되는 매국노로 취급되었다. 결국은 강압적인 취재방식에 대해 MBC 뉴스데스크를 통한 사과논평이 2005년 12월 4일 발표되었다. 이에 MBC는 취재과정에서 몰래카메라를 동원하는 등 취재윤리를 벗어난 행동을 했으며 이제 진위 논란은 언론이 아니라 과학계에 맡기자는 내용의 논평을 발표하였다.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연구를 둘러싼 일련의 논란은 한마디로 우리들 사이의 경계가 얼마나 견고한지를 보여준다. 황 박사의 연구와 그에 따른 논란들은 신과 인간 사이의 경계, 남성과 여성의 경계, 세계와 지역의 경계에 대해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다.
가장 경계해야 할 것 중 하나는 이 새롭게 던져지는 질문들을 사유할 자격을 제한하여 권력화된 집단적 전문가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피디수첩은 전문가에 의해 생산되고 전문가에 의해 공인된 논문을 비전문가의 자격으로 검증하려 했다는 이유로 뭇매를 맞고 있다. 야심차 보였던 MBC 피디수첩의 도전은 공명심에 가득 찼으나 결국은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한 돈키호테처럼 비춰졌다. 피디수첩의 취재에 비호의적인 사람들은 마음껏 상상력을 발휘하고 있다. 반미 친북 좌파 이데올로그들이 뒤에서 공작한 일이라고 하는가 하면, 한국이 생명공학의 선두주자가 되는 걸 좌시할 수 없었던 미국의 음모라고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경위가 어찌되었던 사람들은 일단 글로벌 과학잡지 사이언스가 검증한 논문을 일개 로컬 언론이 다시 검증하라고 하는 것은 웃기는 일이라는 생각을 꽤 광범위하게 공유하고 있는 것 같다.(서울경제 05.12.5, “전문성 없는 언론기관서 과학 연구 성과 검증 유감”)
그러나 과학은 언제나 그 외부의 눈으로부터 가장 비판적인 공격을 받아왔고, 그러한 비판을 통해 신성에 도전하는 과학이 다시 신성화되는 것을 경계할 수 있었다. 애초에 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윤리적 기준이 불명확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황 박사의 혁명적 성과들은 이제 과학의 영역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영역에서 다시 검토되어야 할 것이었다.
영장류 생물학자이자 페미니스트 과학사가인 도나 해러웨이는 ‘사이보그 선언문’을 통해 자연, 인간, 기계의 경계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그는 생물학은 그 자체로 세계가 아니라 담론이라고 선언하며, 연구자의 위치와 연구목적에 따라 연구결과가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황우석 박사가 “내가 여자였다면 내 난자를 뽑아 쓰고 싶었다”(05.11.24 연합뉴스)고 말한 진술은 황교수가 가진 생물학적 남성의 위치를 환기한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연구의 객관성을 진술하는 보통명사 과학자이자 국민영웅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 및 신뢰성에 대한 심리적 불안감”을 드러내는 “남성” 과학자로 보이기 시작한다.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왜 줄기세포에 “똑같이” 열광하지 않아도 되는지를 보여주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명백하게 과학자의 “위치”와 “이해관계”가 드러난 것은 어찌보면 우리에게는 사유의 자유를 허용하게 한 다행스러운 사건이기도 하다.
“(내 난자가 있었다면) 뽑아 쓰고 싶었다”는 황 박사의 말은, 그와 함께 한 다른 여성과학자의 행동을 부정하는 동시에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한다. 또 다른 과학자인 그/녀는 왜 자기 난자를 뽑아 쓰지 않았을까? 자신의 난자만으로는 가능하지 않았거나, 굳이 그러지 않아도 난자매매(혹은 기증)이 가능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의 말은 생물학적인 결핍을 호소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감정을 움직인다. 생물학적 남성인 그는 난자를 자신의 몸에 가지고 있지 않지만, 타인의 난자를 소유할 수 있다. 이것은 사회적으로 남성은 여성의 몸을 소유 가능한 대상으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과학자들이 “타자”의 몸을 대상화하는 것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그의 고뇌가 “난자 없음”에 있다기 보다는 “과학”의 목적에 대한 인간적 상처와 닿아있었다면 훨씬 윤리적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신이 소유하지 않은 것에서 자신의 아이를 탄생시켜야 하는 난제에 직면하면서, 그가 선택한 것은 일종의 대리모들이다. 그는 연구의 성과를 누리는 유일한 존재이자 연구의 아버지가 되어야 했고, 그래서 모든 줄기세포 과학자들을 난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난자를 공여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간주하며 여성과학자들의 존재를 부인하고, 난자를 공여한 수많은 어머니들은 연구의 질료로만 존재하는 비존재로, 문명의 들러리로 취급했다. 흥미롭게도 이 모든 과정은 여성의 몸을 착취한 남성중심적 역사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혹자는 난치병 환자들의 고통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단지 난치병 환자를 고치는 목적으로 줄기세포 연구가 사용된다면, 난치병 환자를 고치기 위해 여성들의 몸에 검증되지 않은 의료적 처치를 해야만 가능한 현재의 “방법”은 재고되어야 마땅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더 이상 연구목적이 “난치병 환자를 고치는 것”에 머물러 있지 않다는 것이다. 황 박사의 연구를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바이오 시대를 이끌어갈 수 있는 국가적 희망이자 자부심으로 호명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과학기술에 대한 신성성과 세계화와 국제경쟁력에 대한 한국적 공동체주의는 여성의 몸에 대한 남성적 착취의 정당화라는 전제하에 부지런히 자기 논리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왜 어떤 여성들이 난자 매매에 나설 만큼 절박한 상황에 놓여져 있는지에 대한 관심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여성문제와 계급문제는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난치병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2005. 12. 민변 칼럼)
IV. 가해자 인권론을 다시 생각한다.
내가 가장 견디기 어려워하는 종류의 사람들은 공감하는 능력이 떨어지고 뭉뚝해서 상대방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상대방의 감정을 이해하거나 공감할 필요를 느낀 적이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사회에서 집단적인 차별을 받는 집단들은 대부분 지배자의 감정, 가해자의 감정에 놀랄 만큼 쉽게 공감합니다. 내가 약했으니까, 내가 못났으니까 라는 자책의 말들은 자기 자신을 망가지게 만들지요. 이 말은 곧 약하고 못난 사람들에게는 함부로 굴고 폭력적으로 대해도 되며, 강해지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생각을 낳기 때문입니다. 나는 피해자 안에 있는 분노를 만날 때마다 그 분노가 강하고 크고 귄위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비슷한 것들을 향해 있기 때문에 두려워지고는 합니다. 타인을 인식하는 방법에 있어서 자신의 생존을 위해 타인의 존재를 인정해야 하는 과정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없었던 종류의 계급성을 가진 이들,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든 권력화된 사람들은 이런 감정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공지영의 신작소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 여자주인공 유정이는 어린 시절 겪었던 성폭력 피해 경험 때문에 자기를 부정하는 삶을 살아내고 있습니다. 그가 어느 날 연쇄살인범이자 소녀강간범인 사형수를 만나게 되고, 그를 만나면서 비로소 “진짜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합니다. 유정은 자신의 엄마를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는 생각했던 자신의 마음을 용서하고 싶어 하지요. 자신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사실 아무 잘못이 없다는 걸 이해하고도 싶어 합니다. 유정은 결국 가해자조차 자신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아갑니다.
우리는 그런 “인간”이라는 범주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은 모두 좋지도 나쁘지도 않으며 위선과 위악 사이에서 어떤 희망들을 의지들을 만들어가게 될 뿐입니다. 얼마 전에 서울여성영화제에서 상영되었던 <끔찍하게 정상적인>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에 나오는 성폭력피해여성도 그렇게 말하지요. “저들이 나와 같은 인간이라는 걸 견딜 수 없어. 어떻게 인간이면서 동시에 악마일 수 있지?”라구요. 가해자가 슬프게도 같은 인간이라는 것. 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그럴 수 있다는 걸 인정하는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누군가가 용서가 안되어서, 그런 자신에 대해 몸부림 쳐보지 않은 사람들은 잘 모를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은 멈추어 있지 않고 흐릅니다. 말하는 나와, 듣는 나, 상처받은 나와, 상처를 준 나는 끊임없이 교차합니다. 내가 피해를 입었다고 해서 다른 모든 것에 결백한 것은 아니지요. 상처와 고통 받았다는 말에 점점 사람들이 귀 기울이지 않는 이유는 이 말들이 어쩌면 너무나 차고 넘치기 때문입니다. 연쇄살인범도 어린 시절 가족한테 상처받았다고 말하고, 권력남용 정치인도 억울한 희생양이라고 울부짖고, 상상 못할 돈을 횡령한 전대통령도 역사 앞에 당당하다며, 모두가 피해자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세상은 점점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려 하지 않는 건 아닐까요? 나는 아주 몸이 아픈 적이 있었는데, 그때 약속시간에 늦거나 회의에 빠지는 다른 이유가 있는데 그냥 “아파서”라고 변명하는 사람들을 미워한 적이 있습니다. 너무 자주 아프다는 이유로 회의들을 빠지기 때문에 내가 정말 아플 때조차 사람들이 변명으로 생각하게 되는 게 싫기 때문이었습니다.
정말 아픈 사람들의 비명을, 그리고 그런 고통스러운 와중에서도 어떻게든 용서라는 마음을 가지기 위해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피해자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용서를 구하는 이들은 없는 것일까요. 가해자가 자신의 가해에 대해 인식하고 그러한 행동을 한 자신에 대해 상처받는 순간을 상상해봅니다. 아마 그 순간은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에 상처받는 정도를 휠씬 넘어서는 파열음을 낼 겁니다. 자기 자신을 완전히 지워버리고 싶고 인간으로서의 자신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는, 일종의 자살일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살아가기 위해 가해자는 결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도 용서를 구하지도 않는 게 아닐까요. 하지만, 인간은 모두 완전하지 않습니다. 가해자가 자신의 잘못에 대해 용서를 구할 때, 그래서 피해자의 치유를 위한 노력과 닿게 될 때 그때 우리는 아마 비로소 인간 대 인간으로 제대로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최근 전자팔찌부터 세부정보공개 등에 대한 가해자 인권론을 보면서 들었던 씁쓸한 생각들이었습니다.(민변 2005. 7-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