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별 전략논쟁 기획연재 1
<현장노동자>는 지난 8호에서 작금의 산별전환을 매개로 해서 지도부들이 제시하고 있는 노동운동 전략에 대해 전면적인 논쟁이 필요함을 제기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이에 따라 몇 차례에 걸쳐 이러한 전략 논의를 위한 토론 자료를 제출하고 동지들과 토론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이번 9호부터 네 차례에 걸쳐 [산별 전략논쟁 기획연재]를 싣습니다. (편집자)
1. 산별체제 하에서 ‘현장권력 쟁취!’는 이제 낡은 구호인가? (上) (下)
2. 남한에서 연대임금이 가능한가?
3. ‘사회공공성 강화!’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을까?
'현장권력 쟁취!’는 이제 낡은 구호인가? (上)
대공장 노조들이 산별전환 하면서 그 나마 남아 있는 현장권력의 요소들마저도 더욱 약화되고 소멸될 위기에 처해지고 있다. “기업별” 시절의 ‘현장권력 쟁취!’는 이제 한물 간 슬로건인가? 산별 교섭을 통한 산업 차원의 정책 개입 및 이와 연동한 경영참가가 노조운동의 본령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산별전환 이전 단위사업장 현장 중심의 노조운동은 아직 정상 궤도에 이르지 못한 설익은 운동이었던가?
산별전환의 들뜬 와중에서 ‘현장권력 쟁취!’는 대공장의 기득권 유지를 위한 낡은 방식의 투쟁으로 치부되는 분위기다. 아니, 개량주의 ․ 관료주의 세력들이 그런 논리들을 유포하고 악선전을 한다. 산별전환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죄다 “기업별 노조의 폐해”라는 낙인을 찍어버리기만 하면 됐는데, ‘현장권력 쟁취!’도 여기서 예외가 아니다. 임금 ․ 단협 등 단사의 요구를 가지고 싸우는 대공장의 전투적 경제투쟁(이른바 ‘전투적 조합주의’)도 그런 낙인이 찍힌 채 공격을 받아 왔다. 전투적 노조운동과 함께 이제 <현장권력 쟁취!>라는 이 보편화된 현장투쟁 ‘의제’까지도 산별론자들에 의해 폐기당할 판이다.
<현장권력 쟁취!> 대신 산업정책 개입/ 경영참가?
그러나 진짜로 낡고 시대착오적이어서 폐기 되어야 할 것은 <현장권력 쟁취!>가 아니라 산별 만능주의자들이 제출하고 있는 사민주의/ 케인스주의 계급타협 노선이다. 산별론자들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삼고 있는 독일 ․ 스웨덴식 사민주의는 이미 신자유주의 앞에 무릎을 꿇은 지 오래다. 아니, 사민주의 스스로가 신자유주의로 변신했다. 이른바 ‘사회적 자유주의’가 그것이다. 독일사민당 쉬뢰더가 ‘새로운 중도’를, 영국노동당 블레어가 ‘제3의 길’을 내걸고 어떻게 사회복지 해체, 민영화/ 구조조정과 노동법 개악을 밀어붙였는지 보라. 이것이 오늘날 사민주의의 모습이다.
자본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대항하여 최근 프랑스를 비롯한 서유럽 각국에서 분출하고 있는 반자본 계급투쟁과 베네주엘라, 볼리비아 등 중남미에서 확산되고 있는 현장권력/ 노동자 통제권 쟁취운동 및 기업 몰수 ․ 국유화 운동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강력한 현실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의 산별론자들은 이들 운동에 대해서는 철저히 눈을 감아버린 채 시대착오적으로 사민주의와 케인스주의를 내세우고 있다니.
<현장권력 쟁취!>의 전략적 위상을 명확히 할 때
“더 이상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은 없다. 오직 ‘자본주의 안에서의 대안’만 있을 뿐이다”고 믿는 산별 만능주의자들과는 달리, 자본주의를 넘어설 전망을 열어가고자 하는 전투적 현장활동가들에게 <현장권력 쟁취!>는 자기 운동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의제, 말하자면 운동의 전략적 과제이다. 노동해방이라는 전략적 목표로 나아가기 위해서 확보해야 할 진지이자, 통과해야 할 관문인 것이다. 설사 <현장권력 쟁취!>가 그 동안 이렇게 전략적 위상으로 명확히 정식화된 바 없다 하더라도 우리가 암묵적으로라도 그런 내용적 지향을 가지고 운동해 온 것은 부정될 수 없다. 단순히 노동조합의 현장조직력을 강화하기 위한 일상활동 수준으로 사고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현장권력 쟁취운동은 상층교섭과 정책개입 중심의 산별노조 운동에 당연히 걸림돌일 수밖에 없다. 현 시기에 산별노조 운동은 본질적으로 집행부 운동인 데 반해 현장권력 쟁취운동은 단위사업장 현장투쟁을 중심에 놓는 평조합원 대중운동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별 만능주의자들은 집요하게 <현장권력 쟁취!>를 “기업별 체제의 낡은 유물” 같은 것으로 몰아가고 싶어 한다.
이에 맞서 우리 현장활동가들은 이제 <현장권력 쟁취!>의 전략적 위상을 명확히 정식화해야 할 때가 왔다. 지도부들이 추진하는 산별전환은 단지 노조 형식의 전환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일 뿐, 이 참에 운동의 전략 내용을 확실히 갈아 치워 버리겠다는 것이 본질이다. 그 동안 눈치 보면서 조금씩 던져 온 것을 이번에 아주 체계화된 형태로 내놓고 있다. 노동해방 대신 독일 ․ 스웨덴식 자본주의를, <계급 대 계급 반자본 투쟁> 대신에 케인스주의적인 노사정 계급타협 모델을, 전투적 ․ 계급적 노동운동 대신 탈계급적인 정책참가 중심의 사개투식 노동운동을, 현장권력 쟁취 대신에 산별 교섭 및 사회적 교섭과 이를 통한 경영참가를 전략적 대안으로 삼겠다는 것이다.
산별 추진 지도부들이 좇고 있는 이 같은 낡은 사민주의의 신기루를 대신해서 우리는 현장권력 쟁취운동이야말로 현실적이고 과학적이며, 노동해방으로 가는 가교를 구성하는 운동임을 당당하게 제기해야 한다.
노조운동으로 해소될 수 없는 현장권력 쟁취운동
현 시기 노조운동은 집행부 운동으로 안착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87년 노동자 대투쟁으로 건설된 애초의 민주노조 운동은 현장 중심의 평조합원 대중운동이었다. 조합원 대중들은 민주노조를 자신과 동일시했다. 노동조합은 대상화된 타자의 운동, 집행부의 운동이 아니라 ‘나의 운동’이었다. 노조운동은 곧 현장투쟁이며, 현장활동가들의 운동이었다. 상임 집행단위 운동이 아니라 현장 대의원 소위원 운동/ 부서 ․ 분과 운동이 노조운동의 본령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자본의 신경영전략 등으로 현장이 무너지면서 노동조합이 집행부 운동으로 축소되고 집행부는 현장으로부터 자립화하기 시작한다. 노동조합이 평조합원 현장 대중투쟁기관의 위상을 탈각 당하고 공식 제도권 기구로 안착함에 따라 노조운동은 관료화 ․ 체제내화 되어간 반면 현장투쟁과 현장단위 운동은 공식 노조운동으로부터 분화되어 비공인 운동의 위상을 띠게 되었다.
이러한 자생적인 과정을 목적의식적인 운동으로 전환시키는 분수령이 된 것이 현장조직운동이다. 전투적 현장조직운동의 기치가 된 ‘현장권력 쟁취!’는 결코 노조운동(공식 임단협 중심의 활동)으로 해소될 수 없는, 그리고 노조운동의 관료화 ․ 체제내화에 맞서는, 독자적인 현장중심 운동이 존재해야 한다는 선진활동가들의 결의를 가장 의식적인 형태로 표현한 것이었다.
노동조합이 현장으로부터 자립화한 집행부 운동으로, 교섭기구로 축소되어가는 상황에서 현장의 선진활동가들이 단순히 노조운동을 쇄신하고 강화하는 차원으로 문제의식을 한정시킬 수 없었다. 공식 제도권 노조운동으로 환원될 수 없는 운동, 평조합원 대중들의 자주적 역동성을 끌어낼 수 있는 현장투쟁을 활성화시키고 나아가 노동해방의 전망을 다시 열어젖히는 운동을 모색해야 했다. 현장을 훓고 들어오는 자본의 신경영전략을 분쇄하고, 현장통제를 박살내고, 현장의 현안에 즉각적으로 대응하는 투쟁을 조직하고, 생산과 노동과정/ 작업조건에 대한 자본의 전일적 지배에 맞서 작업장 생산 질서를 틀어쥐고 노동자의 생산 통제권을 쟁취, 강화하는 등등의 현장활동이 강화되어야 했다.
이것은 단순히 노조운동을 강화하는 것으로 해결될 수 없었다. 어용 및 노사협조 세력을 내몰고 집행부를 잡는 것, 전투적 노조를 세우는 것으로 해소될 수 있는 활동이 결코 아닌 것이다. 운동의 전략적 과제와 목표를 시야에 두고서 노조운동과는 독자적인 운동 전망을 개척해야 할 상황이었다. ‘현장권력 쟁취!’는 선진활동가들의 이런 문제의식의 소산이다.
계급적 산별노조운동인가, 현장권력 쟁취운동인가?
이제 산별체제 하에서 노조운동은 그 가장 ‘순수한’ 형태의 집행부 운동으로 나타난다. 그 동안 진행되어 온 관료적 자립화가 마침내 완성되는 순간이다. 단위사업장 노동조합은 현장으로부터 자립화해 온 가운데서도 현장 대중투쟁기관으로서의 초창기 민주노조의 흔적을 완전히 떨쳐낼 수가 없었다. 여전히 현장조합원 대중과 활동가들의 통제/ 견제에 일정하게 매여 있었고 최소한 그만큼은 투쟁기구로서의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순수한 교섭기구로서 자립화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집행부/ 관료들은 산별노조를 통해 이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게 되었다. 산별 교섭과 산업 차원의 정책 개입, 노사정위 참가/ 경영참가 활동, 시민단체적인 대국민 캠페인성 활동 등, 현장조합원들의 눈에 이제 노조운동은 현장과 완전히 분리된 순수한 집행부 운동으로 나타난다.
이 상황에서 전투적 현장조직운동과 현장활동가들은 자기 운동의 중심을 산별노조를 바로 세우는 데 둘 것인가? 그래서 ‘우파’ 대신 ‘좌파’ 집행부를 세우는 것, 이른바 ‘계급적’ 산별노조를 세우는 것에 전략적 중심을 둘 것인가? 지금 만들어지는 산별노조를 ‘좌파’가 잡는다고 해서 과연 집행부 운동을 탈피하여 18만 금속노동자의 단결투쟁체/ 대중투쟁기관이 될 수 있을 거라 보는가? 현자노조를 민투위 같은 ‘좌파’가 잡았다고 현자노조가 집행부 운동에서 현장조합원 대중운동으로 바뀌던가? 현장으로부터 완전하게 자립화할 수 없는 단위사업장 노조에서도 그러한데 하물며 현장에서 완전히 벗어난 산별노조로 가면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노동조합을 포기하거나 기권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운동의 전략적 중심을 어디에 둘 것이냐는 것이다. 노동조합을 계급적으로 되게 해야 한다는 일반론에 누가 반대하겠는가. 그러나 원론적 입장이 아니라 현 단계 계급운동의 지형 위에서 운동의 전략적 과제를 고려한다고 할 때 현 시기 ‘계급적 산별노조!’라는 슬로건/ 전술전략은 필연적으로 현장으로부터 자립화한 또 다른 집행부 운동, ‘좌파’관료 운동으로 귀착될 것이라는 것이다.
계급적 산별노조를 건설하려면 제2의 87년 대투쟁이 필요하다. 그러나 오늘날 2006년에 그 같은 아래로부터 역동적인 현장 대중들의 투쟁이 터져 나온다면, 그 투쟁은 결코 ‘계급적 산별노조 운동’의 형태를 취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산별노조의 통제에 맞서 그것을 뚫고 나아가 산업별 분리벽을 헐어버리고, 투쟁하는 노동자 전체를 단결시키는 공장평의회/ 노동자평의회 운동의 형태를 취할 것이다. 이것은 세계 노동운동사가 증명하는 바이다.
이는 현 시기에 전투적 현장활동가들의 슬로건이 ‘계급적 산별노조!’가 아니라 여전히 ‘현장권력 쟁취!’여야 함을 뜻한다. 산별체제 하에서도, 아니 산별체제 하에서 더더욱 우리는 위에서 말한, 노조운동으로 결코 해소될 수 없는 현장활동, 현장권력 쟁취운동에 활동의 중심을 두고 평조합원 대중운동을 발전시켜야 한다. 단위사업장 현장의 공동화를 더욱 심화시킬 산별체제 하에서 이러한 현장권력 쟁취운동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며, 이 지점에서야말로 그 운동의 전략적 위상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현장권력 쟁취운동에 잠재되어 있는 공장평의회 운동의 전망이 그 어느 때보다도 현실성을 띠게 된다. (다음호에 계속 됨)
양 효 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