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동자가 될 뻔했던 산별전환이 근심거리가 되었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이후 산별노조 건설은 박정희 정권이 만들어 놓은 기업별 체계를 극복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기업별체계에서 산별체계로 발전하는데 있어, 핵심적 요소 중의 하나가 교섭체계를 바꾸는 것이었다. 기업별 교섭을 공동교섭으로, 나아가 단일교섭으로 전환하는 것이 기업별 노조의 고립분산을 극복하고, 기업별 노조의 벽을 넘어서는 것, 이를 통해 교섭력을 극대화할 수 있다고 믿었다. 94년도에 불붙었던 산별논쟁에서 결국 업종중심으로 가닥이 잡힌 것은 당시 산별노조건설에서 중요한 것은 교섭체계의 변화에 있었으며, 업종별 조직이 이러한 변화에 조응한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IMF를 거치고 비정규직이 전체임금노동자의 절반이 넘어가는 현실은 산별노조건설을 말할 때 비정규직 노동자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것은 단순히 기업별체계를 넘어선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서 사람들의 머리를 아프게 만들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비정규직 노동자를 산별노조가 조합원으로 받아들이는 문제를 넘어서 이미 노동운동의 한 추세로 정착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운동에 대한 산별노조운동의 역할과 지위 등이 고민거리가 되고 있다. 이미 비정규직의 존재는 기업별 정규직 노조체계를 위협하는 강력한 변수로 등장하고 있다. 지금 대기업 노동조합은 과거 직업별 노조가 그랬듯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눈에는 폐쇄적인 기득권자들로 비치고 있다. 그래서 기업별체계가 노동운동의 보편성을 극히 위협하고 있고, 도덕적 권위마저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서 산별운동이 비정규직운동에 대한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가 산별노조의 정당성을 가늠하는 핵심적 요소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몇년전까지는 교섭체계를 공동교섭, 혹은 단일교섭으로 변경시키는 것이 미덕이었고, 그것을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할 수 있다고 믿었다. 즉 교섭체계가 변화될 수 있다면 교섭력이 강화되어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그만큼 한국의 노동시장이 급속히 변했고, 이에 따른 해결과제도 다양해졌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산별건설을 통해 당장 해결해야 할 과제로 들고 있는 것을 뽑자면 당장 대기업과 중소기업 노동자들의 임금격차다. 장기적으로 하후상박의 임금요구안으로 해결해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이루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또한 단협의 적용범위를 확대해 단순히 조직된 노동자뿐만 아니라 비정규직 노동자, 미조직 노동자 모두에게 단체협상의 효력이 미치도록 해서 산별노조의 계급대표성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한때 산별노조건설이 지지부진한 가운데 교섭력을 높이는 것보다 단협의 적용범위를 확장하자는 의견이 제출되기도 했었다. 이를 전 노동자에게 확대한 것이 사회임금요구이고, 민주노총에서 최근 들어 세상을 바꾸는 투쟁으로 명명한 무상교육, 무상의료 투쟁 등이 그런 것이다.
산별노조시대는 노사정위원회의 풍년시대?
문제는 이러한 과제도 산별교섭틀이 마련되어야 시도조차 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산별교섭틀을 자본측에 압박하는 수단으로 일단 노조체계를 산별체계로 바꾸는 것을 선택했고, 금속연맹은 몇 년간의 쉽지 않은 노력끝에 대공장이 산별전환에 성공함에 따라 일단은 자본가를 산별교섭의 장으로 끌어낼 압박수단을 마련하게 되었다. 그러나 투쟁을 통해 자본가들을 산별교섭장으로 끌고 오지 못하는 한 현장이나 전국적인 계급역관계가 노동에게 유리하게 전개될 가능성은 없다. 그래서 간이 배밖으로 나온 자본가들은 산별노조 건설을 안정적 노사관계의 틀을 만들기 위한 발전적 계기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들은 이미 계급역관계가 오랫동안 소위 “교섭국면”으로 정착되어온 사정을 충분히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주장을 거침없이 하고 있다.
산별만능론자들의 주장처럼 이제 산별교섭의 대상으로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문제나, 비정규직 정규직화의 문제 등을 의제로 올리기 위해서는 투쟁을 조직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의제를 올릴 협상틀을 실현할 압박수단이 마땅치 않은 각 연맹들은 정부와의 교섭에 기대를 걸고 있다. 그래서 98년이후 연맹별로도 노사정 교섭틀을 만들게 해달라는 것이 자연스런 요구가 되었다. 그런가하면 산별노조가 지금 직면한 과제를 온전히 수행하기 위해, 소위 산별교섭과 교섭범위에 대한 법적인 보장이 필요하다는 이유를 들어 민주노동당이 그러한 역할을 해 줄 것을 주문하고 있다.
노사간의 계급역관계가 호전되지 않는 조건에서 산별노조를 향한 노동조합운동의 접근방식은 조직형식의 변화, 노사정 교섭틀의 활용, 이를 통한 제도적 장치 마련 등으로 전개되고 있다.
현실이 이러할 진데 산별노조에 여러 가지 주문을 하고, 이러저러한 과제를 갖다 붙인다고 사태가 해결되지 않는다. 실제 그런 가능성을 현실화할 계급역관계를 만들지 않고서는 모두가 공염불이다. 사정이 유리하지 않은데 요구가 많으면 당연히 양보도 많아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산별노조로 조직전환을 했지만 이렇게 협상틀에 매달리는 방향으로 간다면 노동조합의 자주성은 갈수록 저하될 것이다. 90년대 중반에는 현장 투쟁력이 문제가 아니라 그러한 투쟁력을 소진시키는 노조체계의 후진성이 문제가 되었다면 지금은 투쟁력 자체가 문제가 되고 있다.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를 선두로 각지에서 진행되고 있는 절박한 투쟁에 연대하는 계통이 무너지고 있는 상황은 심각한 지경에 이르고 있다. 산별연맹이 투쟁력을 강화시키는 방향이 아닌 정권과 자본과의 협상틀에 매달리는 한 산별노조운동이 노동운동에 기여할 가능성은 전무한다. 결론적으로 산별노조운동 내부에서 지금 노동운동이 겪고 있는 위기적 상황을 해결할 가능성은 없다.
지역강화와 공장위원회, 비정규직 조직활동, 과도적 요구
연대투쟁의 계통을 다시 세우는 방향에서 조직체계를 변화시킨다면 그것은 지금 연맹체계에서 서자(庶子) 취급을 받고 있는 지역본부들의 위상 강화가 필수적이다. 당장 지역본부 위상강화의 핵심은 대표자들의 회의체계와 집행실무체계를 이원화되어 있는 것을 극복하는 것이다. 집행실무체계에 단위노조 간부들의 참여와 대표자들의 집행 의무가 결합되어야 상시적 연대와 집행에 대한 책임성이 보장된다. 지역연대파업과 전국 총파업으로 이어지는 연대투쟁의 계통을 회복해야만 절박한 노동자들의 문제를 전국화할 수 있고, 노동운동의 보편성을 회복시킬 수 있는 것이다.
노사관계로드맵과 복수노조 시대에 우리의 고민은 원하청 공동투쟁을 실제로 전개할 수 있는 공장위원회 건설에 있다. 산별노조가 비정규직 노동자를 받아들여 임금연대를 이루겠다는 말은 그렇듯 하지만 지금처럼 전국단위 교섭틀에 매달리는 한, 대중의 역동성도 투쟁의 진정성도 기대하기 힘들다. 공장위원회를 혁명적 상황에서나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들은 지금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통과 박탈감이 혁명은 12번도 가능할 만한 수준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정규직 노동조합의 계급대표성, 공장대표성이 문제가 되고 있는 현실에서 공장 전체노동자를 포괄하는 대표성을 확보할 필요에서도, 그리고 복수노조시대에 교섭단일화를 압박하는 자본에 대해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도 공장위원회는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이다.
운수연대와 같이 투쟁의 조직화를 목표로 하는 산별운동을 적극지지 엄호하는 것은 지금껏 진행된 산별건설운동의 관성을 극복한다는 측면에서 중요하다. 다만 공공운수 쟁취와 같은 과도적 요구를 보다 적극화할 수 있다면 노동운동의 정치화, 그리고 대중들의 정치의식을 고양하는 측면에서 보다 큰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노조운동이 계급대표성을 강화하는 문제는 민주노총 조직활동가 양성의 예처럼 조직활동의 전형을 새롭게 창출하는 활동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특히 기간제 노동자를 조직하는 방식에서 지역노조형태를 유지하는 것은 이후 지역중심의 전국단일노조로 전환하는 계기를 마련해 줄 것이다. 특정 연맹으로 조직하는 것은 운동의 지속성을 유지할 수 없는 방법이다. 그리고 이러한 지역노조가 지역본부와의 결합력을 강화시켜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당장 기간제 노동자들의 투쟁에 연대하고, 지지할 수 있는 조직은 지역본부이고, 취업이 불안정한 기간제 노동자들의 특성상 정서적, 문화적으로 노동운동과 접촉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역의 노동센터 역할을 하는 지역본부(지구협의회)와의 결합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투쟁의 강화와 노동운동의 정치화를 촉진하는 궁극적인 조직형태는 정규직운동과 비정규직 운동이 통합되는 지역조직중심의 전국단일노조 건설에 있다. 이러한 과제를 이루기 위해 선결되어야 할 것은 노동운동의 자주성과 연대성을 강화하는 것이다. 민주노조운동의 혁신과 지역연대투쟁을 강화하기 위한 의식적인 노력, 그리고 원하청 공동투쟁처럼 대단결을 위한 선도적인 노동자들의 실천이 무엇보다도 요구된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