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대선이나 총선 등 부르주아 선거에 대한 사회주의자들의 전술은 노동자계급의 투쟁과 의식을 발전, 강화시키는 데에 그 일차적 목표가 있다. 따라서 사회주의자들이 자본가계급에 기반을 둔, 또는 자본가계급의 이해를 대표하는 후보/정당을 지지하라고 호소, 선동하는 상황은 존재할 수 없다.
사회주의를 자임하는 세력이 이른바 ‘비판적 지지’라는 이름 아래 과거 김대중이나 노무현 같은 부르주아 후보에게 표를 찍으라고 선동하는 것은 노동자계급에 대한 범죄행위가 아닐 수 없다. 자본가계급과는 전혀 무관한 세력인 것처럼 스스로를 내세우는 자유주의 시민운동에 바탕을 둔 정치집단(예컨대 현재의 미래구상 같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실제로 똑같은 부르주아 정당임에도 단지 은폐되어 있을 뿐으로, 이들의 후보를 지지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2.사회주의자들은 선거가 제공하는 연단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후보 전술을 써야 한다. 사회주의 후보의 공약은 사회주의적 강령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이 사회주의적 강령을 구체적 정세에 맞춰 적용한 바로서의 <대중행동강령> 형태로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같은 <대중행동강령>이 없는 사회주의 후보 전술이란 기만이며, 따라서 <대중행동강령>의 정립은 사회주의 후보 전술의 전제이다.
3.사회주의 선거운동의 목적은 일차적으로 지지자들(선진노동자들과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사회주의 쪽으로 획득하고 그들을 조직화하고 노동자계급 속에서 그들의 영향력을 확대시키는 데 있다. 당선은 언제나 이 목적에 종속되어야 한다.
선거운동 자체는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요구들을(가장 기초적인 생존권적 요구들이라 하더라도) 쟁취하기 위한 직접적인 대중행동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부각시키는 운동이어야 한다. 한편 집권 또는 국회를 통해 무언가 변혁을 해낼 수 있는 것처럼 선전하는 것을 철저히 경계해야 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정부나 국회 같은 부르주아 국가기구를 활용해서 그러한 목적을 이룬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부각시키는 운동이어야 한다. 오직 이러한 기초 위에서의 당선만이 승리일 수 있으며, 정부나 국회 무대 내에서의 사회주의 전술 운용을 위한 확실한 토대가 될 수 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계급 표를 분열시키는 것”이 될까봐 우려하거나 그러한 악선동에 영향 받아 후보 내는 것을 꺼려해야 할 필요가 전혀 없다. 개량주의자들이 당선되어 기만적인 국가기구에 들어가는 것보다 선진노동자들과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사회주의 쪽으로 새롭게 충원되고 조직화되는 것이 계급의 미래를 위해 더 좋은 일이다. 특히 총선의 경우 개량주의자들이 우세한 노동자계급 밀집 지역에서 후보를 내는 것이 노동자계급 표를 분열시킨다는 이유로 자제되어선 안 된다. 가장 계급의식적인 노동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하는 사회주의 선거운동이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4.규모나 인적 역량의 문제로 인해 사회주의자들이 자신의 후보를 낼 수는 없지만, 다른 개량주의 노동자 정당 후보가 있을 때 비판적 선거 지지의 형태로 노동자 통일전선을 가동하는 것이 필요하다. 여기서 결정 기준은 이 개량주의 정당의 노선과 정책이 아니라 그 후보가 노동자계급과 맺고 있는 관계이다. 개량주의자들이 친노동계급적 공약을 내걸고 노동자계급의 지지를 얻어서 당선될 수 있겠지만, 자본가 체제 안에서 그러한 약속을 이행할 수 있는 능력은 설사 그들이 진정성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크게 제약 받을 수밖에 없다.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계급에게 이 점을 환기시키고 경계시켜야 하며, 그러한 약속이 이행되지 않을 때 개량주의자들과 그들의 노동계급 기반 사이의 모순을 활용해야 한다. 개량주의 정당을 상대로 한 통일전선의 운용을 가능케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모순이다.
이 전술은 그러한 후보가 노동자계급과 유기적으로 연결된 조직(개량주의 정당이나 노동조합)의 대표자로서 출마하는 경우에 적용될 수 있다. 여기서 비판적 지지란 후보의 강령을 비판하는 기초 위에서 그 후보에게 표를 찍으라고 노동자들에게 촉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한번 사회주의 강령은 후보에게 제기하는 요구안의 형식으로 수행되는 사회주의 선전의 토대가 된다. 이 강령이 개량주의자들의 강령보다 우월함을 설명해야 하며, 뿐만 아니라 개량주의 정당이 과거에 했던 제한적인 약속들마저도 이행하지 못해온 이력을 알려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과 비판으로 노동자 대중들이 쉽게 이 개량주의 당을 버릴 가능성은 크지 않다. 그 당이 자신의 최근 약속을 지키도록 강제할 노동자계급의 대중행동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것이 또한 필요하다. 개량주의자들과 통일전선을 하면서도 사회주의자들은 자신의 대중행동강령을 기치로 정면으로 내건다. 그리하여 개량주의 후보 및 정당에 대한 비판과 경고를 결코 아끼지 않는다.
5.사회주의자들이 독자 후보를 낼 수 있는 기반이 안 되어 제도권 개량주의 정당 후보에 대해 비판적 지지를 할 경우 그러한 비판적 지지가 상당 기간에 걸쳐 되풀이 하여 필요한 상황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이 불가피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비판적지지 전술이 결코 개량주의 후보에 대한 항상적이고 자동적인 승인 같은 것으로 되어서는 안 된다. 이 전술을 이렇게 반복적으로 운용하면 전술이 전략으로 탈바꿈해 버릴 위험성을 안게 되는데 이러한 위험성을 경계해야 한다. 이 전술은 또한 개량주의 정당의 집권을 노동자계급이 실제로 경험해 보아야만이 개량주의와 단절시킬 수 있다는, 따라서 일단 개량주의 정당이 집권토록 하는 데에 노동자계급의 전략적 필요성이 있다는 관점으로 전락할 위험성에 대해서도 경계해야 한다.
전술 운용은 언제나 구체적 상황에 대한 구체적 분석에 입각해야 한다. 부르주아 정부의 교체는 노동자계급이 부닥친 위기에 대한 사회주의적 해결책이 결코 될 수 없다. 노동자계급이 그 자신의 통치를 강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있기 전에 특정 부르주아 정부에 대한 ‘정권 타도’나 ‘정권 퇴진’ 같은 공허한 슬로건을 내거는 것은 개량주의 정당이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지켜주거나 확대할 수 있다는 위험한 환상을 유포하는 것이 된다. 또한 개량주의 정당에게 집권하여 사회주의 강령을 받아 안으라고 요구하는 것도 결코 사회주의자들의 슬로건이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개량주의 정당이 공공연하게 부르주아적인 정당보다는 ‘차악’이라는 이유로 노동자계급에게 개량주의 정당을 지지하라고 촉구하는 것은, 그러한 개량주의 정당이 집권하면 반드시 자본의 공격에 맞선 반격 또는 방어의 한 형태가 되어줄 것이라는 위험한 결론을 내포하고 있다. 개량주의 후보가 당선되어 부르주아적 노동자 정부가 들어서면 계획된 자본의 공격이 용이하지 못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하더라도 노동자계급이 사회주의자들의 대중행동강령을 채택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상황은 단지 일시적으로 끝날 것이다.
6.자본가계급이 계급투쟁의 분출을 꺼뜨리기 위해 선거를 이용하는 경우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계급의 투쟁 요구들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직접 행동이 더 우월하고 중요함을 제기해야 한다. 이 경우 선거 보이콧이 필요하다. 혹은 제도권 정당들에 맞서 전투적 투쟁 대표자들(파업위원회, 공장평의회 등등)에 대한 비판적 지지가 필요한 전술일 수 있다. 보이콧 전술을 실행하는 상황은. 선거운동 참여가 노동자계급을 현재 전면화 되고 있는 투쟁(예를 들어 부르주아 질서를 넘어설 기세를 띤 혁명적 봉기)으로부터 명백히 분리시키는 상황이거나, 또는 대중들이 선거의 반혁명적 의도를 명확히 간파할 수 있는 상황(1905년의 러시아 같은 상황)이다.
그러나 지지할 수 있는 후보가 전혀 없는 경우에는 반드시 선거 기권을 해야 한다. 예를 들어 노동자계급 후보가 없을 때(개량주의 정당 후보조차)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계급에 동조적인 후보라는 이유로, 또는 노동자계급 조직의 공식적 지지를 받는 후보라는 이유로(예를 들어 미국의 민주당 같은) 부르주아 정당 후보에게 투표하라고 노동자계급에게 권할 수 없다. 따라서 선거 기권이 불가피할 경우, 모든 후보에 대해 노동자계급의 반대를 표시하기 위해 투표용지를 손상시키는 등의 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선거 기권에 따르는 수동성을 최소화할 수 있다. 한편 이것이 어떤 상황에서는 사회주의 조직의 대중행동강령에 대한 지지도를 측정하는 수단으로 활용될 수도 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