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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풀이 한판 3] 파업을 ‘노동자의 학교’ 라고 하던데....

Q 파업을 ‘노동자의 학교’라고 하던데요. 여러 정치조직이 발간하는 집회 유인물 또는 기관지를 보면 그렇게 말하던데요. 그런데 제가 보기엔 대공장의 파업은 관성화 되었고, 사내하청 비정규직노동자들의 파업은 힘이 달립니다. 파업지침에 따라 결사항전을 하지만 생산을 멈추고 자본에게 직접적인 타격을 가하는 면에서 파업의 효과가 미미한 수준입니다. 특수고용직 노동자들의 투쟁이 강력하지만 그리 파급효과를 갖고 있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게다가 대부분의 파업투쟁은 패배로 귀결되고 있습니다. 아무리 파업이 ‘노동자의 학교’라고 주장해도, ‘노동자의 학교’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인지, 아예 잘못 가르쳐 학생들을 바보로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궁금합니다.

A 자본과 정권은 파업권(단체행동권)을 다양한 방법으로 제약해 놓고 있습니다. 그런데다가 며칠 전에는 노사정 야합을 통해 필수공익사업장 범위 확대 및 필수유지 업무제도를 도입하고 대체근로까지 허용하는 등 이른바 ‘사용자 대항권’을 강화하여 파업을 완전히 무력화시키려고 합니다. 저들이 파업이 두렵긴 두려운가 봅니다. 생각 같아서는 아예 파업을 못하게 하고 싶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하면 폭동이나 반란이 일어날까 두려워 그렇게 하지는 못하는 거지요.

어쨌든 저들이 아무리 파업을 제약해도 파업은 계속 일어날 것입니다.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악랄하고 교묘하게 파업권을 제약하고 있는 이 나라에서 오히려 파업은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현대자동차노조처럼 노조 역사 20년의 기간 중 19년을 파업한 경우도 있습니다. 최근 사내하청 비정규직 투쟁, 특수고용직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이 일반화되고 있기도 합니다. 비정규직 개악안에 맞서 정치파업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비정규직노동자들의 결사투쟁을 제외하곤 과거처럼 사활을 건 파업투쟁이 전개되지 않고 있습니다. 노동조합이 관료화, 체제내화 되는 것만큼 파업도 통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선 파업을 해야

노동조합은 파업을 하기 전 다양한 투쟁을 합니다. 현안 문제를 중심으로 한 일상투쟁을 전개하지요. 이러한 일상투쟁은 현장조직력을 강화하고 노조를 강화합니다. 대부분의 노동조합은 파업을 최후의 수단으로 선택합니다. 거의 모든 노조에서 파업을 하지 않고 문제 해결을 했으면 할 겁니다.

이러한 조합원들의 소박한 심정은 여지없이 깨집니다. 6년간 지속된 현대자동차의 최대이윤에 따른 적정의 임금인상 요구조차도 자본가들은 수용하지 않습니다. 5조 6천억의 이윤을 낸 포스코 자본은 최소한의 인간 대접을 해 달라는 건설노동자들의 요구도 폭력경찰을 동원해 진압하려고만 합니다. 3,500명의 노동자들의 주5일제 요구를 묵살합니다. 자신들이 고용해 공장을 짓고, 보수하는 것인 데도 다단계 하청으로 천문학적인 다중착취하면서 나 몰라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정규직노동자들의 차별시정 요구조차 용납하지 않습니다. 차별시정 요구의 기본은 ‘동일노동 동일임금’ 적용입니다. 그러나 자본과 정권은 시늉조차 하지 않습니다. 이는 자본과 노동의 이해관계가 적대적이기 때문입니다. 공장에 붙어 있는 표어는 ‘직원을 가족같이’ 이지만 자본은 최대이윤을 위해 노동자에 대한 착취를 높여야 하고, 노동자들 사이에서의 경쟁을 강화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훈시나 담화문에서 ‘직원을 가족같이’라고 하면서 늘 직원을 ‘가축이나 기계부품’처럼 대합니다.

따라서 노동조합은 임금, 노동조건의 저하를 막아내고 조금이나마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 자본과 정권에 맞서는 투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파업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파업으로 승리하기 위해선 파업동력을 극대화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파업동력을 극대화하기 위해선 조합원의 투쟁동력을 강화하고, 연대투쟁을 확대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파업이 ‘노동자의 학교’가 되는 것은 이러한 과정에서입니다.

공장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파업은 기본적으로 자본가가 조장하는 노동자 사이의 경쟁을 중단하고 하나로 단결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하나로 단결한 노동자들은 노동력 제공을 거부함으로써 생산에 차질을 주어 자본에게 타격을 가합니다. 노동자들이 파업을 시작하자마자 기계가 서며, 건설현장은 멈추고, 운송은 중단됩니다. 모든 파업은, 노동자와 자본가에게 공장의, 사회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를 상기시켜줍니다. 생산현장의 점거파업은 누가 생산현장의 진정한 주인인지 단박에 인식하게 합니다. 평상시 자본이 하고 싶은 대로 했던 모든 일들이 노동자의 뜻에 의해 저지됩니다. 생산현장의 주인은 노동자임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분배 문제 -- 임금이든, 성과금이든, 노동조건이든 -- 로 시작한 파업은 생산과 생산과정의 주인이 누구인지도 드러나게 합니다. 일시적으로나마 자본가들은 자기 사유재산을 집단노동자들의 힘에 의해 자기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게 됩니다. 98년 현자노조의 36일간의 공장점거파업, 99년 한라중공업의 72일의 공장점거파업, ‘물류를 멈춰 세상을 바꾸자’던 화물연대의 광주 하남공단 점거파업도, 대구경북 건설노조의 점거파업, 포항 건설노조의 점거파업 등 모두, 노동자 없이는 공장도 사회도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파업의 위력은 자본과 정권이 파업에 대해 표출하는 두려움에서도 나타납니다. 파업을 하면 자본과 정권의 회유와 탄압이 휘몰아쳐 오고, 평소 같으면 노동자들을 거들떠보지도 않던 자본가 언론들로부터 집중 조명을 받습니다. 이는 자본이 파업에 대해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한 단면입니다. 자본가들의 집행위원회인 국가권력이 파업의 확대를 막기 위해 비열한 폭력을 동원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순간 신속하게 ‘공권력’을 동원하는 것은 이미 1890년대 독일 내무장관이 “모든 파업의 배후에는 혁명의 히드라(괴물)가 숨어 있다”고 고백했던 두려움의 연장입니다.

파업투쟁 시기 교육과 연대투쟁

반면 노동자들은 파업을 통해 거듭 변화합니다. 일상시기에는 사측에 맞서기보다 힘든 노동을 감내합니다. 하지만 파업이 시작되면 자신들의 요구를 주장하고, 자신들의 권리를 찾아 나섭니다. 자본과 정권의 회유와 탄압에 맞서는 과정은 동지애를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일당을 두 배로 준다는 회유도, 승진시켜주겠다는 회유도 모두 물리칠 수 있는 것은 노동자의 대의에 따라 함께 파업에 나선 동지애가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밑바탕엔 단결이 깨지면 모두가 죽는다는 기본 관점이 있기 때문이지만요.

파업이 ‘노동자의 학교’가 되기 위해선 파업에 나선 동지들의 계급의식을 강화해야 합니다. 파업의 배후에 있는 히드라를 전면에 나서게 해야 합니다. ‘노동자의 학교’에서는 개별 자본가에 대한 투쟁을 전체 자본가에 대한 투쟁으로 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따라서 파업에 대한 자본과 정권의 회유와 탄압, 여론의 파업파괴 이데올로기에 대한 투쟁을 통해 계급의식을 강화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파업 기간 중 조합원 교육이 중요합니다. 단협에 보장되어 있는 년 8-12시간 정도의 교육시간이 적다고 투덜대면서도 노동조합이 과거와 같이 파업 때 교육을 배치하지 않고 있습니다. 파업투쟁 시기에 조합원들의 불만과 의식이 가장 급성장할 수 있다고 하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파업이 ‘노동자의 학교’가 되기 위해선 교육보다 우선하는 실천투쟁도 있습니다. 사업장, 업종은 달라도 자본과 정권에 맞서 투쟁하는 사업장과의 연대를 강화하는 것입니다. 물론 연대투쟁을 강화하는 것이 자기를 강화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연대투쟁을 통해 모든 자본가는 노동자를 착취하는 데 있어 한 치의 차이도 없다는 것, 정권은 언제나 자본가의 편이라는 것 등을 현실로 배울 수 있습니다. 게다가 연대투쟁의 대오가 클수록 자본과 정권에 맞서 승리할 수 있다는 것도 배우게 됩니다.
2001년 효성투쟁 때 현대자동차 활동가들은 공권력 투입된다는 소문을 듣고 1000여명이나 야간조 작업을 거부하고 연대투쟁에 나섰습니다. 연대투쟁 대오는 공권력 투입 후 바로 지역투쟁에 나서는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태광 파업 때 조합원들이 구사대에 의해 공장에서 밀려나 힘겹게 투쟁하고 있을 때 현자 오토바이 선봉대 1000여명이 전경과 구사대 모두를 쫒아내고 공장을 탈환한 적도 있었습니다. 효성, 태광 뿐만 아니라 지역의 노동자 대오는 사기충전 했습니다. (총파업 지침을 파기하는 배신의 시간 전까지는 말입니다)

관료적 통제에 맞서야

마지막으로 파업이 ‘노동자의 학교’가 되기 위해선 파업을 관료적으로 통제하고, 형식적인 집회로 마무리 하려고 하는 세력들과 맞서 투쟁할 수 있는 계급의식화 된 노동자의 수를 늘려야 합니다. 파업현장, 집회현장에선 계급의식적인 노동자들을 위한 유인물과 신문이 상시적으로 배포되어야 합니다. 이를 통해 파업을 통제하는 노동조합 관료와 투쟁할 수 있는 조직 --현장조직, 정치조직 --을 건설해야 합니다. 관료에 의해 통제받는 파업, 관성화 된 파업은 아무리 자본의 피해 규모가 크다 해도 노동해방으로 가는 길을 만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파업이 ‘노동자의 학교’라고 배우면서도 현실에서는 ‘노동자의 학교’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에 의구심을 갖고 있는 동지들은 파업이 ‘노동자의 학교’ 기능을 되찾기 위한 투쟁에 나서야 합니다. 이미 관료에 의해 통제되는 파업은 ‘노동자의 학교’라는 기능을 상실하기 때문입니다. 파업이 노동자의 학교가 되기 위해선 관료들이 생각하는, ‘파업은 단순히 노동력 제공을 거부하는 것‘이라는 통념을 넘어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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