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썩하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릴 정도이다.(내 컴퓨터에는 스피커가 없는데도!) 누군지 모르지만, 참 손을 잘 썼다. 뒤늦게 글을 쓴다고 손을 놀리는 지금의 나는 그에 비해 모자라도 한참 모자라다. 월드컵 승부차기에서 온 국민을 열광시킨 이운재의 선방처럼 이용득 뺨에 시원하게 작렬한 그 싸대기는 나를 열광시킨다. 뭐 그 덕에 한국노총이 민주노총으로 몰려와서 몽니를 부리고 있지만, 이미 싸대기를 날리기 이전부터 이런 충돌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무튼 이 명장면은 다운받아서 구워놓고 <소장본>으로 만들어야겠다.
그런데 참세상에 방영한 이 <문제작>은 역시 문제작답게 우리에게 ‘철학적’ 고민을 던져준다. “우린 밀실야합 따윈 안 해, !같은 새끼들아.”
항의하러 노사정위 앞으로 달려간 노동자 대오에게 이용득이 던진 일갈이다. 어차피 개가 짖는 소리, 개소리라 무시해도 되지만 유독 이 소리가 귀에 박힌다. 그의 말대로 이번 야합은 누가 봐도 내놓고 한 야합이지 “밀실야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다들 성명서에는 “밀실야합 규탄”이라고 쓰지만 이 단어 쓰면서 다들 한숨 많이 쉬었으리라 생각한다. 물론 표정관리 하느라 혼난 사람들도 있을 테고.
득본 건 노조관료들, 망한 건 투쟁하는 노동자
쉬쉬해봐야 마른 오줌만 나온다. ‘툭’까놓고 말해보자. 우리는 지난 3년간의 “로드맵 논의”와 “로드맵 투쟁”에 같이 하거나 혹은 지켜봐왔다. 그리고 얼마 전 “민주노총을 배제한 노사정 합의”가 있었다. 동지들은 무슨 생각을 했는가?
민주노총의 지난 3년간 투쟁전술은 한마디로 요약하면 “강행시 총파업”이었다. 로드맵의 내용들이 말 그대로 “노동자 다 죽이는” 것들이었던 것은 03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민주노총의 투쟁전술은 “노사관계 로드맵 파기시까지 총파업”이어야 했다. 그런데 왜 총파업투쟁에 “강행시”란 조건을 단 것일까?
“강행시”란 단서는 한마디로 노사정에 민주노총도 끼워달라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민주노총이 노사정에 참여하는 동안에도 노무현 정부는 끊임없이 강행을 시도했다. 그것도 교묘하게 로드맵의 일부였던 파견법을 <비정규직보호법안>으로 분리시키고, 마찬가지로 로드맵의 일부인 <퇴직연금제>를 실시하였으며 공무원 노조를 합법화하겠다는 약속을 뒤집고 행정대집행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렇게 03년 당시 로드맵의 내용들이 오로지 자본의 입맛대로 “강행됐는데도” 민주노총은 총파업을 수행하지 않았다.
이렇게 노사관계 로드맵의 핵심 내용들이 분리되어 “강행처리”되는 동안 민주노총이 노사정을 박차고 나오지도 못하고 들어갔다 나왔다만 반복하면서 “강행시 총파업”이란 말만 되풀이 한 까닭은 무엇일까? 심지어 “대의원대회 단상점거” 등 현장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히면서도 노사정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까닭은 무엇일까?
03년 로드맵이 발표됐을 때 노동계는 다함께 위기의식과 분노를 느끼고 있었고, 로드맵 분쇄 투쟁이 현장으로부터 준비되고 실제로 진행되어 갔다. 바로 그때 민주노총은 “로드맵의 본질과 의도를 폭로하고 좀 더 대중적인 투쟁을 준비”한다면서 노사정으로 들어갔고, 이는 당시 투쟁을 통제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03년부터 지금까지 로드맵의 본질은 폭로되긴 고사하고 은폐되어왔다. 오히려 폭로된 것은 노사정에 참여하는 각 주체의 이해관계이다. 또한 파견법, 공무원노조 합법화, 퇴직연금제, 그리고 기타 내용들이 계속해서 “분리 강행처리”되면서 투쟁 역시 정규직, 비정규직, 그리고 공무원 등 고립 분산되어 진행되면서 패배가 줄을 이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핵심쟁점의 당사자이자 주체였던 비정규직, 중소사업장 노동자, 공무원노동자들은 구속 수배, 대중적 해체를 겪으며 로드맵 투쟁전선에서 후퇴하여 전열 정비에 들어갔다. 지난 3년간 투쟁하는 노동자들은 노사정으로 인해 소모적인 싸움만 계속하다 이젠 아주 거덜이 난 것이다.
반면 노조관료들은 이번 야합 결과에서 보듯이 챙길 건 다 챙겼다. 노조관료들이 보기에 가장 핵심적인 쟁점인 전임자임금을 사수해냈으며, 복수노조 인정을 유예해 현장의 도전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어용, 민주를 떠나 노조관료들은 오래전부터 현장과 분리되면서 “조합비에 의한 전임자 임금 및 노조 운영”은 고사하고 복수노조가 생기면 자신의 위치가 어떻게 될까 전전긍긍해왔다. 이는 민주노총의 노조간부들에게도 해당한다. (좀 더 들어가 보면 이미 노조와 조합원 사이의 관계는 표를 넣어 임금 인상 등 물질적 성과를 보장받는 자판기 시스템으로 정착되어왔고, 이 관계에서 노조관료들은 “표”이상의 것을 조합원에게 요구하지 못하며 조합원들은 “성과를 좇아” 언제든지 자신의 소속 노조를 바꿀 수 있는 상황이다.)
자, 우리가 쉬쉬하면서 털어놓지 못하는 이야기는 바로 이것이다. 이번 야합이 과연 한국노총만의 밀실야합이었는가. 우리는 이번 야합을 보며 다행스런 한숨을 쉬고 있지는 않은가.
상생노조의 전초기지가 마련됐다
첫 번째 전초 기지: “쟁의행위에 대한 투명성 강화를 위해 결과에 대한 공개 열람”
말이 결과에 대한 공개 열람이지 그것이 투명성 강화를 위한 것이라면, 이는 앞으로 노조 활동에 대한 전반적인 자본의 개입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아무리 결과를 공개해도 자본이 “못 믿겠다”고 하면 끝이다. 자본은 자신이 믿을 수 있도록 거의 모든 노조 활동에 대한 감시를 요구할 것이다. 심지어 모든 총회에 자신이 참관할 수 있도록 요구할 게 뻔하다. 이 상황에서 정상적인 노조 활동은 불가능하다. “교섭의 성사”와 “조합원의 결의”를 쟁의권 발생의 핵심으로 보는 기존 판례조차 뒤집어 질 수 밖에 없다. 회사가 오리발을 내밀기만 해도 그것으로 모든 쟁의행위는 불법이 된다. 아마도 조만간 현실에서부터 자본은 “모든 총회행위”에 대한 공개와 열람을 요구할 것이다. 선거, 투표, 보고대회 등 “투명성 강화”는 곧 자본의 개입을 위한 전초기지 역할을 하게 된다.
두 번째 전초 기지: “해고조건 완화, 해고자 화해제도, 원직복직 대신 돈으로 해결”
이 망할 땅에 합법 파업 따위는 없다. 지노위 중노위에서 이겨봐야 행정소송 가면 뒤집어지게 돼있다. 아마도 합법 파업은 “자본의 이익에 타격을 주지 않는 선”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악법을 투쟁으로 깨뜨리며 싸워왔다. 그래서 투쟁의 선봉에 선 동지들은 해고와 징계를 받기 마련인데 이것 역시 복직 투쟁과 임단협에서 특별합의 혹은 이면합의로 극복해왔다.
그러나 그렇지 않아도 힘든 복직투쟁, 이젠 열배로 힘들어지게 생겼다. 해고하기 쉽고, 복직은 안 시켜도 되고. 이제 자본은 핑계 잡아 해고시키고 버티기만 하면 된다. 복직 투쟁? 그건 돈 더 받으려는 떼쓰기로 몰아세우는 건 일도 아니다. 물론 아직 복직이행 의무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지만 언제 자본이 그런 걸 따졌는가. 자본으로선 이제 자신의 능력껏 핵심 활동가들을 차례차례 제거할 것이다. 물론 한편에서는 이제까지 해왔던 대로 포섭작업을 병행해 나가면서.
결국 이 두 가지 조항만으로도 자본은 노조 활동을 마음 놓고 통제할 수 있게 됐다. 이 땅 노동자의 가장 일반적인 투쟁 기구를 무력화 시킬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대로라면 노동 3권이 사문화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어떻게 투쟁할 것인가?
혹자들은 그래도 싸울 수 있다고 한다. 다른 이는 노조는 어차피 이렇게 되간다고 한다. 어떤 이는 당해봐야 안다고 한다. 그렇다. 다 맞는 말이다. 노동자 투쟁은 어차피 제도를 부수고 권력을 쟁취하는 투쟁이다. 노조는 체제내적 기구인 것도 맞다. 그래서 민주노조란 말 자체가 모순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모두 틀린 말이다. 남한에서 민주노조 운동의 변혁성은 아직도 의미가 있으며, 그걸 떠나 노조라도 있으니 사람흉내라도 내는 현실이다. 그걸 지키지도 못하면서 무엇을 말하겠는가.
로드맵은 자본이 역사를 거슬러 억지로 노조를 파괴하고 노동유연성을 강화하려는 것이다. 마치 노조운동의 한계가 “운명적으로” 온 것처럼 이야기 한다면 그건 틀린 말이다.
현재 민주노총은 총파업을 선언했지만 또 다시 각 정당에 토론회를 요청하고 있으며, “각계에서 ‘로드맵은 아직 무리이다’라고 주장” 따위의 선전을 하고 있다.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다. 이 마당에 정치꾼들과 만나서 무얼 하겠다는 건가!.
물론 총파업은 조직될 것이다. 그러나 그날 관료들이 “투쟁을 접어야 되는 이유”에 대해 다시 연설할 가능성이 충분하다. 우리가 할 일일은 총파업을 관료들과 같이 준비하고 그렇게 시작된 총파업을 반드시 사수해내는 것이다.
최준오 (금속노조 조합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