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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은 왜 ‘사회적 책임’에 주목 하는가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운동은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자본주의 선진국들에서 기업에 대해 상당히 적대적이었던 시기에 처음 발생했다. 1960년대는 프랑스에서 사회혁명이 일던 시기였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베트남전 때문에 반전운동이 일어나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한 기업에 대한 적대감을 상쇄시키기 위해서 기업이 사회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1990년 이후 미국에서 실리콘벨리의 성장이 국가 자존심의 초점이 되면서부터 ‘돈 버는 것’이 존경스러운 것이 되었으며, 반 기업정서가 수그러들게 되었다. 1960년대 반 기업 운동을 벌이던 이 ‘베이비 붐’ 세대가 이제는 미국에서 CSR 운동을 주도하고 있다. 이들은 혁명을 포기하는 대신 자본주의를 좀 더 나은 자본주의로 만들고자 할 따름이다.

사회공헌기금

원래 미국에서의 사회공헌기금은 세전이익의 일부분을 기부하는 것이었다. 세전이익이란 어차피 주주들에게 돌아가야 할 몫의 일부분을 미리 떼어서 기부하는 것이다. 그래서 일부 주주들은 CSR에 반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행위들은 미국에서 사라지고, 유럽에서도 점점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국제 경쟁과 적대적 인수 합병 위협의 증대, 기업의 소유권이 기관투자가들에게 집중되는 현상, 중역들에 대한 보상금(옵션) 지급 기준의 변경이 주요 원인이었다. 경영자 자본주의에서 투자자 자본주의로 변화되어 주주 가치를 최대화해야 한다. 따라서 지금은 세전이익을 내 놓는 것이 아니라 최종이익에서 기금을 내 놓게 되었다.
사실상 모든 기업이 사회공헌기금에 나서면 어떻게 될까? 같은 자동차 업종에서 현대차가 사회공헌기금을 내고 대우차가 내지 않으면 사회공헌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할 것이다. 그러나 경쟁 상대인 그들은 상대에게 처지지 않기 위해 같은 수준으로 사회공헌기금을 낼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사회공헌으로 차지하게 될 이익 중 상당부분은 사라질 것이다.

반기업 정서의 무마

기업의 브랜드가 기업의 사회적 실천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점을 볼 때 ‘나쁜’ 행위는 ‘좋은’ 행위보다 그 영향력이 더 크다. 따라서 CSR은 기업에 부정적인 일이 생기면 할 수 없이 취하게 되는 활동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례는 삼성그룹이 정치자금법에 연루된 이후 이건희 회장이 돈으로 무마하려는 사건과 같다. 현대자동차의 정몽구 회장과 그의 아들이 기소가 되자, 1조 원이라 되는 돈을 사회공헌기금으로 내 놓은 사례도 마찬가지다.
기업이 사회적 책임에 주목하는 이유는 “지속가능한 기업”을 만드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기업이 지속가능하기 위해서는 흉악한 악마의 얼굴이 아니라 친근한 사람의 얼굴을 가져야 한다. 인간의 모습을 한 자본주의를 실현할 수만 있다면 기업이 천년만년 살아남아 지속가능한 착취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옛말대로 “인심은 곳간에서 나온다.” 하듯이 자본가들은 물량공세를 통해 선한 자본주의의 모습을 보이려고 애쓰고 있다. 이는 노동자들이 만들어 낸 잉여가치를 마치 자본가들의 노력의 산물로 여기게끔 한다.
현대중공업엔 어용노조가 있다. 그리고 비정규직노동자들의 노동조합 활동을 방해하고, 결사의 자유를 봉쇄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중공업도 사회적 책임에 나서고 있다. 삼성도 마찬가지다. 삼성 에스디아이에는 여전히 해고된 정규직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가 있고, 삼성그룹은 노동조합 결성을 용납하지 않고 있다. 엘지칼텍스는 연 100억 원 규모의 사회공헌기금을 출연하고 있다. 엘지칼텍스는 파업을 했다는 이유로 노동자를 해고시키고, 어용노조를 앞세워 해고자들을 노동조합에서 제명시켰다. 이러한 사례는 부지기수라서 다 헤아리기도 어렵다. 그들은 늑대의 본성을 감추기 위해 양의 탈을 쓰고 있는 것이다.
한 도둑놈이 있다 가정해 보자. 이 도둑놈은 밤마다 마을을 돌면서 집을 털어 재산을 모은다. 그리고는 자신이 훔친 재물들 중 조금을 마을 발전을 위해 내 놓는다면, 이 도둑놈은 양심을 가진 선한 도둑놈일까?
또 한 노예주를 가정해 보자. 노예들의 발목에 사슬을 묶어 놓고 채찍질을 통해 강제 노동을 시킨다. 그 결과 노예주는 엄청난 소득을 벌게 되고, 그 소득의 일부를 사회에 내 놓으면 이 노예주는 또한 선한 노예주인가? 미국의 나이키는 어떠한가? 나이키는 마이클 조던에게 광고료로 수백만 불을 지불한다. 그리곤 인도네시아 노동자에게는 하루 1~2달러의 임금을 준다. 조던의 광고 계약금을 벌기 위해서는 한 명의 인도네시아 노동자가 4만4천492년에 걸쳐서 일해야 한다. 선한 자본주의의 감춰진 모습은 이렇게 극명하게 드러난다. 기업들이 CSR을 통해 더 윤리적으로 행동하려 하거나 그래야 하는 유일한 이유가 수익성이 아니라고 발뺌을 해도, 결국 가장 영향력 있는 이유임은 부인할 수 없다.

지속가능한 착취를 위해

미국의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은 기업의 사회공헌기금이 주주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고 말하면서, 한편으로 ‘사회’에 이득을 주는 지출에는 반대했다. 기업들이 사회에 공헌을 하겠다면 우선 현재의 최저생계비를 올려야 한다. 그리고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바꿔야 한다. 하지만 기업들은 이런 ‘사회’에 이득을 주는 행위는 일체 하지 않는다. 사회적 이득을 주는 행위란 계급적 이득을 주는 행위를 말한다. 기업들은 노동자계급으로 하여금 이미 충분한 이득을 주고 있다고 믿게 만들려는 의도다. 또한 노동자계급의 이득을 자본가계급의 손실로 여기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본가들은 CSR을 통해 수익성을 올리는 것 뿐 아니라, 직원들과 소비자들로 하여금 선한 일에 동참하게 만드는 충성심을 유도하고 있다. 실제로 대부분의 기업에서 CSR을 할 때, 노동자에게 지불해야 할 임금의 몇 프로를 사회공헌기금으로 내 놓도록 하고 있다. 엘지 노동자들은 자신의 임금의 일 퍼센트를 사회공헌기금으로 내 놓고 있다. 기업들은 기업하는 시민으로서의 역할을 함으로써 기업 존립을 위해 그들 방식의 건전한 경제사회 환경을 만드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기업의 임원들은 그들의 사업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숙련된 인력과 사회적 안정이 모두 필요하다고 말한다. 미국의 수많은 도시를 휩쓸었던 게토 폭동(흑인 거주 지역에서 일어난 폭동)을 비춰 봐도, 자신들의 미래를 위협할 수도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상식이라고 말한다.

노동자계급의 영혼까지 빼앗으려는 사기

반복하자면,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주목하는 이유는 지속가능한 이윤창출이다. 이를 위해선 생산과정에서의 착취는 가급적 은폐되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가 지속가능하기 위해선 노동자계급의 영혼마저 빼앗아야 한다. 자본가들의 되로 주고 말로 받는 잇속을 차리기 위한 속셈에 많은 노동조합들이 혼을 빼앗긴 채 동참하고 있다. 이는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이 아니라 영원한 종속으로 들어서는 길이다. 노예의 발목에 묶인 사슬을 은으로 바꾸든, 금으로 바꾸든 노예는 노예일 뿐이다. 노동자계급이 쟁취해야 할 것은 노동자해방 세상이지, 착취하는 사슬의 색깔이 바꾸는 게 아니다. 기업이 진실로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싶다면 공장의 소유권을 노동자들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한, 자본가의 사회적 책무는 노동자계급의 영혼을 빼앗으려는 사기에 다름 아니다. 강도가 한복을 입든, 양복을 입든 강도짓을 그만두지 않는 한, 당하는 사람에겐 비극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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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 재벌 , 자본가 , 기업의 사회적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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