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핵 실험 소동을 계기로 노동자 투쟁의 쟁점이 가려지고 있다. 노동운동 내 각종 기회주의 세력들 간의 북한 핵 문제를 둘러싼 논쟁으로 계급투쟁의 의제가 뒷전에 밀려나고 있다. 지금 노동자계급은 북한 핵 이전에 로드맵 핵폭탄에 맞아 먼저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인 데도 말이다.
‘사이비 좌파’에서부터 ‘진짜 좌파’를 자임하는 세력들까지 각종 좌파들이 나서서 북한 핵 사태를 둘러싸고 벌이는 현란하고 화려한 논쟁이 과연 당면한 계급투쟁의 질곡을 잠시라도 잊게 해 줄 수 있을까?
북한 핵 실험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입장은 심오한 논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미 제국주의·남한 자본·노무현정권과 투쟁하는 것이다. 북한 지배계급과 그들의 핵 실험을 조금도 지지함이 없이 말이다.
미 제국주의의 북한 고립·압살 책동
노동자계급은 북한을 고립, 압살하려 하는 미 제국주의 책동에 반대하여 투쟁해야 한다. 북한 국가자본주의 체제와 지배 관료들을 방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 제국주의의 세계지배 구도가 타격을 받고 파열구가 나는 것이 남북한 노동자계급을 비롯한 국제 노동자계급의 이익에 일차적으로 부합하기 때문이다. 또한 아프간, 이라크·중동에 이은 미국 자본주의의 전지구적 패권 기도가 한반도에서 좌절되는 것이 남한 노동자계급운동을 비롯한 전세계 노동자계급운동에 무조건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북한 지배·착취체제가 일시적으로 공고화된다 하더라도 미 제국주의의 패권 강화라는 ‘최악’에 비할 때 그것은 단지 ‘차악’일 뿐이다. 또한 한반도와 동아시아에서 미 제국주의의 지배·패권 구도가 관철된다면 남한 계급투쟁 또한 굴절되고, 자유롭게 뻗어나가는 데 난관이 조성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은 미 제국주의 반대투쟁을 남한 자본·정권과의 투쟁과 분리된 채 전개할 수 없다. 당면한 로드맵 반대투쟁·비정규직 투쟁과 동떨어진 별개로가 아니라 이러한 대중투쟁과 결합하여 계급적인 반제투쟁, 노동자계급의 반제국주의 투쟁으로 만들어가야 한다. 현 단계 남한 사회에서 제국주의에 반대하여 일관되게 투쟁할 수 있는 세력은 오직 사회주의 노동자계급 밖에 없다. 현 시기 자본의 공격에 맞선 투쟁을 회피하고서, 계급 대 계급 반자본 투쟁을 비껴가고서 제국주의와 철저하게 투쟁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반제 투쟁: 남한 자본과의 투쟁과 결합되어야
‘북미 대결국면’에서 일차적으로 미 제국주의에 대한 반대에 집중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남한 자본에 대한 투쟁이 묻혀서는 안 된다. 미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이 자동으로 남한 자본에 대한 투쟁이 되는 상황은 이미 옛날 얘기이다. 그것은 남한 자본이 과거 매판자본이던 시절 이야기이다. 남한 대자본을 포함한 총자본은 미 제국주의의 대북 고립·압살 정책을 거슬러 독자적인 행보를 취해 왔다. 김대중/노무현 자본가 정권의 햇볕정책/포용정책이 그것이다.
남한 총자본이 대북정책에서 미 제국주의 지배전략을 거스르는 대북 포용정책을 취한다고 해서 노동자계급은 남한 자본·정권과의 투쟁을 미 제국주의와의 투쟁과 분리하지 않는다. 남한 총자본의 햇볕/포용 정책은 북한을 흡수통일 하여 한반도 전역에서 노동자계급에 대한 착취와 억압을 더욱 강화하는데 궁극적 목적을 두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남한 자본가 정권의 햇볕/포용정책을 지지하고서 일관된 반제국주의 투쟁을 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기만이다. 또한 그 정책의 구체적 표현인 금강산 관광 및 개성공단 사업을 지지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이다.
햇볕정책에 대해 지금 친미보수 세력이 저주를 퍼붓고 있다 하더라도 햇볕정책은 엄연히 현대·삼성·엘지 등 대자본을 포함한 남한 총자본의 대북정책임을 망각해선 안 된다. 김대중·노무현 자본가 정권의 햇볕정책에 깔린 진정한 동기는 ‘민족화해와 협력’이라는 허울을 뒤집어쓰고 북한 개방에 대비하여 남한 자본이 북한 시장을 선점하고 궁극적으로 전체 한반도에서 남한 자본주의의 배타적 우위를 확립하는 데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
남한 자본주의가 한반도에서 자신의 이익에 배치되면서까지 일방적으로 미국의 군사적 헤게모니에 종속되던 시절은 이미 지나버렸다. 남한 자본주의가 미국 자본주의와 이해가 갈릴 때 미국의 세계 패권전략에 순응하기보다 언제든 자신의 이해를 우선시 할 태세가 되어 있다는 기간의 모든 증거(남한 자본주의의 독자성의 증거)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
남한 총자본이 자신의 독자적 이해를 저버리면서까지 미국을 추종하여 미 제국주의의 대북 고립·압살 정책을 지지한다고 보는 것(예컨대 전진에서 노힘, 노정협에 이르는 다양한 좌파들의 인식)은 단순히 남한 자본주의에 대한 불철저한 인식을 넘어 심각한 전술적 오류를 조장할 소지가 있다. 왜냐하면 이런 인식은, 만약 남한 총자본이 자신의 독자적 이익에 기초하여 미국의 대북 고립·압살 정책을 지지하지 않고 반대할 경우(실제로 햇볕정책 고수가 이러한 반대 아닌가!), 남한 자본과의 투쟁은 필요하지 않다는 쪽으로 선회함으로써 미 제국주의 반대 투쟁을 남한 자본과의 투쟁과 분리시키는 기회주의적인 투쟁방향을 불러들일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한 자본이 대북 고립·압살 정책에 반대하고 포용정책을 고수한다고 해서 남한 자본과의 투쟁을 회피하고 ‘고립·압살 반대 인민전선’을 펼 것인가?!
햇볕정책 - 남한 총자본의 대북정책
세계 제국주의 체제는 일국 자본주의라는 고리들로 연결된 사슬이다. 여기서 아무리 미국의 정치적·군사적 우위가 행사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결코 국가 자본주의들 간의 경제적 경쟁과 충돌을 무의미하게 할 만큼 압도적이지는 않다. 미국 자본주의의 경제적 힘과 군사적 힘 사이에는 기본적으로 괴리/불일치가 있다. 부시정권 등장 이래 신보수주의(네오콘) 세력들이 약화되고 있는 경제적 힘을 군사적 힘으로 메우려 안간힘을 쓰지만 여기에는 한계가 있다. 제국주의 세계체제는 정치군사 체제이기 이전에 일차적으로 경제 체제, 국가 자본주의들 간의 대립, 경쟁 체제이다.
미국의 정치·군사적 패권을 일면적으로 인식하여, 그것이 각국 자본주의 간의 대립과 경쟁, 충돌까지 억눌러 팩스 아메리카나(미국에 의한 세계 평정/평화)를 관철하고 있다는 식으로 보는 것은 자국 자본과의 투쟁을 회피하는 카우츠키식의 기회주의적인 초제국주의론의 변종일 뿐이다. 제국주의와 투쟁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자국 자본과 투쟁하는 것이다. 그래서 레닌을 비롯한 혁명주의자들은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즉 국내 계급투쟁으로 전환시켜야 한다고 노동자계급에게 호소했던 것이다.
노동자계급은 외국 자본에 대한 ‘자국’ 자본의 경쟁·투쟁에서 자국 자본을 지지하지 않는다. 따라서 남한 노동자계급은 남한 총자본의 햇볕정책을 지지하지 않는다. 한반도에서만큼은 미·일 자본이든 중국 자본이든 이들 자본에 대항해 남한 자본의 이해가 선차적으로 관철되어야 한다는 남한 총자본의 필사적인 전략구도가 바로 햇볕정책의 토대이자 동인이 아닌가. 그렇다면 [민노당 내 우파 민족주의 세력처럼] 정권·자본의 금강산 관광 및 개성공단 사업을 지지하거나, 혹은 [‘사이비 좌파’ 전진이나 ‘진정한 좌파’를 자임하는 노정협처럼] 이를 지지하는 않더라도 사업 중단에(한나라당 등 보수우익세력이 이를 요구한다고 하여) 반대해야 한다거나 하는 것은 모두 노동자계급의 독자성을 말살하고 총자본의 햇볕/포용정책 지지부대로 전락하는 것이다.
노동자계급은 햇볕정책에 대한 찬반 논리에 갇혀서는 안 되며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 노동자계급은 미 제국주의의 북한 고립·붕괴 책동에 반대하지만, 그러한 반대투쟁이 햇볕정책이나 금강산 관광 및 개성공단 사업에 대한 지지 (또는 사업중단 반대)로 이어져야 할 이유가 없다. 노동자계급은 남한 자본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북한 노동자계급을 비롯한 국제 노동자계급의 이익을 위해서 미 제국주의의 패권 기도에 반대한다. 또한 남한 총자본이 두려워하는 북한 붕괴를 막기 위해서가 아니라 북한에서 계급투쟁의 자유로운 발전이 왜곡, 말살되는 것을 막기 위해 반대한다.
‘북·미 대결 국면’에서 혁명적 사회주의자의 태도와 전술은?
끝으로, 노동자국가는 핵무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당연히 핵무기에 반대한다. 혁명적 사회주의는 국제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투쟁을 지원하고 조직하여 혁명을 확산시키는 것이 백배나 더 강력한 무기임을 항상 분명히 해왔다. 강성대국을 추구하는 북한 국가자본주의 관료들은 미 제국주의에 맞서 일관되게 싸울 수가 없다. 이라크의 훗세인이나 이란의 아마디네자드 같은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은 일정 시점에서 제국주의 반대투쟁을 주도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이 투쟁을 자신의 자본가 국가를 강화시키는데 종속시키며, 따라서 결국에는 제국주의 세력과 타협, 협력한다. 마찬가지로 북한 국가자본주의 관료들은 제국주의 세계체제 그 자체에 반대해서 싸우지 않는다. 단지 그 세계체제 안에서 독립적인 자본가 국가(강성대국)로서의 지위를 확보하기 위한 갈망 속에서 제국주의에 반대할 뿐이며, 따라서 ‘체제 인정’만 주어지면 언제든 제국주의와 협력할 수 있다.
오직 사회주의 노동자계급만이 진정으로 일관된 반제국주의 세력이다. 이를 망각하고 국가자본주의 관료 등의 부르주아 민족주의 세력에게 사회주의적 색채를 입혀주어서는 안 된다.(전진이 입혀주고 있는 “국가사회주의”라는 버전이든, 또는 노정협 이 입혀주고 있는 “관료적 사회주의”라는 버전이든, 북한체제를 모종의 사회주의라고 선전하는 것은 향후 남북한 노동자계급의 투쟁에 심각한 해악을 끼칠 것이다. 이러한 해악은 현재 ‘북미 대결국면’에서의 전술적 오류로 인한 위험성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심각할 것이다.)
추가로, 노동해방연대가 취하고 있는 태도처럼, “큰 강도”든, “작은 강도”든 노동자 정부가 아닌 한에서 미국과 북한은 마찬가지 ‘강도’이며, 따라서 어느 편이 이기든 상관없다는 태도는 노동자계급의 태도가 아니다. 그것은 보통 무정부주의자들이 취하고 있는 노선으로서,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이러한 노선을 언제나 거부해왔다. 자본주의 세계체제 속에서 제국주의 미국이 억압적이고 반민중적인 제3세계 국가와 대결할 때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어느 편의 승리가 세계 노동자계급의 이익에 덜 해로울 것인가?” 어느 편이 승리하든 결과는 모두 악이지만, 그래도 어느 것이 차악인가? 이 기준이 ‘북미 대결’에서도 적용된다. 최강 제국주의 강대국으로서 전지구적인 자본주의 착취·지배 관계를 유지 보존시키는 것이 미국의 역할이라고 할 때 답은 자명하다. 북한 억압 정권의 일시적 강화를 가져온다 하더라도 북한이 승리하고 미국이 패배하는 쪽이 명백히 차악이다!
그러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미국의 패배를 위해 투쟁한다고 해서 북한 체제의 계급적 성격과 북한 지배계급의 반노동자적인 ‘강도’적 범죄들을 감추어야 하는가? 아니다!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의 ‘중단 없는 연속혁명 이론’은 노동자계급이 미국의 패배를 위해 투쟁하면서도 억압적인 부르주아 관료지배체제의 타도를 준비하는 데 조금도 지장 받을 필요가 없음을 가르쳐 준다.
물론 미국의 패배는 억압적인 지배체제를 당장은 강화시킬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이 남북 노동자계급을 비롯해 세계 노동자계급의 이익에 덜 해로운 ‘차악’임을 인정해야 한다. 이 ‘작은 강도 - 큰 강도’ 대결 구도는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주어진 이 국면에서는 선 대 악의 선택이 아니라, 단지 차악과 최악 사이의 선택만 있을 뿐이다.
국면 자체를 우리가 가려 취할 수는 없지만, 주어진 국면에서 차악과 최악을 가려 취할 수는 있다. 국면을 초월한 추상적 선전에서는 차악이든 최악이든 다 악일 뿐이라고 규탄하고, 오직 “노동자 정부의 건설”만이 최선임을 내세워 차악과 최악 둘 다 기각해도 괜찮다. 그러나 주어진 (최악과 차악 이외에 다른 선택의 길이 없는) 국면에 대응하는 정치활동에서는 반드시 선택해야 하며, 최악을 피해 차악을 택해야 한다.
큰 강도 미국의 패배는 작은 강도 북한 지배계급을 일시적으로 강화시킬 것이다. 그러나 더 큰 차원에서 볼 때 미국의 패배는 전지구적인 착취 ․ 지배관계를 약화시키고 대중투쟁의 공간을 더 크게 열어줌으로써 북한과 남한 모두에서, 그리고 국제적으로 계급투쟁의 활성화라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양효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