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방 안에 선선한 공기가 나를 깨운다. 방바닥은 아직 따듯해 이불에 몸을 몇 번 뒤척였다. 일어나 옷을 챙겨 입고 마당 한 구석에서 볼 일을 본다. 많은 양의 물을 내릴 필요 없이 땅이 흡수하도록 놔두면 된다. 문명사회에서는 더러운 것이 이 곳에서는 땅에게 필요한 양분이 된다.
하루일과의 대부분은 찻집에서 보낸다. 1월11일 대추리 평화촌 기자회견에 맞춰서 하루 전 부랴부랴 만든 찻집이며 찻집이름은 ‘차()한잔 하실래요’이다. 처음에는 석유난로를 구해다 오고 찻집은 찻집 분위기가 거의 나지 않을 정도로 썰렁했다. 게다가 찻집주인은 평소에 차()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으니 차 맛이 오죽했으랴. 게다가 “찻집이 너무 썰렁한데.” “차 맛이 별로야.”와 같은 주민 분들의 진담 같은 농담은 야속하게만 들렸다.
이 사람 저 사람한테 구박 받으면서 보름정도를 버티니 주워온 근사한 오디오와 얼마 전에 설치 한 연탄난로 그리고 점점 채워지는 내부 장식으로 인해 사람들은 이제 찻집에 들어오면 정말 찻집 같다는 말을 하곤 한다. 오늘은 주민들을 위한 특별메뉴로 대추 넣고 끓인 생강꿀차를 달이기로 했다. 집에서 씻어서 얇게 썬 생강과 대추를 넣고 물을 부어 푹 달이기 시작했다. 처음 시도한 거라 잘 될까라는 우려와 함께 몇 시간을 우려 낸 생강차 한 모금을 마셨다. 마시는 순간 퍼지는 생강의 그 매운 맛이 소름을 돋게 하였다. 너무 매울 거 같다는 생각아래 물에 담겨 있는 모든 생강을 건져내고 평화바람 숙소에서 가져 온 꿀을 들이 붓기 시작했다. 꿀과 물을 넣고 졸이고 맛보기를 여러 차례 한 후 다시 몇 시간을 달이니 맛이 제법 났다.
촛불집회 끝나고 문정현 신부한테 칭찬까지 받았다. “야~이거 맛있다.”그 진심성이 어린 감탄형 칭찬이란...내가 이제껏 차를 끓인 것 중에 그렇게 인정받은 차는 처음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다음번에는 더 커다란 냄비에 물을 가득 부어서 생강꿀차를 만들어야겠다. 주민분들이 좋아하실 것 같다.
아참, 찻집에는 항상 찾아오는 단골손님들이 있다. 바로 대추리에 살고 있는 아이들이다. 오늘은 축구를 하고서 떼거지로 찻집을 쳐들어오다시피 와 메뉴판을 들고서 서로 주문을 하는 모습이 재밌었다. 한 놈이 메밀차를 외치니 너도나도 메밀차를 달라고 하는 그 단순함이란...방에 들어가 나름대로 자신들이 생각한 방식대로 차를 마시고 있다는 상상을 하니 웃음이 났다. “차 맛 어때?”라는 말에 “맛있다.”라고 대답을 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차는 아직 잘 끓이지 못하지만 찻집주인이 차남기고 간 사람들을 제일 싫어한다는 이유를 조금씩 알 거 같다.
하루를 정리하고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 지감독은 방에서 박장대소를 연거푸 한다. 오늘 오전에 찍은 뮤직비디오 촬영한 것을 본 모양이다. 아침 일찍 촬영독촉전화에 잠을 깨 ‘사랑의 밥줄’이라는 노래로 뮤직비디오를 만들었다. “사랑의 밥줄로 꽁꽁 묶어라...주한미군 떠날 수 있게...” 최대한 선정적이어야 한다는 지감독의 요구에 힘입어 조약골은 머리에
삿갓을 쓰고 한복을 입는 기묘한 풍경을 연출하기도 하였다. 나랑 자두 그리고 동소심은 서로의 몸을 밧줄로 꽁꽁 묶은 채 잡아 당기고 밥사발을 들고 춤을 추었다. 산만하고 난잡하다는 지감독의 지적에 우리는 최대한 무표정을 지으며 절도 있는 율동을 시도했다. 3~4번의 NG끝에 지감독의 OK싸인을 받았다. 이른 아침부터 흘러나오는 음악소리와 모여 든 사람들 때문에 옆집 할아버지가 러닝차림으로 마실을 나오시기도 하였다. 주한미군확장이 예정 된 지역에서 언제 철거를 들어 올 지도 모르는 상황에 이렇게 노래 틀고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이 할아버지에게는 어떻게 비춰졌을까? 노인정에서 한 할머니 말씀이 떠오른다. “웃고 즐겨야 이기지.”
차가운 밤바람을 맞으며 캄캄한 시골길을 터벅터벅 걸어간다. 찻집을 하느라 나무를 줍고 장작을 패는 일을 깜빡했다. 오늘도 라이터에 불을 켜 마당에 널브러진 장작을 주워야겠다. ‘불이 빨리 붙어야 잘 텐데...’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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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대추리 평화촌 주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