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8일 합의안이 70.1%의 찬성으로 인준되고, 철도노조의 06년 임협은 그렇게 끝났다. 김영훈 집행부는 자축하는 분위기다. 공공기관 임금가이드라인 2%에 더해 동종부문과 임금 격차를 줄이기 위해 04년 특단협에서 합의한 단계적 보전 3%까지 따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11월 27일, 김영훈 위원장이 이철 사장과 악수를 나누던 그날, 파업 300일째를 곧 맞는 KTX 승무원들, 그리고 ‘1년 364일짜리’ 파견계약직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한 철도 3천여 직고용계약직 노동자들은 마음속으로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구조조정 반대투쟁과 임금협상을 분리하다
이번 임금협상에는 네 명의 비정규직 조합원이 교섭위원으로 참여했다. 그만큼 비정규직 조합원들의 기대도 컸다. 비정규직 조합원들의 기대는 단지 정규직 최저임금인 6급 1호봉의 임금에 있지 않았다. 매년 되풀이되는 재계약 여부에 대한 불안, 직고용에서 파견직으로 내몰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부터 한 발짝이라도 멀어지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대는 곧 분노로 바뀌었다. 철도노조가 비정규직의 절박한 요구인 재계약 문제를 임협 대상에서 분리하여 노사협의회 안건으로 처리해버린 것이다. 결과는 비참했다. 임금이든 처우개선이든 비정규직은 철저히 배제된 합의문이 작성됐다. 김영훈 집행부에게 비정규직 교섭위원들은 비정규직 투쟁과 함께하는 전투적 조합이라는 명망을 치장해주는 들러리일 뿐이었다.
임금협상이니까 임금만 가지고 따져야 된다는 법은 어디에도 없다. 당장 고용불안을 압박하는 공사측의 외주화 공세가 연일 쏟아지고 있는데 쟁의 공간에서 이에 대응하지 않고 어디서 언제 대응하겠다는 것인가. 그동안 김영훈 집행부는 이렇게 말했다. “KTX 승무원들의 끈질긴 투쟁이 철도공사의 구조조정 일정을 늦추고 있다” “직고용 계약직의 파견노동직화 정규직의 외주화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임금협상 와중에서도 외면할 수 없는 사안이 바로 비정규직의 ‘고용안정’ 문제 아닌가.
김영훈 집행부가 비정규직의 고통을 외면한 것은 흔히 말하듯, 집행부가 정규직 조합원들의 정서에 충실해서인가? 정규직 조합원들 다수가 그런 정서를 가지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지만, 진실은 집행부가 정말 피해가고 싶었던 것이 있었다는 것이다. 바로 전면적인 파업투쟁이다. 그래서 이번 임금협상에서 구조조정과 관련한 현안 문제를 분리하려고 그렇게 애를 쓴 게 아닌가. 열 받지만 이것이 진실이다.
오로지 산별전환, 닫혀버린 쟁의공간
김영훈 집행부에게 이번 임금인상 투쟁은 산별로 가기 위한 수단이었다. 임금협상 와중에서 철도노조가 실제로 힘을 쏟은 것은 11월 12일 출범을 앞둔 운수산별 전환이었다. 조합원 여론 수렴 절차도, 변변한 교육도 없이 급작스레 산별전환 투표를 쟁의행위 찬반투표에 끼워 넣었고, 결과는 쟁의행위 59.89%(재적 대비 55.41%), 산별전환은 68.37%로 가결이었다.
쟁의행위 찬성률이 산별전환에 비해 10% 가까이 낮지만 조합원들에게 이 두 가지 투표가 갖는 의미는 전혀 달랐다. 2천 명이 넘는 직위해제자를 낳은 지난 3.1 파업으로 금전상 신분상 불이익을 당한 조합원들 입장에서 채 1년이 안 돼 다시 파업투쟁에 나선다는 것은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럼에도 투표자의 60% 가까운 조합원이 파업투쟁을 각오하고 나섰다. 구조조정의 급물살을 저지하려면 기회가 있을 때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본능이 꿈틀거렸던 것이다. 반면에 산별전환 건에 대해서는 별 부담이 없었다. 찬성표를 던짐으로써 교섭 중인 집행부에게 힘을 실어주자는 것 이상의 의미가 아니었다.
그러나 숫자에 집착하는 김영훈 집행부는 결과를 자의적으로 해석했다. 상대적으로 낮은 쟁의행위 가결률을 ‘조합원들이 싸울 생각이 없다’는 증거라고 말이다. 그렇게 집행부는 절반이 넘는 조합원들의 투쟁의지를 단칼에 무시해 버렸다. 대신 집행부가 유일하게 압박을 느낀 것은 바로 중노위 조정안 시한이었다.
‘묻지마’ 가결
대다수 철도노동자들이 잠정합의안의 내용을 알게 된 것은 확대쟁대위의 가결이 있고 나서였다. 김영훈 집행부는 잠정합의안을 조합 사이트에 게시하지 않고 지부 사무실에 팩스로 보냈다. 대여섯 시간 안에 지부장들에게 조합원들의 의사를 수렴해 오라는 주문과 함께 말이다. 중노위의 조정안이 떨어지기 전에 지부장들의 가결을 거쳐 합의서가 효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 말고는 시간에 쫓긴 집행부에게 중요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 후 치러진 인준투표에서 조합원들은 거수기를 강요당할 수밖에 없었다. 지부장들이 신임해준 집행부에 반기를 들기란 개별 조합원으로서는 쉬운 일이 아니었고, 집행부가 노린 것도 이것이다.
구조조정 반대투쟁, 아래로부터 다시 모아내자!
투쟁의 여지가 있을 때 투쟁을 조직하지 못하면 무장해제는 순식간이다. 사측의 지속적인 공세에 장기간 노출되면 조합원들도 사측이 들씌우는 질서에 순응하게 된다. 이번 임금투쟁에서 집행부는 비정규직 정규직을 막론하고 철도노동자 모두의 생존권이 걸린 구조조정 분쇄투쟁을 회피하고 주판알을 튕기는 협상가의 자세로 일관했다.
비정규직 법안 통과로 철도공사는 외주화에 더욱 속도를 붙이고 있다. KTX 승무원에 이어 새마을호 승무원도 외주화의 희생양이 되고 있다. 직고용비정규직뿐만 아니라 어느 직종 어느 부문이 외주화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06년 임투 공간에서 사측의 외주화 공세를 막아내는 투쟁을 만들지 못함으로써 구조조정 분쇄투쟁의 길은 더욱 험난해졌다. 노동자의 생존권보다는 산별전환이라는 치적을 쌓는 데 관심이 가 있는 집행부가 자초한 일이다.
이제 달리 길이 없다. 지부 현장에서 투쟁을 만들어내고 지구 차원의 투쟁으로 확산시켜내고, 지부별 투쟁들을 모아내서 구조조정 반대투쟁 전선을 세워내는 그 투쟁을 다시 시작하자. 아래로부터 다시 투쟁을 모아내자. 이번에는 집행부만 쳐다보는 일 되풀이 하지 않도록 확실하게 해보자. 공사측의 외주화 폭탄이 우리 머리 위에 떨어지기 전에 다시 일어서 전열을 가다듬자.
철도노조 조합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