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상황에 대한 환상을 단념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환상을 필요로 하는 상황을 단념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비판은 사슬에서 조화(造花)를 뜯어내는데 그것은 인간이 환상이나 위안도 없이 사슬에 얽매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슬을 떼어내고 생화(生花)를 따기 위해서이다.”
― 칼 마르크스
어제 1월 10일 공공연맹 대의원대회가 개회선언도 해 보지도 못하고 다시 무산되었다. 작년 12월 31일로 지난 집행부 임기는 마감되었다. 그로 인해 연맹 규약에는 없지만, 단위 노조의 일반관례로 보자면 실질적으로 ‘사고 연맹’이 되어 버렸다. 양경규 전 위원장은 노무사의 법률 자문을 구한 결과 전 집행부가 임기를 연장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결론을 내려 비대위를 구성하고 그 비대위 위원장을 맡았다. 그 비대위 위원장이 훌륭한 경력이라 생각했는지, 민주노총 위원장 후보 경력에다 덧붙였다.
공공연맹을 비대위로 가게 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따져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사고 연맹’이 아니라 정상적인 연맹 운영을 할 방도가 없었는지도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우선 공공연맹 양경규 전 집행부는 구랍 12월 26일 [가칭]공공운수 연맹 대의원대회가 유산될 경우를 대비하지 않았다. 12월 26일 이전에 이미 통합 연맹 대의원대회를 하니, 못하니 혼란이 있어 왔다. 12월 26일 당일 중집에서도 대의원대회 자료가 제출되지 않은 채, 막무가내로 통합 대의원대회를 밀어부쳤다. 공공연맹과 왜 통합해야 하는지, 그 이유도 알지 못하는 운수산별 대의원들은 대의원대회에 참석하지 않고 가 버렸다. 이건 약간의 통찰력만 있으면 예측할 수 있는 일들이었다. 솔직히 공공운수 통합은 조합원들을 배제한 채, 상층들만의 리그로 끝났다. 운수노동자들은 묻는다. “그럼 왜 덤프연대와는 통합하지 않는가?”, “건설프랜트 노조도 있지 않는가?” 등등의 의문을 던진다. 공공운수 통합은 그렇게 상층들만의 쿠데타(?)로 이루어 진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년 12월 26일 가칭 공공운수연맹 통합 대대가 무산되고, 양경규 집행부는 공공연맹 대의원들을 불러 모아 간담회를 시작했다. 그 자리에서 양경규 위원장은 “규약 해석권이 위원장에게 있으므로 중집회의를 통해 비대위를 구성하겠다”고 말했다. 나는 반박했다. “현 집행부의 임기가 12월 31일자로 끝나기 때문에, 12월 31일 이전에 양경규 위원장이 차기 집행부 선출을 위한 공고를 내고 임기를 끝내야 한다.”고 말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더디게 보일지 몰라도 그 길이 오히려 빠른 길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내가 통한해 하는 이유는 1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발전노조가 분사되기 이전인 대한민국 노조 설립 제1호인 전력노조 시절, 혼자서 지부장을 22년이나 해 먹던 전력노조 수석부위원장이자, 울산화력지부 위원장이었던 김 아무개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당시 전력노조는 2중 간선제를 채택하고 있었는데 이 김 아무개 지부장에 맞서 나를 비롯한 몇 동지들이 대의원 수를 21:19로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그러자 정식적으로 대의원대회를 열 경우, 자신이 낙선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지부 대대 공고를 고의로 내지 않아 버렸다. 그래서 울산화력지부는 ‘사고 지부’가 되었다. 약 8개월간의 투쟁 끝에 마침내 울산화력지부는 민주지부로 탄생할 수 있었다. 바로 이런 일이 내가 해고가 될 빌미가 되었고, 김시자 열사가 분신을 할 수밖에 없는 전력노조의 상황들이었다.
양경규 동지가 고의든, 미필적 고의든 결과적으로 공공연맹을 ‘사고 연맹’으로 만든 주범임에는 틀림없다. 또한 양경규 동지가 노동운동사에 또 하나의 잘못된 관례를 만들었다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앞으로 어느 누구든 임기를 연장하여 비대위 위원장을 맡고 싶다면 자신의 임기가 끝나기 전에 차기 집행부 선출 공고를 하지 않으면 된다. 내가 왜 임기연장이라고 말하는가 하면, 그 이유는 양경규 전 집행부 전체가 비대위의 성원이 되었고, 임원은 상임 비대위원이 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비록 똑 같은 사례는 아니라 하지만, 내가 보기에 결과적으로 민주노조 운동을 14년 전으로 후퇴시켰다. 혁신의 대상들이 “혁신”을 주장하는 우스운 꼴을 보면서, 우리는 또 그들 중 누구를 선택해야 하는 부르주아지 정치판을 복사해 내고 있다. 내가 변하지 않고,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그 기상은 가당하다 할 것이나, 그것 또한 아이러니컬한 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칼 마르크스는 자본의 이데올로기를 허위로 보았다. 그래서 진실을 드러냄으로써 세상을 바꾸기 위해 투쟁한 우리의 선생이다. 우리는 그 가르침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 운동판은 옳고 그름이 선택의 잣대가 아닌지 오래되었다. 오로지 내 편이냐, 니 편이냐가 유일한 잣대가 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종파주의다. 종파주의란 전체 노동계급의 이해보다 자신들의 패거리의 이해를 먼저 생각하고 행동하는 세계관이다.
그러고 보면 명심보감의 이 한 구절은 우리에게 주는 훌륭한 메시지가 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좋다고 해도 다시 한 번 살피고, 모든 사람이 나쁘다고 해도 다시 한 번 살펴라(衆好之 必察焉, 衆惡之 必察焉).”
명심보감은 아니지만, 또 이런 말도 있다. 공자의 제자가 공자에게 이렇게 물었다. “마을 사람들이 다 좋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좋은 사람입니까?”하고 묻자, 공자는 “아니다.”라고 답했다. 다시 제자가 물었다. “그럼 마을 사람들이 다 나쁘다고 하는 사람이 좋은 사람입니까?”하고 물었다. 공자는 역시 “아니다.”라고 답했다. 제자는 다시 물었다. “그럼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입니까?”하고 말이다. 공자는 “좋은 사람들이 그를 좋다고 하고, 나쁜 사람이 그를 나쁘다고 말하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어쨌든 우리는 칼 마르크스의 문구처럼 ‘환상’을 필요로 하는 ‘상황’을 단념시키지 못했다.
우리가 사슬을 떼어내고 생화(生花)를 딸 날은 언제 오려는가. 이것이 나의 통한이다.
박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