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은 며칠 전 자신을 비판하는 진보 학자들과 논쟁하면서 자기는 신자유주의가 아니라 ‘진보’라고 주장했다. 노무현 집권 4년 동안 노동자들은 ‘개혁’이라는 것이 다름 아니라 <자본가를 살찌우기 위한 노동자 죽이기>임을 고통스런 대가를 치르고서 배워왔다. 이제 진보라는 것도 개혁과 마찬가지로 노동자 죽이기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노동자들은 배워가고 있다. 노동자에게는 궁핍과 차별과 박탈, 고용불안과 실업을, 그리고 한줌도 안 되는 자본가에게는 거대한 이윤과 부를 안겨주는 것이 바로 개혁이고 진보라는 것을 말이다.
자본가의 천국, 노동자의 생지옥
노무현이 집권 초부터 개혁과 진보를 이런 <자본가 배불리기/ 노동자 죽이기>로 의도했는지는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노무현 정권이 남한 자본가 체제를 지켜내고 남한 자본주의의 번영과 경쟁력 강화를 자기 임무로 삼았다는 것, 그리고 그런 한에서 개혁과 진보는 필연적으로 노동자 죽이기를 뜻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칭 비정규직 보호법안과 로드맵 등 노동법 개악을 통해 비정규직을 더욱 늘리고 노동조합의 파업권을 무력화시키는 것이 노무현 정부에게는 개혁이고 진보였다. 그리고 이미 이 개혁과 진보가 노무현 정권 하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을 분신과 자결로 몰아넣었고, 올해 들어서도 동료의 해고와 임금삭감에 항의하여 분신한 택시노동자 전응재 열사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노무현 자본가 정권은 개혁과 진보라는 이름 아래 부익부 빈익빈 사회양극화를 더욱 벌려놓았다. 이도 모자라 비정규직 정부종합대책이라는 이름 아래 공공부문 비정규직노동자들을 고용불안으로 몰아넣고 올해 중반 대대적인 계약해지 ․ 해고 사태를 예고하고 있다.
이 갈리는 개혁진보세력
07년에 들어와서 노무현 정권은 이주노동자를 수용소에 가두어놓고 9명이나 불에 타 죽게 했다. 이주노동자를 추방 단속, 감금시키고 결국 목숨을 빼앗은 살인 주범인 고용허가제라는 것도 노무현 정권의 개혁과 진보이다.
한편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조차 무색할 정도로 3.1절 특별사면 명단에는 노동자와 양심수는 철저히 빠지고 재벌들과 부르주아 정치가들로 온통 채워져 있다. 집권 4년 동안 무려 9백71명이나 되는 노동자를 구속시킨 게 노무현 정권의 개혁이고 진보다.
작년 포항건설노조 하중근 열사에 대한 경찰의 살인폭력, 그리고 엊그제 드러난 검찰의 파업 봉쇄를 위한 공작 개입과 공안탄압도 ‘개혁 ․ 진보’의 간악한 반노동자성을 다시금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최근 한미 FTA 반대 집회를 금지, 원천봉쇄하고 시위자들을 마구잡이로 구속시키는 등 노무현 정부는 이제 집회 ․ 시위권 같은 기본적 권리마저 짓밟고 있다. 국민 다수의 파병 반대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미제국주의 침략전쟁에 적극 가담하여 군대를 파견하더니 마침내 한 젊은이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오직 자본가들의 돈벌이 기회가 열리기만 한다면, 아프간과 이라크의 민중들을 학살하고 한국의 젊은이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것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 노무현 자본가 정권이다. 이 모든 게 개혁과 진보 운운하면서 노무현 자본가 정권이 한 일이다.
07년 대선을 앞두고 노무현 정권과 열린우리당이 ‘개혁진보세력’ 운운하며 또 다시 노동자 ․ 민중을 기만하려 들지만, 노무현 정권이 자행한 이 모든 것은 개혁과 진보가 오직 자본가들과 부자들의 호주머니만 불리는 파렴치한 사기행각임을 상기시켜 줄 뿐이다. 노동자는 이를 갈고 있다. 개혁진보세력에게.
진보개혁세력의 대표주자가 되고 싶어 하는 민주노동당
이런 판국에 민주노동당이 대선을 겨냥하여 스스로를 ‘진보개혁세력’의 대표주자로 내세우기 위해 노무현의 ‘개혁 진보’와 경쟁하느라 분주한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노무현 정권의 지지 기반이 되어 왔던 시민단체의 자유주의 세력들, 노무현 정권을 비판적으로 지지해 온 진보 학자들, 어용 한국노총 등 이른바 ‘진보진영’의 지지를 끌어 모으고자 ‘온건노선’으로 우향우를 거듭하며 반노동자적 정책도 불사하고 있다.
지난 21일 민주노동당은 ‘범진보개혁 단일후보’ 선출을 목표로 하여 ‘진보진영의 2007년 대선전략’ 토론회를 개최했다. 이 토론회에서 민주노동당은 노동자의 고통분담론에 다름 아닌 저 악명 높은 사회연대전략에서 아예 한 걸음 더 나아가 △분배 담론만이 아닌 성장 담론을 함께 제시 △노동의 요구만이 아니라 노동의 양보를 동반 △민생과 평화를 화두로 한다는 ‘신진보주의’ 전략 등을 민주노동당의 ‘자기혁신안’으로 내놓았다. 자본가들과 다를 바 없이 ‘성장’을 내세우고 ‘노동의 양보’를 촉구하면서까지 자신들이 진보개혁세력으로서 손색없음을 보여주려고 애를 썼다. 얼마나 우향우를 했으면, 중간계급 시민운동세력의 선거결집체인 ‘미래구상’한테서까지 “매우 고무적”이라는 칭찬을 받았겠는가.
“분배만이 아니라 성장도!”, “요구만 하지 말고 양보도!”
이런 민주노동당의 행보를 보고 있으면 이 당이 얼마나 ‘노동자 정치세력화’와는 무관한 당인지, 왜 열린우리당 2중대라는 비판을 받는지를 다시 상기시켜준다.
민주노동당이 ‘반신자유주의’를 말하지만, 이런 구체적인 정책과 행보에서 신자유주의에 굴복하는, 아니 신자유주의로 한 발 한 발 발걸음을 옮겨놓고 있는 모습을 보면 민주노동당의 ‘진보․ 개혁’과 노무현정권의 ‘개혁 ․ 진보’가 과연 얼마나 다른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민주노동당의 진보는 이른바 사회연대전략에서 제 모습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노동자들의 비정규직 철폐투쟁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비정규직을 인정하고 존치하는 것, 그래서 ‘정규직 책임론’을 조장하고 비정규직을 동정의 대상으로 만들며 계급투쟁 대신 사회적 합의라는 이름의 계급협조를 지향하는 것이 바로 민주노동당의 진보다.
심지어 2월 27일 민주노동당의 한 의원은 비정규직 차별을 고착화시키는 무기계약직화/ 분리직군제 도입을 내용으로 하는 입법안을 발의하고 나섰다. 외주용역화, 대량해고, 근무평가제 ․ 성과급제 도입을 노림수로 담고 있는 무기계약직화로 노동자의 눈을 속이려고 하는 정부의 이른바 ‘공공부문비정규직 종합대책’에 대해 “비정규노동자에게 피눈물을 요구”한다며 비판했던 민주노동당이 이제 스스로 무기계약직군을 아예 법으로 명시하자고 나선 것이다. “무기계약직화가 정규직화로 가는 단계”라고 강변하면서 말이다.
우리은행의 분리직군제 도입을 두고 정부와 언론이 가증스럽게도 ‘정규직화’ 운운하면서 대대적인 홍보 선전을 했지만, 결국 임금과 승진에서 비정규직의 차별을 합리화하는 얄팍한 속임수라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났고, 금융권 노동자들이 이 분리직군제 폐지를 요구하며 파업투쟁까지 벌이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민주노동당만 이 사실을 모른단 말인가. 2007년 민주노동당의 진보는 이런 모습으로 구체화되는 것인가.
남한 자본주의의 번영을 위한 ‘진보’
민주노동당의 ‘진보’라는 것이 자본의 신자유주의 공격에 맞서는 노동자 투쟁을 확대 강화하고 이로부터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 도전하는 노동해방 투쟁으로 나아가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새삼스런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이제는 아예 노동자를 팔아 자본가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성장 담론을 제시하자는 지경까지 왔다.
애초부터 민주노동당의 진보는 노무현의 진보처럼 남한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그 체제를 번영시키고, ‘건강한 자본주의’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래서 07년 대선을 앞두고 이런 목표를 위해 누가 더 잘할 수 있는지, 누가 진보개혁세력의 대표주자인지를 놓고 열린우리당과 시민단체 등의 자유주의 세력과 경쟁하는 상황까지 온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열린우리당의 좌파로 나서려 하는가?
민주노동당의 진보는 신자유주의를 실제로 반대할 수 없다. 그러려면 자본주의에 도전해야 하며 정책과 노선의 중심이 노동자들의 계급투쟁을 확대 강화시키는 데에 가 있어야 하는데 그와는 반대로 민주노동당은 노무현의 진보와 별로 다르지 않은 진보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무현의 진보 못지않게 민주노동당의 진보도 남한 자본주의의 번영을 위한 진보이기 때문이다.
‘진짜 진보정당’?, 가짜 노동자당!
대선을 앞둔 07년 초, 한겨레신문이 불을 때고 노무현과 민주노동당이 가세하여 불붙은 이른바 ‘진보논쟁’은 오늘날 남한 사회에서 노동자계급에게 ‘진보’가 무엇인지 돌아보게 한다. 민주노동당이 노무현의 진보는 가짜 진보라고 비판하지만, 이런 비판은 사실상 별 의미가 없다. 어차피 민주노동당의 진짜 진보도 이미 노동자를 기만하기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이 ‘진보논쟁’에서 최소한 일관된 자세라도 보여주고자 한다면, 노동자 투쟁에 대고 자제를 촉구하면서 자본주의 합리화에 앞장 서는 미래구상 같은 시민단체 자유주의자들에 대해서도 가짜 진보라고 비판해야 한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은 이들과 함께 ‘진보진영’ 대선전략을 토론하고 이들을 포함한 진보진영의 대표주자가 되고 싶어 한다. 그래서 ‘분배만이 아니라 성장도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노동자 책임론을 유포하며 ‘노동의 양보’를 촉구하고 있다. 07년 대선을 앞두고 민주노동당의 진짜 진보는 노무현의 가짜 진보와 다를 바 없이 되기 시작했다.
민주노동당은 노무현과는 달리 진짜 ‘진보’ 정당인지 모른다. 하지만, 이미 자본주의적 정책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적 노동자당, 즉 가짜 노동자당이다. 2007년은 노동자에게 이 가짜 노동자당을 대신해서 진짜 노동자당 건설에 나설 것을 요구하고 있다.
양효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