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공공성 강화!’, 좋은 말이다. 과거 노조운동 상층부들이 열심히 유포시켰던 ‘사회개혁투쟁!’ 구호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좀더 그럴 싸 하다. 그러나 ‘사회개혁투쟁!’ 구호가 노동자들의 절박한 생존권투쟁과 구조조정 투쟁, 임금인상 단협갱신 투쟁 등 현장의 대중투쟁을 비껴가기 위한 개량주의 상층관료들의 투쟁회피책에 불과했음이 대중적으로 폭로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지금 유행하는 ‘사회공공성 강화’ 구호도 곧 그런 운명이 될 것이지만, 현재 대중적 반감의 대상이 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에 대해 무언가 대안이 되는 것처럼 상층관료들에 의해 은근히 유포되면서 당장은 그 허구성이 잘 드러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더욱이 올해 대사업장 노조들이 산별전환에 나서면서 “기업별노조의 편협함”에 대당하는 산별노조의 미덕 중 하나로 이 “사회공공성 지향”을 들이밂에 따라 ‘사회공공성 강화!’ 구호는 오히려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모습이다.
생존권투쟁과 임단투는 조직노동자들만의 이기적인 투쟁이라고?
설상가상으로 근래에 여러 정치조직들이 ‘사회적 노동운동’, ‘사회연대적 노동운동’, ‘보편의제 노동자운동’ 등 과거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을 포장만 바꿔 다시 내놓은 다양한 이름의 노동운동론을 들고 나와 구조조정 투쟁을 비롯한 생존권투쟁과 임단투는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노동자들만의 이기적인 투쟁인 데 반해 사회공공성 강화투쟁은 보편적인 투쟁이며 자본주의 사회를 바꿔내는 투쟁인 것처럼 유포하고 있기 때문에 그 실체가 드러나는 데 꽤나 시간이 걸리는 것 같다.
물론 우리는 대중들이 정리해고, 외주화 등 고용불안을 낳는 민영화에 반대하는 맥락에서 ‘사회공공성 강화!’ 구호를 외치는 것을 문제 삼고 있는 게 아니다. 또한 사회복지 확충, 무상의료 무상교육 쟁취 등 노동자들의 삶에 직접적인 개선을 가져오기 위한 소박한 개량투쟁의 차원에서 ‘사회공공성 강화!’를 내거는 것에 대해서도 시비 걸 일은 아니라고 본다. 그러나 ‘사회공공성 강화!’를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적 전망인 것처럼, 말 그대로 세상을 바꾸는 운동인 것처럼 내세우고 유포시키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사회공공성 강화!’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이기는커녕 오히려 대안을 찾는 것을 방해하며, 자본주의 세상을 바꿔내는 운동이기는커녕 병든 자본주의를 오히려 살려내겠다고 하는 운동이다. 그것은 노동자들이 투쟁으로 쟁취하게 하는 대신 허상을 좇도록 만들고, 투쟁을 회피하는 지도부들에게 그 투쟁회피적 기회주의성을 가려주는 연막으로 기능한다. 어째서 그러한가?
‘사회공공성 투쟁’이 이행기투쟁이라고?
‘사회공공성 강화’ 논리를 가장 선도적으로 개척하고 있는 이론가 중 한 사람인 공공연맹 나상윤 기획실장이 “사회공공성 투쟁이 가지는 의의”에 대해 설명하는 것을 들어보자.
"우선 첫째로 부르조아 민주주의적 과제를 넘어서려는 이행강령적 요소를 담고 있 다. 조돈문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한국사회가 신자유주의 정책에 의해 ‘국가주도시장경제’에서 주주자본주의적 유형인 ‘자유시장경제’로 이동하고 있는데 북유럽형 모델인 ‘조정시장경제’라는 완충지대를 거치지 않고 새로운 경제체제로 이행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사회공공성 투쟁은 조정시장경제 모델을 만들어나가는 데 있어 상당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사회공공성 강화가 “부르조아 민주주의적 과제를 넘어.... 새로운 경제체제로 이행하는” 이행강령적 요소를 담고 있는 것이라고? 이게 무슨 얘기인가? 좀 더 들어보자. “‘사회공공성투쟁’은 사회주의적 민주주의 과제, 즉 사회화 투쟁으로 이행하는 ‘중간단계의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사회공공성 투쟁’이 사회주의 투쟁으로 이행해 가는 이행기투쟁이라는 이야기이다. ‘사회공공성 투쟁’이 정말 노동해방으로 가는 그런 투쟁이라면 뭐가 문제이겠는가. 그러나 현실의 ‘사회공공성 투쟁’은 그와는 정반대다. 사회주의 투쟁으로 가는 이행기 투쟁이기는커녕 조합원들의 소박한 생존권투쟁조차도 조직하지 못하는, 아니 거창한 구호를 내세워 생존권투쟁을 억제하는 ‘투쟁’이 아닌가!
조합원들의 절박한 구조조정 분쇄투쟁과 분리된 철도노조의 ‘철도 공공성 투쟁’, ‘국민철도 투쟁’을 보라! 악질적인 병원 자본들의 공격에 대항 전선을 치지 못하고 오히려 공격에 조합원들을 무방비 상태로 내모는 보건의료노조의 ‘의료 공공성 투쟁’은 또 어떤가. 정부의 징수공단 신설 방침에 대해 4대보험 노조들이 '사회공공성’ 주장을 내세워 현장의 고용불안 압박을 가하고 있는 공사측의 공격에 날개를 달아주고 있는 모습도 보라. 나상윤 실장은 연맹 산하 노조들의 ‘사회공공성 투쟁’이 이런 반동적인 행보로 나타나고 있는 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도 “사회주의적 민주주의 과제로 이행하는 투쟁”이라는 허황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공공성 투쟁’이 이행기 투쟁이라는 주장은 현실의 반동적 작태를 감추기 위한 기만적인 이데올로기라고밖에 할 수 없다.
현장의 대중투쟁을 억제하는 ‘사회공공성 투쟁’
이 같은 ‘사회공공성 투쟁’의 반동성을 은폐하기 위해 ‘이행강령’과 ‘이행기투쟁’까지 동원하고 있지만, 진실로 이행기투쟁의 요소들은 ‘사회공공성 투쟁’에 의해 억눌리고 있는 조합원들의 생존권투쟁 속에 있다. 자본의 공격에 직접적으로 맞서는 구조조정 분쇄투쟁 속에 있다. 이런 투쟁들을 확대 강화하는 가운데 노동해방을 위한 투쟁으로 가는 다리를 놓을 수 있다. ‘이행강령’을 말하려면, 이런 가교를 이룰 투쟁들을 정식화해야 한다. ‘사회공공성 투쟁’은 이런 이행의 가교이기는커녕 그 이행투쟁의 잠재적 요소들마저 억제한다.
‘사회공공성 투쟁’이 “북유럽형 조정시장경제 모델을 만들어나가는” 역할을 한다는 위의 설명이 결국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니 ‘사회화 투쟁’이니, ‘새로운 경제체제로 이행’이니 하는 소리들이 죄다 공문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스스로 폭로하고 있다. 스웨덴 등 북유럽식 자본주의로 가고자 하는 것이 결국 ‘사회공공성 투쟁’이라는 이야기 아닌가. 그렇다면 북유럽형 자본주의든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든 모종의 자본주의로 가기 위해 실제적인 대중투쟁들은 억제되어야 한다고 차라리 주장하는 것이 솔직한 태도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이라고 내놓은 ‘사회공공성 강화!’의 실체가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것은 안 되고 자본주의 안에서 뭔가 대안을 찾자는 사민주의적 개량주의의 다른 말임을 솔직하게 이야기 하라! 그래서 ‘사회공공성 투쟁’은 자본의 신자유주의 공격에 맞서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노사협조와 사회적 합의를 통해 자본을 설득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라고 솔직하게 이야기하라!
신자유주의 공격을 강화시켜주는 ‘사회공공성 강화!’
자본의 신자유주의 공격에 맞서, 우리는 민영화(사유화) 반대투쟁을 해 왔고 앞으로도 해야 한다. 그러나 이 투쟁을 ‘사회공공성 투쟁’이라는 방향으로 가져가려는 시도에 단호히 반대해야 한다. 그것은 “사회주의적 민주주의 과제로 가는 이행투쟁”의 길이기는커녕 자본의 민영화/구조조정 공격에 굴종하는 길이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일관된 투쟁은 자본주의 그 자체에 대한 투쟁일 수밖에 없다. 신자유주의는 오늘날의 자본주의이다. 자본주의는 건드리지 않고 신자유주의와만 싸운다는 것은 허구이고 기만이다.
이른바 북유럽 복지국가라는 것도 분출하는 노동자계급의 사회변혁적 투쟁으로 타도될 위기에 몰린 지배계급이 내놓은 개량책이 아니던가. 이런 면에서 ‘사회공공성 투쟁’은 스스로 자임하고 있는 이 같은 개량조차도 가져오지 못하고, 단지 대중투쟁을 억제하는 역할만 함으로써 현 단계 자본주의의 반동성을 강화시켜주기만 한다. 따라서 ‘사회공공성 강화!’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이기는커녕 신자유주의 공세에 노동자들을 무방비 상태로 내몰고, 자본의 공격에 날개를 달아준다. 이제 우리는 신자유주의와 함께 ‘사회공공성 강화!’ 슬로건과도 싸워야 할 때다.
이민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