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속에 이어 공공에서도 지도부들은 어김없이 ‘묻지마 산별’을 밀어붙이고 있다. 산별건설 논의는 오직 연맹 및 단사 지도부들 차원에서만 오갈 뿐, 조합원들은 이러한 상층 논의에서 철저히 소외되고 있다. 조합원들은 한 두 차례의 일방적 교육을 받고 조직형태 변경투표에 참가하는 것 외에 의견 상향 수렴과정 없이 일단 산별부터 만들어놓고 보자는 지도부들에 의해 그냥 ‘묻지 말고’ 따라만 올 것을 강요받고 있는 상황이다.
“투쟁을 통한 산별”은 어디 가고 ‘묻지마 산별’만
공공연맹이 결의한 “투쟁을 통한 산별전환”은 어디로 가 버리고 이렇게 ‘묻지마 산별’만 남은 것인가? 연맹이 산별로 가기 위한 공동투쟁으로 잡아 놓은 “7월 총파업”은 구호로만 존재했을 뿐, 연맹과 산하 대사업장 지도부들은 약속이나 한 듯 거의 모두가 7월 공동투쟁을 스스로 사보타지 했다. 그렇게 한바탕 ‘7월의 말잔치’를 끝내자마자 곧 8월 산별기획단 가동에 이어 9월 대대로 직행, 공공산별노조(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이제 11월 30일 공공산별 발기인대회를 바로 눈앞에 둔 지금은 어떠한가? 민주노총의 총파업, 총궐기투쟁 지침 아래 동지들이 구속 수배 등 자본의 무자비한 탄압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도 연맹과 산하 대사업장 지도부들은 이에 아랑곳없이 오직 ‘투쟁 없는 산별’의 한 길로만 가고 있을 뿐이다. 이것이 그토록 외쳐왔던 공공산별의 실체란 말인가?
지난 11월 15일 산별전환을 통과시킨 철도노조 김영훈 집행부가 24일 서둘러 합의한 임금 잠정합의를 보면, 공공산별의 참담한 실체를 또 한 번 접하게 된다. 임투 국면에서 쟁의행위 결의보다는 산별전환에 총력을 기울인 김영훈 집행부는 저조한 쟁의행위 가결율을 핑계로 투쟁을 피하기 위한 기만적인 잠정합의를 도출했다. 산별전환을 독려할 때는 “계급적 단결”을 외치더니 정작 구체적으로 계급적 단결의 과제가 걸린 KTX 투쟁, 새마을호승무원 투쟁, 비정규직(직고용 계약직) 임금요구안 등을 철저히 배제한 채 합의서를 작성하고, 투쟁을 종결해 버림으로써 비정규직노동자들에게 공사의 탄압 한가운데 홀로 설 것을 강요하고 있다.
또한 노사관계 로드맵, 비정규 개악 저지투쟁의 정점에서 발을 빼버림으로써 전체 노동자 투쟁에 찬물을 끼얹었다. 무엇보다도 함께 운수산별을 결의한 화물연대가 12월 1일 총파업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쫓기듯이 그 같은 굴욕적인 잠정합의를 해버린 것을 보면 도대체 왜, 무엇을 위해 산별을 만들려고 하는 건지 참담한 심정을 지울 수 없다.
투쟁회피 지도부들, 산별노조가 되면 달라지나?
공공산별 전환을 제1착으로 성사시킨 사회보험 김동중 집행부는 현재 조합원들이 자발적으로 저지투쟁에 나서고 있는 4대보험 통합징수공단 설립에 대해 이를 사실상 수용하는 [노정합의(안)]을 최소한의 민주적 의사수렴 과정도 없이 밀실 체결했다. 그리고 이를 강행처리하는 과정에서 앞장서서 정부의 구조조정 정책에 대한 찬성을 종용하는 전도사로 아예 나서고 있는 실정이다.
10월말 도시철도노조 김남일 집행부가 대의원대회에 상정된 비정규직노동자들의 조합 가입 결의안을 앞장서서 부결시켰다는 사실을 연맹 지도부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연맹은 산하 대사업장 집행부의 이러한 계급적 단결을 파괴하는 반노동자적 작태를 묵인하고 있다. 연맹 산하의 두 번째 큰 사업장인 서울지하철노조 정연수 집행부는 또 어떤가? 10월말 잠실운동장에서 노사한마당 체육대회를 개최하면서 “지금은 투쟁할 때가 아니다”라고 당당하게 선포했다. 노사관계 로드맵과 비정규개악 저지투쟁에 나서고 있는 동지들의 등에 대고 비수를 꽂은 것이다. 이런 작태가 버젓이 행해지고 있음에도 연맹 지도부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오직 공공산별만 반대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반노동자적 행위도 문제 되지 않는다는 식이다.
공공산별의 참담한 실체는 이렇게 곳곳에서 그 암울한 몰골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조건에서 만들어지는 공공산별이 과연 어떻게 “투쟁하는 산별”이 될 것인지 그 누구에게도 확신을 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내일 30일 발기인대회를 통해 그 출범을 눈앞에 두고 있다. 12만 명의 초대규모 노조를 만들겠다면서 지난 9월 산별노조 설립을 결정하는 대의원대회에서는 규약안과 강령안조차 내놓지 못한 것에 대해 대의원들의 비판이 쏟아졌지만, 지도부는 관료적이고 형식적인 답변으로 일관했다. ‘다른 것 묻지 말고’ 교섭권과 쟁의권만 중앙으로 몰아달라는 것이 대대에서 지도부들의 주문사항이었다. 그러다보니, “이렇게 공동투쟁의 경험 한 번 제대로 축적해내지 못하고 투쟁의 동질성조차 확인하지 못한 채, 인위적으로 졸속안을 만들어 교섭권과 쟁의권 집중부터 해보자는 노조통합이 가당한가.”(사회보험 현장회)라는 현장으로부터의 비판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현장공동화를 조장하는 규약(안)
발기인대회를 앞두고 최근 나온 규약(안)을 보면, 우려한 대로 교섭권/쟁의권 관련 대목에서 상층관료화와 현장공동화를 가져올 독소조항들이 집중되어 있다. 교섭권/쟁의권/체결권이 모두 중앙에 있고 사업장 현장 단위에는 임금․ 단협 교섭권/ 쟁의권이 박탈되어 있다.
먼저, [제7장 단체교섭과 쟁의] 부분에서 ‘권한’ 관련을 보면, 교섭권을 지역본부장과 업종본부장에게만 위임할 수 있다고 하여 사업장지부 등 현장 단위에는 사실상 교섭권 위임을 금지하고 있다. 이 조항은 규약안 중 단위사업장 ‘노사협의회 권한’ 부분으로 가면 그 독소조항적 성격이 보다 분명하게 명기되고 있다. 임금과 단체협약에 관한 사항은 위원장 동의 없이 “사업장지부 노사협의회에서 다룰 수 없다”고 못 박고 있는 것이다. “위원장 동의 없이”라는 전제를 달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사업장지부에 교섭권 위임을 금지해 놓고 있는 상황에서 사업장지부 단위가 임금과 단협 관련 교섭을 하는 것에 산별 중앙이 쉽게 동의를 해 주겠는가. 그럴 것이라고 예상하기는 어렵다.
이렇게 볼 때 산별 중앙교섭을 통해 체결한 기준협약을 넘어 사업장교섭을 통해 임금․ 단협상의 추가적인 요구들을 쟁취하고 현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이중교섭/이중파업은 사실상 금지되거나 매우 어렵게 된다는 것이다. 대사업장 이기주의를 막기 위해 사업장 단위에 교섭권 부여를 금지한다고 주장하지만, 현실에서는 보건의료노조 산별협약 10장 2조에서 보듯 현장 단위에 대한 관료적 지배력을 강화하고 하향평준화를 강요하는 독소조항으로 작용할 뿐이다.
지도부들은 보충교섭 형태로 사실상 이중교섭을 허용하고 있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렇다면 규약으로 사업장지부 단위에 교섭권 위임을 금지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사업장 현장 단위에 교섭권/쟁의권을 부여하여 이중교섭/이중파업을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그것이 활성화되도록 하는 것이 자본에게는 훨씬 더 타격이 되지 않겠는가. 자본에게 타격이 되는 것은 우리에게는 무조건 유리한 일이 아닌가. 여기서 지도부들은 ‘그럴 거면 산별 왜 하느냐. 그냥 기업별노조를 하지.’라고 반문할지 모르겠지만, 중요한 것은 산별체계 완성이라는 형식이 아니라 투쟁의 활성화이고, 쟁취 수준의 상향화이다. 현장 단위의 투쟁과 산별 전체의 통일적인 투쟁, 지역지부 단위에서의 투쟁이 서로 맞물려 상승 강화하면서 전체적으로 투쟁이 활성화되고, 그 속에서 기준협약의 요구와 수준을 끌어올리고 확장시키는 것이 중요하지, 산별체계의 완성이라는 형식에 사로잡힐 일이 아니다. 무엇을 위한 산별인가? 산별 그 자체를 위한 산별인가?
사업장 현장 단위에 교섭권 위임을 금지하는 이 조항은 그 애초 취지가 무엇이든 간에 결국은 이중교섭/이중파업을 제도적으로 봉쇄하고 중앙교섭만으로 끝내려 하는 자본의 요구에 순응하는 것이며, 교섭비용이 줄어듦을 실증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자본을 설득하여 산별중앙교섭을 성사시켜야 한다는 박태주 같은 친자본 이론가들의 제안에 호응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현장공동화를 막을 수 없고, 오히려 공동화를 가속화 하는 길이다. 자본이 제일 성가셔 하는 게 노동자의 현장권력이듯, 자본이 제일 반겨하는 게 현장공동화 아니겠는가. 노사관계 로드맵이 파업권을 말살하려 한다고 외치면서 막상 산별노조 규약으로는 사업장 단위의 교섭권/ 쟁의권을 스스로 제약하는 안을 제출한다면 이 얼마나 모순인가. 이는 결국 사업장 현장 단위의 투쟁과 파업을 산별노조가 보호해 주지 않는 법외파업/ 비공인파업으로 내모는 것이며, 탄압에 방치시켜 놓는 것이다.
“산별체계 완성”인가, 현장투쟁 활성화인가?
이중교섭/이중파업을 적극 장려해야 할 상황에서 이를 금지 내지는 제약하는 이 독소조항은 지난 11월 23일 금속완성대대에서도 ‘산별체계 완성’에 집중하는 세력들에 의해 다음과 같은 문구로 관철되었다. “<60조 3항> 기업 교섭단위에 교섭권을 위임할 수 없다.” 현안문제에서만이 아니라 임금․ 단협 내용에서도 사업장 단위에 교섭권/쟁의권이 부여되어야 한다고 우리는 주장한다. 단순히 보충교섭을 넘어 필요하면, 관료화된 산별노조의 지침을 거부하고 독자적으로 임단투를 전개할 수 있어야 한다. 보건의료노조 중앙에 맞선 서울대병원지부의 투쟁이 단순히 보충교섭의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대립하는 두 가지 운동 정신의 문제가 아닌가.
사업장 단위의 임금․ 단협 교섭권 위임 금지와 쟁의권 박탈은 지도부들이 갈구하는 ‘산별체계 완성’에 필수 요건일지 모르지만, 노동운동 말살 내지 길들이기를 염원하는 자본에게는 최고의 헌상품이 될 것이다. 금속에서 일단 패배했지만, 공공에서 현장투쟁을 활성화하고 현장권력을 쟁취, 강화하고자 하는 대의원, 현장활동가들은 반드시 이 독소조항을 폐기시키고, ‘현장 단위의 교섭권/쟁의권 보장’을 기필코 쟁취하자.
양효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