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법 ‘재논의’하자? 그것도 ‘노동계 단일안’으로?
지난 6월 권영길 의원은 의원단 대표 취임 기자간담회에서, 노동계 단일안을 마련해 비정규법을 재논의 하도록 민주노동당이 주도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비정규법을 재논의하자는 것은, 그것도 노동계 단일안을 마련해서 재논의하겠다는 것은, 민주노동당의 비정규직권리보장입법안을 수정하겠다는 것이기에 문제가 심각하다.
재논의 자체는 무엇보다 환상적인 수준의 정세인식에 기반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민주노동당이나 민주노총의 주관적 바램과는 무관하게 열린우리당은 재논의할 의사가 전혀 없다. 민주노동당의 일방적인 열린우리당 짝사랑은 지난 4월 임시국회에서 주민소환제 등 법안 통과에서 열린우리당과 공조했을 때 여지없이 드러났다. 비정규 법 개악에 대해서 열린우리당은 “변경되기 어렵다”라고 분명히 못 박고 있는데도, 민주노동당은 “두 당이 재논의의 필요성과 심도 깊은 재논의를 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 형성됐다는 데 인식을 같이 했다”고 말하는 착각에 빠져있다.
그렇다면 재논의는 단순히 논의를 다시 하자는 것이 아니라, 민주노동당이 비정규직권리보장입법안을 수정하겠다는 말이다. 그것은 비정규직 철폐 및 축소라는 원칙과 방향을 포기하고 비정규직을 확산시키는 노무현 정권의 개악안과 타협하는 것일 뿐이다.
오히려 ‘재논의’의 실체적 진실은 권영길 의원이 의원단 대표가 된 바로 그날 6월 13일 한국일보와 한 인터뷰에서 확인할 수 있다. 권영길 의원은 “비정규직 법안 재심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비정규직 사용기간은 물론 사유제한에 있어서도 협상의 여지는 충분하다”고 말했다. 심지어 “사유제한 규정을 둘 수 없다는 정부ㆍ여당에게 수용 가능한 안을 제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과연 노무현 정권이 받아들일 수 있는 안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특히 사유제한 문제는 단병호 의원이 작년 12월 8일 사유제한을 무력화시키는 수정안을 제출했다가 노동운동 내부에서 심각한 비판에 직면했던 적이 있다. 그렇다면 권영길 의원은 단병호 의원 수정안보다 더 후퇴한 수정안을 던지겠다는 뜻이다.
게다가 노동계 단일안이 과연 무엇이냐는 것도 문제이다. 왜냐하면 이미 한국노총은 노무현 정권의 비정규직 법 개악안을 거의 수용한 최종안을 작년 11월 말 발표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어용노총 한국노총이 최종안을 포기할 것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노동계 단일안으로 가능한 것은 민주노총이 오히려 노무현 정권이 제시하는 비정규직 확산에 한국노총처럼 동참하는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노동계 단일안 역시 수정안 외에는 방도가 없다.
결국 권영길 의원이 밝힌 ‘노동계 단일안으로 재논의하겠다’는 것은 단지 비정규직 철폐라는 원칙을 훼손하고 비정규직을 확산하겠다는 노무현 정권에게 수정안을 내는 것에 불과하다.
수정안, 즉각 폐기하라!
이후 민주노동당은 7월 6일 민주노총과 정례협의회를 가져, 비정규법안 재논의와 노사관계선진화방안 적극 대응을 위한 공동투쟁본부를 구성하기로 했다. 또 “공동투쟁본부는 특히 별도의 비정규대응팀을 두고, 매주 정례회의를 통해 9월 정기국회 이전까지 비정규법안 수정안을 마련키로 했다.”
9월 정기국회가 시작된 지금 당원들과 조합원들은 비정규 법안 수정안을 마련했는지 안 했는지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만약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은 수정안을 마련했다면 즉각 폐기해야한다! 이는 민주적 의사결정을 무시한 처사이며, 동시에 비정규직 확산을 금지하고 철폐하는 원칙을 폐기하는 것이다. 아직 마련하지 않았다면 비정규법 개악 저지 투쟁 전선을 강화시키기 위해 ‘수정안은 없다’라고 공개 선언해야한다.
특히 단병호 의원이 작년 12월 8일 수정안을 내 놓은데 이어, 이번엔 권영길 의원이 제2의 수정안을 마련한다면, 민주노동당은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뒷통수를 또한번 때리게 된다. 수정안은 정치력은 커녕 밀실야합이자 직권조인일 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민주노동당에게, 그리고 권영길 의원에게 노동자 계급의 생존권을 유린할 권한은 결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