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 포항 건설플랜트 투쟁 이후 11월 22일 민중총궐기 투쟁, 화물연대 총파업, 비정규직 개악 무효 총파업 투쟁에서 벌어진 불법-과격시위 처벌에 대한 논란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민주노총과 집회 참가자들을 폭도로 몰아가고 신고제로 되어 있는 집회조차 불허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더 나아가 기업은 물론 정부․지방자치단체 등은 불법 폭력시위 피해에 대한 거액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집회에 참석했던 사람으로서 도저히 이해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정말 폭도인지, 우리의 집회가 그렇게 잘못된 것입니까?
A : 단답형으로 말해 우리의 투쟁은 정당합니다. 더더욱 우리는 폭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포스코 본사를 점거한 건설플랜트노동자들은 영웅적인 투쟁을 한 것입니다. 비정규직 개악에 맞선 민주노총 총파업은 과격해서가 문제가 아니라 총파업의 위력이 떨어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만약 80만 민주노총 조합원의 총파업투쟁을 넘어 850만 비정규직노동자들의 분노를 조직할 수 있었다면 자본과 정부는 과격하다는 말조차 꺼내지 못했을 겁니다. 96~97년 노개투처럼 적당한 양보를 통해 투쟁을 잠재우려 했을 겁니다. 하지만 자본과 정권은 정세가 유리하다고 판단하면서 정규직, 비정규직 할 것 없이 벼랑으로 몰아붙이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파업하지 말라’고 하고, 더 나아가 거리집회조차 통제하려고 하는 겁니다.
제도화된 폭력
정권과 언론은 TV 뉴스, 신문, 잡지 할 것 없이 모든 매체를 동원해 폴리스 라인을 넘어서는 것을 질서를 어지럽히는 파렴치한 행위라고 합니다. 행진을 방해하는 전경의 방패를 잡고 투쟁하는 것을 폭력이라고 합니다. 어쩌다 각목이나 쇠파이프가 등장하면, ‘웬 땡이냐’ 하는 심정으로 폭도로 매도합니다.
자기의 생존권을 걸고 투쟁하는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이 보기엔 정말로 폭도마냥 보입니다. ‘신성한’ 국가권력에 맞서 투쟁하는 테러분자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자본과 정권이 잘못하고 있다고 판단하는 조금은 이해심 있는 사람들조차 “계란으로 바위치기를 왜 하냐” 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대통령, 국회의원 잘못 뽑은 자기 손가락을 잘라야 한다고 한탄만 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그래야 할까요?
먼저, 자본과 정권, 언론의 모든 매체는 왜 투쟁하는 지 밝혀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본의 논리만 강변할 뿐이지요. 건설플랜트노동자들의 요구가 무엇인지 관심도 없습니다. 화물연대 동지들이 자신들의 목숨줄인 화물차로 공단을 막아 세워도 왜 그러는지, 어떻게 해결할지 한 순간도 고민하지 않습니다. 그저 폭도로 몰아붙여 진압할 생각 외엔 아무것도 없습니다. 건설플랜트 조합원의 말처럼 폭력경찰을 진주시켜 먹여 살릴 돈으로 충분히 요구조건을 들어줄 수 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늘 자본가가 말하는 자본의 기회비용 논리조차 거부합니다. 당장 손해를 본다 해도 노동조합 조직력을 망가뜨려 다시는 덤빌 수 없도록 만들겠다는 의도입니다. 자본과 정권에겐 다음부터 투쟁의 ‘투’자로 꺼내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 목적입니다.
자본과 정권은 입으로는 ‘헌법’ 정신 운운하지만 행동으론 ‘헌법’에 보장된 노동자의 권리를 제도적으로 막고 있습니다. 총파업을 이끌고 있는 현대자동차노조에 대한 공격을 보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현대차노조의 정당한 파업을 정치파업, 불법파업이라고 합니다. 임금과 근로조건에 해당하는 사안에 대해서만 파업하라고 꼬드깁니다. 비정규직 개악안과 로드맵은 임금과 근로조건에 직접적인 영향을 줍니다. 정규직을 비정규직화 할 수 있고, 비정규직의 확대로 정규직의 임금인상이 지대한 타격을 받고 있으며, 정리해고도 완화되는데, 게다가 노동자의 자주적인 조직인 노동조합을 식물노조로 만들려고 하는데, 여기에 저항하지 않는다면 노동자들의 생존권은 더 이상 보장받지 못합니다.
분명 노무현 정권, 국회, 정권과 국회를 움직이는 총자본에 맞서 투쟁하는 것은 정치파업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경험을 통해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정치는 경제의 집중된 표현입니다.” 따라서 정치파업에서 패배하면 경제투쟁도 더 어려워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96~97년 정리해고제, 파견근로제를 막지 못해 수 백 만의 노동자가 거리로 쫓겨났고, 비정규직으로 전락했습니다. 96~97년 노개투 당시 투쟁을 접은 배신한 민주노총 지도부를 원망하고, 정리해고제, 파견근로제를 합의해 준 지도부를 탄핵해도 해결하지 못한 채 천추의 한으로 남아 있습니다. 정치파업의 패배가 가져올 생존권의 몰락을 경험한 노동자계급이 정치파업에 적극 나서야 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지요. 그런데도 자본과 정권, 언론은 정치파업은 불법파업이라고 소음만 나는 20년전 레코드를 리바이벌 하고 있습니다. 실정법상 정치파업이 불법파업이라는 걸 모르는 동지들은 없습니다. 불법인지 알면서도 “악법은 어겨서 깨뜨리리라”는 전노협 정신으로 투쟁에 앞장서는 겁니다.
노동자계급이 경제의 집중된 표현인 정치에 관여해야 한다는 건 진실입니다. 정치파업을 노동자들의 기본 권리로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도 분명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떻습니까? 지배계급은 정치파업을 불법으로 만들어 놓고 노동자계급을 폭도로 내몰면서 희롱하고 있는 겁니다.
이렇듯이 자본과 정권은 제도화 된 폭력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국회에서 자본가에는 유리하지만 노동자에게는 생존권 박탈을 의미하는 불리한 악법을 마구잡이로 통과시킵니다. 이에 반대하거나 저항하면 정치파업은 불법이라며 국가권력 중 폭력경찰을 앞세워 싹을 자릅니다. 게다가 온갖 매체를 통해 노동자투쟁을 매도하고 자본의 논리를 주입시킵니다. 지배계급은 이데올로기에서 입법, 행정, 사법까지 제도화 된 폭력을 휘두릅니다.
해도 해도 너무한 노무현정권
노무현정권의 오만불손은 도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하중근을 열사를 무참하게 죽인 폭력경찰의 명백한 살인행위에 대해서조차 사과조차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잘못을 노동조합에 떠넘기기에 여념 없습니다. 국가의 제도화 된 폭력에 밀려 노동조합은 구속, 수배, 해고로 만신창이가 되고, 피눈물을 흘리면서 대국민 사과문까지 발표했지만 노무현 정권은 하중근 열사의 죽음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습니다.
한 술 더 떠 행정자치부는 11월 24일 불법․폭력시위에 대해 민․형사상 필요한 모든 조치를 반드시 취하도록 하는 내용의 ‘대외비’ 공문을 전국 246개 기초자치단체에 보냈습니다. 이는 손배를 적극 활용하라는 겁니다. 법무부도 시위현장 부근의 자영업자나 노점상 등이 손해를 볼 경우 법률구조공단 등을 통해 손배 청구를 위한 법률 지원을 해주기로 했습니다. 이는 매년 경총이 단위기업에 내리는 공문과 하등의 다를 바가 없는 겁니다. 경총은 노동조합을 깨기 위해 손배, 가압류를 적극 활용할 것을 권장해 왔습니다.
참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노점상의 생존권을 파괴하는 건 시위대가 아니라 정권의 강압적인 단속입니다. 매번 노점상을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단속을 하는 작자들이 노동자들의 집회를 깨기 위해서 법률구조공단까지 동원해 도와준다고 합니다. 손으로 하늘을 가릴 순 없습니다.
손배 청구는 군사독재정권 시절에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민주화 됐다는 지금, 2003년 배달호 열사를 죽음에 이르게 한 손배, 가압류를 정부가 나서서 장려하고 있습니다. 배달호 열사의 죽음으로 수그러들었던 손배, 가압류라는 노조탄압 핵무기 공세가 정권의 비호 아래 해일처럼 노조운동을 덮치기 직전입니다.
정당한 폭력
개악된 노동법, 집시법에 따르면 노동자계급이 하는 모든 표현의 자유는 거세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법을 따르게 되면 한정된 공간에서, 모기소리 만하게 외치는 한 무리의 청원자들만 있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지배계급이 노동자계급을 힘없는 청원자로 만들기 위해 그렇게 탄압하는 겁니다. 그렇게 ‘시혜’를 바라는 온순한 양이 되라 합니다.
노동자계급은 폭력 일반에 반대하지 않습니다. 정당한 폭력이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일제에 맞서 목숨을 걸고 투쟁했던 사회주의자, 민족주의자를 존경하는 것도 정당한 폭력이 있음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박정희, 전두환 군사독재에 맞서 투쟁한 사회주의자, 민주주의자들의 폭력도 정당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달라졌습니까? 가진 자들의 배만 불리는 자본주의 사회, 가면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양극화 사회, 가진 자들을 위한 제도화 된 폭력을 행사하는 사회, 이 비정상적인 정치, 경제, 사회에 맞서 투쟁하는 것은 정당합니다. 폭력으로 무장한 지배계급에 맞서 투쟁하기 우해선 정당한 폭력을 행사하는 수밖에 없음을 역사는 알려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