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 먹은 이유는 대추리 군대 투입 때문이다. 원래 쓰려고 했던 글은 구속자 현황을 비롯한 각종 국가폭력에 대한 통계를 보여줌으로써 “국가폭력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란 주장을 하려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 민주주의가 발전한다 하더라도 국가폭력은 줄어들지 않으며, 국가폭력은 자본주의 위기 극복 방식의 가장 일반적인 방법임을 통계로써 검증하고 싶었다. 즉 국가폭력을 극복하는 방법은 단 하나, 노동해방 밖에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아니 국가폭력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노동해방은 없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 싶었다. 독자들이 예상하듯, 당연히 나의 이런 시도는 실패했다. 민주주의의 발전에 대한 지표에 관련한 자료를 구하지 못했고 국가폭력에 대한 체감온도를 눈에 보이는 통계로 보여주기에도 자료는 부족하고, 내 능력 역시 모자랐다.
하지만, 인터넷에 “폭력”이란 단어를 처넣는 것만으로도 미처 내가 의식하지 못했던 투쟁과 탄압들을 알 수 있었다. 비록 원했던 결과들을 검색하진 못했지만, 오히려 국가폭력이 더 심해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선 더 확신하게 됐다. 하이스코, 하이닉스, 코오롱 투쟁과 그리고 지금 내가 말하지 않더라도 동지들의 마음 속에 있을 최근의 끔찍한 국가폭력 사례들은 절대 잊어버려선 안 되는 것이다. 잊지 않는 것, 그것조차 못한다면 희망은 절대 없다. 이 글은 인터넷 검색 결과 최신의 것들만 일단 다루었다. 그러나 이글에 나오지 않은 국가 폭력에 대해 나는 결코 잊지 않았고, 앞으로도 잊지 않을 것이다. 아니 잊을 수가 없다. 몸 어딘가의 상처가 지워지지 않듯이.
1. 6월 12일 대구경북건설노조 집회 침탈 - 파업신고는 112!
방금 또 국가 폭력에 관한 소식을 들었다. 12일 대구경북지역 건설노조 동지들이 수성경찰서 앞에서 항의 집회를 하던 중, 공권력의 침탈로 33명 부상 2명 수술, 3명이 입원할 지경이 됐다. 이날, 집회 장소는 이미 공권력에 의해 점령된 상태였다. 이건 명백히 집시법 위반이다. (본래 집시법은 이런 불법 집회방해로부터 집회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생겨난 것이다. 이승만 시절 정치깡패의 집회 파괴 행위 같은 일이 다시는 생기지 말라고 만든 법이라는 말이다. 물론 그 법의 쓰임새는 전혀 그렇지 않지만.)
파업 중인 노동자들이 수성 경찰서에 모일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더욱 기가 막히다. 경찰은 “파업 신고는 112” 와 다를 바 없는 내용의 협조문을 건설 자본들에게 뿌렸다. 거기에 검찰은 건설노조 활동가들에게 “묻지마 체포영장”을 발부했고, 건설 자본은 협상에 일방적으로 불참하고 있는 중이다. 경찰과 검찰의 파업 파괴를 그냥 두고 보다간, 성과는커녕 수배자만 늘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검경의 파업 파괴에 항의하자, 이들은 “니들이 아직 덜 맞아서 그렇구나”라고 말하는 듯, 살인적 폭력으로 대답했다. 이쯤되면, 검경이 건설노조 활동가들에게 덮어씌운 “공갈죄”라는 죄목이 정작 누구의 것인지 분명해진다. 아니 검경은 거기에 특수 폭력까지 저지르고 있으니, 그들의 표현을 빈다면 전원 엄정처벌해야 할 판이다.
2. 아직도 계속되는 황새울 작전 - 반복되는 국가의 양아치적 삥뜯기
효자의 나라 한국에서 노인들이 앉을 곳은 지하철 경로석 밖에 없나 보다. 지난 5월 5일 대추리에서 억척스레 땅을 가꾸며 살던 대추리 주민들은 “자기 땅을 무단 점거한 죄”로 군홧발에 밟혔다. 높으신 양반들이 찜하면 알아서 내놓아야 별 탈 없다는 ‘생활의 지혜’를 늘그막에 몸으로 배우라는 것인가. 그 이전에 이미 새만금, 부안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었다. 새만금, 부안 투쟁에서 밝혀졌듯, 국가가 토지 수용을 결정하는 가장 객관적이고 결정적인 기준은 경제성, 공공성이 아니라 “땅주인이 얼마나 힘이 없나”이다. 나이들고, 영세하고, 잘모르는 주민들이 많은 곳을 골라 토지를 수용한다. 이런 국가의 기준은 양아치들이 삥 뜯을 상대를 고르는 기준과 똑같다. 양아치들이 삥을 뜯는 기준은 상대방이 얼마나 돈이 많은가가 아니라 얼마나 만만한가이이다.
이렇게 양아치나 국가의 기준이 비슷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토지 수용이니 행정 대집행이니 하는 것들과 양아치들의 삥뜯기는 규모만 다를 뿐 힘으로 남의 것을 손쉽게 빼앗는 것은 똑같기 때문이다. 힘의 차이가 압도적일 수록, 더 쉽게, 더 많이 뺏을 수 있는 것은 당연하다. 우린 “어떻게 노인들에게 저렇게?” 하며 분노하지만 국가, 양아치들은 “노인이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양아치들은 때리고 돈을 뺏긴 해도 차비라도 주는데, 국가는 때려서 땅 뺏어 놓고, 자기들 치료비 청구는 물론 저항했던 이들을 감방으로 보낸다.
3. 6월 14일 흑석동 침탈 - 양아치와 국가의 합동작전, 인간 철거
이런 유사성을 증명이라도 하듯, 대부분의 철거촌에서 용역과 경찰이 합동작전을 펼친다. 이런 합동작전은 재개발지구로 선정되자마 시작되어 철거가 완료되는 순간까지 계속된다. 재개발지구로 선정이 되면 경찰은 그 지역 순찰을 중지하고, 용역들은 지역에서 범죄를 일으킨다. 이렇게 시작한 합동작전은 마지막 철거의 순간에 더욱 빛을 발하는데, 용역들이 무사히 철거작업을 마칠 수 있도록 경찰은 주변 경계를 해주고 그동안 용역들은 주민들을 두들겨 팬다. 이 과정에서 용역이 다치면 근로복지공단에서 산재 승인을 해주고 구상권으로 주민들에게 돈을 받아낸다. 검찰은 주민들을 법정에 세우고 법정은 이들을 감방으로 보낸다. 자본이 보기에 용역깡패들은 할 일을 한 것이기 때문에 검찰로부터 “죄가 없음” 처분을 받아 법정에 서지 않는다. 즉 재개발의 처음부터 끝까지 국가는 용역과 함께하는 것이다. 지난 6월 14일에 동작구 흑석동에서 200여 명의 용역깡패들이 주민들을 폭행하는 동안 동작서가 전혀 나타나지 않은 것은 재개발지역에선 특별한 일이 아니다.
4. 존재 자체가 폭력이다 - 국가폭력 기구
일본 사무라이들도 평화 시기엔 칼을 쓸 일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항상 칼을 차고 다녔고, 자신들 이외에 칼을 차는 것을 금지했다. 실제 사람들을 베지 않더라도 이것만으로도 그들은 권력이 될 수 있었다. 국가폭력 기구 역시 마찬가지이다. 군대와 경찰은 사무라이의 칼처럼 존재 자체만으로도 지배의 수단이 된다. 굳이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지 않더라도 군경을 동원하는 것만으로도 복종을 강요할 수 있다. 상대적으로 물리력이 강할 뿐만 아니라 합법적으로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힘의 차이는 절대적이다. 이 절대적 힘의 차이는 복종을 낳는다. 복종을 강요받는 자 입장으로서는 국가폭력 기구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폭력인 셈이다.
5. 참여정부와 군사정권
386, 민주화운동 세대에서 대통령이 나오자 어떤 이들은 국가폭력이 줄어들 거란 이야기를 했었다. 이들이 보기에 국가폭력은 권위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래서 민주화가 진행될수록 국가폭력은 약해진다는 거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발전된 지금, 앞서 든 예들만 보더라도 국가폭력은 강해져 가고 있다. 빈도수를 떠나 국가폭력의 형태 자체가 점점 살벌해진다는 말이다. 대테러 무기인 레이저 건을 사용하기도 하고, 군대를 동원하기도 한다. 그것도 모자라 실탄을 지급하라는 선동까지 하고 있다. 또한 국가폭력을 사용하는 목적도 점점 공격적이 되고 있는데 과거 군사정권은 불만을 누를 목적으로 국가폭력을 사용했다면 지금은 자신의 정책을 관철시키는 수단으로 국가폭력을 동원하고 있다. 즉 기존의 체계를 부수고 더 강한 착취체계를 만드는 데 국가폭력이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강력한 노동유연화 드라이브를 걸고 그 드라이브를 거스르는 개별 단사의 투쟁에까지 공권력을 동원해 폭력을 행사하고, 구속 수배 등을 통해 철저하게 고립시킨다. 합법이냐 아니냐 조차 따지지 않는다. 오로지 정책에 맞는가 맞지 않는가가 중요하다.
참여정부의 국가폭력 방식 역시 끔찍하긴 군사정권과 마찬가지이다. 참여정부의 방식이란 ‘선전포고 후 국가폭력’, ‘폴리스라인 국가 폭력’이다. 즉 저항하는 자에게 투항의 기회를 준다. 폴리스라인을 넘지 않는 한 아무 문제가 없다. 이런 방식에서 사람들은 다치지 않는 법을 배운다. 한편 다치지 않는 사람들, 다칠 일이 없는 사람들은 이 선전포고와 폴리스라인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간다. 국가가 희생양들을 배제하고 국가폭력으로 탄압하기 이전에 우리 스스로 거기에 동화되어간다는 말이다. 이미 경계를 넘은 투쟁이나 집단은 자동 배제된다. 물컵에 갇힌 벼룩이 나중에 물컵을 치워도 물컵 높이만큼만 뛰는 것처럼 우린 길들여진다. 입으로만 싸워라! 인터넷 댓글 놀이가 투쟁이다! 이것이 노무현이 우리에게 주문하는 투쟁이다.
6. 비켜라! 질서유지대
민주화 투쟁으로 열어 놓은 광장을, 폴리스라인이 처지자 별 희한한 친구들이 다 나온다. 폴리스라인이 평화를 보장한다고 착각하는 건 당신들 자유지만, 제발 라인을 넘어가 싸우려는 사람 막지 마라! 폴리스라인 뚫는 것도 힘에 부치는 데 “질서유지대”랑 싸워야 할 판이니 부아가 치민다.
하이스코 동지들이 보여줬듯 당분간, 그리고 대부분의 투쟁은 지역의 연대를 얼마나, 그리고 전투적으로 이끌어 내느냐가 성패를 좌우하는 열쇠가 되리라 생각한다. 적어도 나는 공허한 좌파 연대보다, 지역 연대를 한 하이스코 동지들, 그리고 광전본부 동지들이 더 멋있고 훌륭하다.
최준오 (금속노조 조합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