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트로이카』는 1930년대부터 1945년 8·15 ‘해방공간’까지의 대표적인 국내 콩그룹이었던 이재유그룹과 그 출신들의 활동을 실록 역사소설 형식으로 쓴 것이다. 안재성이 『경성트로이카』를 2004년 8월 출판한 이후 상당수의 노동자들이 읽고 더러는 나름대로 감동을 받기도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아름다운 장미꽃에 정신이 홀려 날카로운 가시에 찔려서 피를 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변절자들의 부르짖음 :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다”
『경성트로이카』 작가 자신과 그것을 쓸 수 있도록 증언해 준 70여 년 전의 경성트로이카 성원이었던 이효정은 공교롭게도 두 사람 다 노동자운동이나 사회주의운동을 하다가 중도에서 그만 둔 문학가들이다. 『경성트로이카』 작가는 1990년대 당시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소련과 동독 등의 붕괴로 일어난 전망의 불투명으로 인하여, 이효정은 1930년대 후반기부터 ‘더 이상 도피와 고문의 공포 속에 살고 싶지 않다’는 이유 등으로 노동자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을 각각 그만 두었다. 이들은 노동자운동이나 사회주의운동을 그만 두는 것에 그치지 않고 도를 지나쳐 자신들이 한때 몸담았던 또는 지지했던 사회주의를 비난하는 데 열을 올렸다.
『경성트로이카』 작가는 이 소설의 서론격인 책의 앞부분에서, 누가 묻지도 않았음에도,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다. 노동운동을 하던 시절에 사회주의 이론을 공부해 본적도 있지만, 결국은 현실성 없는 공허한 사상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북한을 비롯해 동구 사회주의 여러 나라들에서 공통적으로 일어난 민중의 고통은 단순히 실천 과정에서 생긴 오류가 아니라 사회주의 이론 자체의 근본적인 한계, 인간의 본성과 요구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생긴 원천적인 문제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자유와 민주라는 대원칙이 없이는 어떤 이상도 성공할 수 없다는 결론이었다”고 말했다. 이효정도 “지금 와서 살펴보면 사회주의는 현실에 맞지 않지요. 비현실적이에요” “이제는 사회주의자가 아니에요. 이젠 아니에요”라고 강조했다. 그들은 자기들이 알고 있는 사회주의만이 사회주의의 진실인양 착각하면서, 또 한발 나아가 “자본주의는 인류가 자연스럽게 선택한 합리적인 제도”라고 하여 자본주의야말로 인간의 본성과 요구에 맞는 자연스러운 현실적인 제도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계급에 의해 억압당하고 착취당하는 노동자계급의 계급적 모순관계를 은폐하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그가 되었다.
작가가 『경성트로이카』를 쓴 것은, 고양이 쥐 생각하듯이, 경성트로이카를 비롯한 국내 사회주의운동이 ‘일제에 저항한 유일한 독립운동’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이북국가 내지 이남국가로부터 대우받지 못한 것을 위로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러나 경성트로이카의 운동 목표는 이재유가 말했듯이 공산주의 사회 수립이었고, 일제로부터의 독립운동은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에 불과했다. 따라서 우리가 그들을 진정으로 위로하려면 사회주의운동의 목표를 독립운동으로 한정 지어서는 안 될 것이며, 노동자와 민중을 억압 착취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자본주의 사회와 국가를 극복하는 반자본주의적 사회주의혁명을 통해서 공산주의 사회를 실현하기 위하여 투쟁하는 것이 맞다.
사회주의운동의 등장 배경 :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관계
작가는 『경성트로이카』에서 사회주의운동 내지 노동자운동이 등장한 가장 중요한 배경인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관계를 소설적으로 형상화 해내지 않았다. 작가는 당시의 원산총파업 등과 같은 크고 작은 다양한 노동자운동에 대해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재유가 18살에 스스로 “사회주의자라고 선언”하게 된 것은 『유물사관』 등 사회주의 입문서적 학습의 결과였다. 또한 동덕여고생인 박진홍, 이순금, 이효정 등도 주로 독서회에서 사회주의 학습을 통해 사회주의자가 되는 것으로 그렸다. 민족주의자였던 이관술은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 이후 “민족주의자들이 보여준 준비론적이고 우유부단한 태도에 실망해서 사회주의자가 되었다”고 보았다.
또한 작가는 『경성트로이카』에서 일제시대와 ‘한국전쟁’ 이후의 자본주의 문명에 감탄하고,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순응하는 한국인의 수동적인 모습만 그렸다. 그러나 작가는 자본주의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모순의 심화, 이에 따른 자본과 노동의 계급투쟁 양상과 그 가능성을 드러내지 않았다. 식민지시대 노동자운동사에 관한 글들을 한번 훑어보기만 해도, 일제의 침략전쟁 이후에도 노동자들이 파업, 태업, 도망, 기계파괴, 폭파 등으로 반제반전 투쟁을 벌였고 이것이 일제의 제국주의 침략전쟁의 패퇴를 앞당기는 데 기여했음이 역사적 사실임을 알 수 있는데도 말이다.
일제로부터 민족독립 : 공산주의사회 수립 위한 한 과정
1927년 2월 결성된 신간회는 일제에 비타협적인 부르주아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민족독립을 위한 협동전선이었다. 그런데 1929년 11월 일어난 광주학생운동에 연루되어 비타협적 민족주의자 등이 대거 일제 경찰에 검거되었다. 그 틈을 타서 일제에 타협적인 부르주아민족주의 즉 민족개량주의자들이 신간회 본부 등에 침투하여 신간회의 본래 목적을 무색케 했다.
타협적이든 비타협적이든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의 최종 목적은 민족독립과 자본주의 국가 수립이었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들의 최종 목적은 공산주의 사회 수립이었고, 민족독립은 그것을 위한 하나의 과정에 지나지 않았다. 이재유는 일본인 검사 앞에서 “나의 근본 사상은 조선에 공산주의 국가를 만드는 일”이고, “내가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일제로부터 조선이 독립하지 않은 이상 언제까지나 조선은 공산주의 국가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당당히 말했다. 따라서 『경성트로이카』 작가가 경성트로이카 운동을 한갓 “일제에 저항한 독립운동”으로만 제한하는 것은 당시 사회주의자들의 염원을 짓밟고 욕보이는 것이다.
국내 사회주의운동의 주력 : 경성트로이카와 그 출신들
『경성트로이카』 작가는 1930년대 이후 국내 사회주의운동의 핵심을 경성트로이카 → 경성콩그룹 → (재건)조선공산당 등으로 보고, 핵심 안에서 주력은 경성트로이카 출신으로 보았다. 이러한 파악은 인적인 측면에서는 대체로 맞으나, 운동노선의 측면에서는 옳지 않다. 경성트로이카 출신이 1939~1941년의 경성콤그룹의 최고지도자로 국제파인 박헌영을 추대한 것은 이재유의 운동노선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경성트로이카 출신이 박헌영을 추대하는 방식으로 당시 공산주의 운동전선을 통일하는 방법은 이재유의 ‘공동투쟁’을 통한 대중적인 통일방식과는 다르다. 이에 앞서 1937년 후반기 조선공산당재건경성준비그룹 시기의 공원회 등과 경성트로이카 출신 사이에 드러난 운동노선 차이도 간과할 수 없다. 공원회 등은 정세나 경제위기 자체가 대중의 혁명적 궐기를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보는 정세결정론이나 경제결정론의 관점에서 운동방침을 내세웠다. 이는 이재유가 일제에 대한 투쟁과정에서 새로운 정세를 창출하여 계급 역관계를 변화시키려는 운동방침과는 다르다. 1945년 8·15 이후 박헌영 등의 조선공산당도 역시 계급 역관계를 투쟁을 통해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변화시키려 하기보다는 외부의 힘에 의하여 조성되는 정세에 대응하는 수동적인 운동방침을 강조했다.
미군점령 : “미군은 해방군”
『경성트로이카』 작가는 사회주의자들이 1945년 8·15 이후 38선 이남지역을 점령하는 “미군을 해방군으로 인식하여 환대”하게 된 경위를 비판적으로 서술하지 않았다.
국제공산당(코민테른)은 1935년 제7차 대회에서 자본과 노동의 계급협조 노선인 반파쇼인민전선 노선을 채택했다. 이에 따라 제2차 세계대전에서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 등과 소련은 연합전선을 형성했다. 식민지에서는 반제민족혁명전선으로 응용되었다. 이것은 사회주의자들의 민족부르주아지에 대한 투쟁을 억제하는 것을 의미했다. 자본주의 최악의 권력형태인 파시즘에 대한 투쟁에 힘을 집중하여 세계자본주의를 구하려는 것이었다. 문제는 이런 인민전선 노선 또는 반제민족혁명전선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계급의 주도권을 확보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오히려 자본가계급의 우려를 없애려고 혁명적 대중 조직운동을 중단하고, 1943년에는 코민테른마저 해산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마자 미국은 사회주의자들의 이런 계급협조 노선을 더 이상 이용할 필요조차 없다고 여겨 ‘협조’를 파기하고 노동자계급에 대한 계급전쟁을 감행했다. 38선 이남지역에서는 조선인민공화국과 노동자 공장관리운동에 대한 탄압 등으로 나타났다. 그런데도 국내 사회주의자들은 1947년 8월 미군정이 공산주의자들을 폭력 탄압하는 일종의 ‘반공쿠데타’를 감행할 때까지 미국을 ‘진보적 민주주의국가’로 규정하고 계급협조노선에 매달렸다. 이상이 38선 이남지역을 점령한 미국의 군대를 해방군으로 인식하도록 했다.
38선 이북지역에서 권력을 잡은 공산당과는?
38선 이북지역에서 권력을 잡은 공산당은 국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론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를 실천하는 노동자계급의 전위조직과는 관계가 없었다. 38선 이북의 공산당은 김일성 등이 만주에서 노동자대중으로부터 유리되어 활동했던 군대조직과 무장투쟁을 지휘한 군인 출신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이재유 등의 ‘트로이카’ 조직의 운영방식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방적으로 지시를 하거나 명령을 전달하지 않고 토론과 설득으로 합의를 이끌어내는 방식을 택했다.” 또한, “하부조직도 마찬가지였다. 상부모임 구성원이라 해도 보안을 유지하기 위한 조치들 외에 하부조직원에 대한 명령권 같은 것은 갖고 있지 않았다. 상부모임에서의 이재유의 역할과 마찬가지로 토론을 주재하고 결론을 도출하고, 자기 자신도 이에 따랐다.” 그런데도 『경성트로이카』 작가는 이재유 등과 같은 사회주의자들의 활동방식을 군인 출신 김일성 등이 권력을 장악한 38선 이북사회의 운영방식과 같은 것으로 간주했다.
혁명들 : 연속혁명·반(半)혁명·반(反)혁명
이재유는 1937년 6월에 쓴 「조선에서의 공산주의운동의 특수성과 그 발전의 능부」에서 사회주의자들의 지도로 일제로부터 민족독립을 성취함과 동시에 프롤레타리아혁명을 신속하게 전개해야 한다는 ‘연속혁명’을 주장했다. 이러한 이재유의 혁명노선을 『경성트로이카』 작가는 무시했다.
1945년 8·15 해방은 사회주의자들이 주체적으로 획득하지 못한 불안한 것이었지만, 조선인민공화국과 지방인민위원회를 주도적으로 수립했다. 이것은 ‘반(半)쪽 혁명’이었으며, 혁명의 시작일 뿐이었다. 따라서 사회주의자들은 혁명을 완성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창조성을 발휘해야 했다. 그들은 번개 같이 신속하게 패퇴한 일제의 국가기구와 무장을 해제했어야 했다. 나아가 그들은 지주와 자본가들이 소유한 생산수단을 사회화하고 그것을 노동자계급의 이익을 위하여 노동자계급 스스로가 관리 통제하도록 했어야 했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들은 혁명을 완성하는 투쟁을 벌이는 것 대신에, 전쟁기간에 적용했던 계급협조노선인 반파쇼인민전선을 전후의 변화된 정세 속에서도 여전히 이어받아 미국의 38선 이남지역에 대한 군사적 점령을 ‘해방행위’로 규정하고 환영했다. 호랑이가 집안으로 들어오도록 문을 활짝 열어놓은 것과 같았다. 이렇게 사회주의자들은 반쪽혁명에서 머물러 있었다. 이것은 혁명의 무덤을 파는 것이었다.
이러한 반(半)쪽 혁명은 미군정과 부르주아들의 ‘반(反)혁명’으로 귀결되었다. 그것은 계급협조노선에 얽매어 사회주의자들이 일제로부터의 민족독립과 동시에 신속하게 노동자혁명으로 나아가는 연속혁명을 실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제하 사회주의운동사 : 역사적 횃불
경성트로이카나 이재유 등의 국내 사회주의운동은, 『경성트로이카』 작가가 함부로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쉽사리 사람들한테 “의미 없이 잊혀져 버려지”거나 또는 “사라져 버려질” 정도에 지나지 않는 가벼운 역사적 에피소드가 아니다. 『경성트로이카』라는 소설이 씌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그냥 역사 속에 묻혀버릴 만큼 사람들이 그 일에 대해 모르는 것도 아니다. 선진노동자들 사이에선 이미 경성트로이카나 이재유에 대해 아는 이들도 많다. 다만 더러 왜곡되게 알고 있어서 문제이긴 하지만 말이다.
『경성트로이카』 작가가 단순히 과거 한 때의 열정적인 사람들의 이야기 정도로 전하고 싶어 한 경성트로이카나 이재유 등의 국내 사회주의운동은 오늘의 우리와는 상관없는 지나간 이야기가 결코 아니라, 지금도 우리 노동자들의 미래 사회를 안내하는 빛나는 역사적 횃불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오늘날도 여전히 제국주의 지배와 자본주의의 억압·착취에 반대하고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노동자들이 사회주의운동의 역사적 경험과 유산을 알고 싶은 갈망을 끊임없이 분출하고 있는 한 말이다.
안태정 (역사학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