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동당이 사회연대 전략의 “첫 단추”라며 소득연대 전략을 내놨다. 다음 대선까지의 구체적인 추진 일정까지 내놓고, 권영길 의원이 직접 발로 뛰며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사람들을 만나 설득작업에 들어갔다. 사회연대 전략에 드라이브를 건 셈이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의 목표와 계획은 모두 해내기 쉽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노동자계급의 해체를 가져 올 수 있어 문제이다.
신자유주의 공세 하에서 형성되고 있는 노동과 자본의 투쟁전선은, 정규직의 지키기 투쟁과 비정규직의 되찾기 투쟁의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규직(고소득) 노동자의 참여를 통해 비정규직(저소득) 노동자의 어려움을 구제하는 것은, 이미 형성된 전선을 파괴하는 것이다. 전선이 없으면 투쟁이 없고, 투쟁이 없으면 단결할 수 없다.
물론 정규직 비정규직이 양 갈래의 전선에서 싸운 까닭에, 지난 3 년여에 이르는 사내하청 투쟁 속에서 정규직 비정규직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심지어 어떤 동지들은 정규직을 적으로 규정하기도 할 정도이다.
그러나 이렇게 정규직 비정규직 간의 골이 깊어진 이유는 소득 격차 때문이 아니다. 정규직의 배신 때문이다. 보수화된 정규직 노조는 비정규직 투쟁을 통제하려 했다. 이 통제에서 벗어나는 순간 최소한의 연대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키기 투쟁의 한계, 보수화된 조합원들, 자본의 악 선동으로 마치 “같은 파이의 조각”을 놓고 다투는 듯한 묘한 긴장 관계가 정규직 비정규직 사이에 형성되어 있었고, 이는 “정규직 정서”란 말로 합리화됐다.
그런데 민주노동당이 내건 소득연대 전략 역시 “같은 파이의 조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 파이 조각을 비슷하게 만든다고 정규직 비정규직 사이의 골이 극복이 될까? 천만의 말씀이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이 골은 소득 격차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돈으로 메울 수 없다.
“같은 파이의 조각”이란 허상을 깨지 않는 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갈등은 사라지지 않는다. 결국 민주노동당의 사회연대 전략은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진 셈이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채 옷을 다 입고 난 후에 “벌거숭이보단 나아”라고 말하는 어리석은 자기기만은 민주노총 이수호 집행부와 현 조준호 집행부로 충분하다.
더욱 더 심각한 문제는 민주노동당 스스로도 “우리와 현실이 전혀 다른 서구의 모델”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사회연대 전략을 제출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그 모델은 실패했다.”라는 언급은 뒤로 빼놓는다. 한마디로 “조건이 되는 곳에서도 실패한 걸 조건도 안 되는 데서 해보자.”는 것이다. 이런 공상과학소설보다 차라리 "소련 전설"의 모방이 더 그럴 듯 하다. 어차피 상상력을 동원해서 내놓은 전략이니 나 역시 상상력을 동원해서 이 정책의 결과를 그려본다. 아마도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거나, 나치즘에 가까워질 것이다. 불황에, 소득 격차에, 어설프게 사회주의 흉내 내면서 국가 역할을 강조하면 웬지 나치즘에 더 가까워질 것 같아서이다. 물론 나의 상상일 뿐이다.
그런데 민주노동당이 이런 황당한 사고를 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민주노동당은 다 알다시피 노동운동 상층 내 좌우파의 전선체가 국회 입성을 위해 만든 당이다. 민주노총을 모반으로 태어났다곤 하지만 그것만으로 계급 정당이 될 수 없음은 9.11 야합, 비정규직 악법 통과를 전후한 민주노동당의 행보만 봐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 민주노동당은 반성은 고사하고 더욱더 당 주도의 운동을 외치고 있다. 지향도 다르면서, 당 주도의 운동을 외치는 건 좌우파 관료들 모두 “당의 역할”에 방점을 찍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정파들이 서로 다른 생각으로 “민주노동당 입당 전술”을 채택했지만, 그 그릇이 커지고 주도권이 강화되길 원하는 것이다.(실제로 많은 정파들이 민노당을 [자신들의] 당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좌파는 당내 투쟁을 통한 당 건설-재창당을, 우파는 [그들의] 당의 지도를 관철하기 위한 수단으로 민주노동당을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지향점이나 전선 강화를 위한 안이 아니라 역할 강화, 주도성 강화를 위한 안이 전략으로 채택되게 된다. 아니 연구 과정이나 고민 자체가 이런 위상 강화에 방점이 찍혀 있으니 결과도 그런 것이다.
그래서 이 정책의 기대효과로 ① 복지. 공공부문의 실제 확대 ② 당. 노동운동의 정치적 주도성 발휘 ③ 당 주도의 2008년 대선 의제 형성을 꼽는다. 첫 번째 항목인 복지 공공부문의 실제 확대는 언뜻 보면 “사회주의 개량”인 듯 보이지만 “노동자 계급의 선도적 참여-결국 양보”를 통해 이루려 한다는 점에서 노무현정권의 선전선동과 그리 다를 게 없다. 나머지 기대효과는 봐서 알겠지만 “주도”성에 방점이 찍혀있다.
기대효과, 즉 어떤 문제를 풀기 위한 것이 정책이라고 할 때 그 정책의 본질은 기대효과와 실제 효과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민주노동당의 사회연대 전략의 본질 역시 마찬가지이다.
“주도하기 위한” 정책을 내고 주도하려 노력하는 것만으로 민주노동당의 정책에 문제가 있다고 이야기 할 순 없다. 주도하려는 것은 모든 운동의 속성이며, 본질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런 주도성에 대한 고민이 없으면 쉽사리 아마추어리즘에 빠지거나, 정세는 읽되 사람은 읽지 못하는 오류를 범하기 때문에 “주도성 추구”는 중요한 덕목이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에게 필요한 것은 주도성을 쫓다 계급성을 잃어버리는 당이 아니다. 노동운동 내에서 “노동자 참여” “사회적 합의” 따위를 금기시 하는 것은 막연한 관성이 아니라, 노동자계급 투쟁, 사회주의 혁명 투쟁 과정에서 얻은 소중한 경험들이다. 즉 넘어야 할 벽이나 장애물이나 아니라 이정표이며 나침반인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노동자계급 당은 때론 개량을 주장하고 개량적 행동을 할 수도 있으며, 유연한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나 분명한 지향점과 원칙, 그리고 계급성이 없다면 더 이상 노동자계급 당이 될 순 없다. 민주노동당의 사회연대 전략이 바로 주도성과 계급성을 맞바꾼 사례이다.
민주노동당을 왜 만들었는지 묻는 것은 진지한 당원들에 대한 실례이다. 그래서 묻는다. 왜 아직도 민주노동당에 남아 있으며, 그 이유와 자신의 실천이 노동자계급의 해방에 도움이 되고 있는가?
이 글을 쓰기 전, 민주 노동당 내 두 의견 그룹(다함께, 해방연대)의 사회연대전략 반대 입장을 보았다. 해방연대는 특유의 입담으로 사회연대전략을 신랄하게 비판했으며, 다함께 역시 익숙한 “우려”를 표명했다. 중요한 것은 사회연대전략 반대에 대한 공감이 아니다. 현재 두 의견 그룹의 “당내 투쟁”이 과연 노동자 계급 당 건설을 위해 의미가 있는 지 판단하는 것이다. 이건 다른 동지들에게도 묻고 싶다.
배가 가라앉는다고 배를 버리면 배신자이지만, 애초에 배를 잘못 타서 갈아타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다. 민주 노동당의 우경화, 전진 그룹의 커밍아웃, 실망감을 넘어 분노하기 충분했던 요사이의 의원단 행보, 그리고 사회연대전략 채택과 그를 추진하기 위한 발 빠른 행보.. 이런 것들은 과연 우연이거나 일시적인 현상인가? 아직 당내 투쟁이 부족해서인가?
민주노동당이야 말로 노동해방 투쟁이 넘어야 할 벽이 아닌가? 현재 민주노동당의 인프라 위에 무엇을 쌓을 수 있는가?
내가 보기에, 민노당 내에서 “사회연대 전략”에 대한 비판의 칼을 드는 것은 선명성 드러내기에 그칠 뿐이다. 오히려 민노당이 이미 우경화된 전선체에 불과하다는 점을 가리는 연막이 되고 있다. 배의 방향을 바꾸기 위한 노력은 헛되다. 배의 목적지를 결정하는 것은 선장이 아니라 타고 있는 승객과 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목적지는 분명해졌다. 사회연대 전략 → ‘선한 자본주의’,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이다. 물론 도착할 수 없겠지만.
최준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