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해방실천연대의 기관지 사회주의정치신문 해방

[25호] ‘경영혁신방안’으로 포장된 ERP, 최악의 노동자 착취 통제 시스템

- 건강보험공단의 ERP 도입을 전면 저지하는 투쟁으로 나서야 한다! -

얼마 전 국민건강보험공단 측에서 내놓은 ‘통합경영관리체계 구축을 위한 경영혁신방안’이 공단 현장을 술렁이게 하고 있다. \'ERP\'로 지칭되는 이것은 다소 생소해 보이지만, 이미 국내외적으로 나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노동자의 삶과 직결되는 이 \'ERP\'가 어떤 것인지, 이에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지 즉각적인 판단과 행동이 요구되고 있다.

도대체, ERP가 무엇이길래!

ERP란 \'Enterprise(기업) Resources(자원) Planning(계획)\'의 약자로서 통상 ‘전사적 자원관리 또는 그 시스템’을 뜻하며, 기업에 분산되어 있는 각 부서의 정보 또는 자원을 통합적으로 관리하는 시스템을 말한다. 이것은 제조업이나 유통에서 재고를 줄이고 물류를 원활히 하도록 하기 위한 방편으로 처음으로 강구된 것으로, 최근에는 공공성을 버리고 시장적 질서로의 재편을 도모하는 흐름을 타고 공공기관까지도 도입하려는 움직임들이 나타나고 있다.
ERP 도입 후 기관 운영 등에 대하여 기관 자체나 관련된 정부부처에서는 대개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으나, 해당기관에서 업무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경우 대부분이 그와 반대되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특히 철도공사의 ERP에 대하여 공사측과 조합원들의 반응은 완전히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며, 노조는 ‘ERP 철회’ 방침을 전면화함으로써 양자의 대립이 격화될 것으로 보인다. 이런 양상이 나타나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ERP는 ‘전사적 노동자 착취·통제 시스템’에 불과하다!

‘경영 혁신’, ‘경영 합리화’ 등으로 표현되고 있지만, ERP는 영업·생산·구매·자재·회계·인사 등 회사 내의 모든 업무를 정보통신 기술을 이용해 실시간 효율적으로 관리·통제함으로써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한 통합전략시스템으로 통한다. 즉,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아 있으면 인터넷 혹은 인트라넷(사내전산망)에 집적된 현장생산 현황에서부터 영업사원 활동내용까지 한눈에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기존의 CCTV를 이용한 감시와 개인컴퓨터·이메일 검열 등 고전적인 노동자 통제방식과 재고·시간당 생산현황 등의 현황자료를 하나로 묶어 노동착취를 최적화하기 위한 수단이다. ERP는 이른바 \'통합시스템\'을 내세우는 만큼 구축과 동시에 인사조직 구조와 노무관리 형태의 변화도 동반하는데, ERP 도입과 함께 성과급제와 같은 임금체계의 변화나, 팀제와 같은 조직구조의 변화를 함께 모색하는 것이 보통이다.
또, 사무직의 경우 이 시스템이 사람을 대신하면서 인력 구조조정을 위한 강력한 무기가 되기도 하며, 생산직의 경우 여기에 더해 컴퓨터가 자동으로 생산현황을 점검하면서 일상적인 \'컴퓨터 센서 감시\'에 시달려야 한다. 서울대병원의 경우, 직원들의 위치추적을 목적으로 하는 전산장비(전자팔찌 등)를 도입하려다 엄청난 반발에 부딛혔다. 2003년도 교육계를 뜨겁게 달궜던 네이스(NEIS, 교육행정정보시스템)도 ERP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서구에서는 ERP를 \'Early Retired Person(조기 퇴직자를 만드는 시스템)\'으로 바꿔 부르기까지 했던 ERP는 결국, 기업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한 ‘전사적 노동자 착취·통제 시스템’에 불과한 것이다.

건강보험공단 ERP 추진의 문제점

건강보험공단은 지난 5월 ‘통합경영관리체계 구축을 위한 경영혁신방안 보고’에서 “05년 공공기관 경영평가 7위, 06년 고객만족도 최하위에는 이유가 있다!”며 통합경영관리체계 구축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그러나 공단 측이 보여주는 태도에서 나타나는 가장 큰 문제점은, 경영평가와 고객만족도 저조의 원인을 사실상 노동자의 책임으로 돌리면서 그에 대한 대책을 노동자를 효과적으로 통제, 관리하는데서 찾으려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공단이 도입코자 하는 ERP는 새로운 시스템에 노동자의 근무방식을 억지로 끼워 맞추는 방식으로써, 노동자는 작동하는 프로그램을 구성하는 하나의 부품이나 자재 정도로 파악될 뿐 인격적 주체로서 조금도 고려되지 않는다. 게다가, 공단에서 제시하는 ERP의 실내용을 보면, ‘실시간 모니터링, 일일결산, 평가와 보상, 사업중심의 조직개편, 외주화 등’과 같이 공단 노동자들의 노동조건, 임금, 고용문제와 직결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한편, ERP 자체가 갖는 문제점 말고도, 보험료 징수와 건강보험 혜택 적용 등 건강보험업무를 담당하는 공단 사업의 특성상 ERP 도입은 전혀 필요치 않으며, 억지로 도입을 강행할 시 수많은 부작용이 발생할 것이 분명하다.

ERP의 도입은 향후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가!

물론,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하는데 있어 막대한 예산이 소요될 것이다. 이미 ERP를 도입한 공공기관들은 그 비용으로 200~300억 원 정도씩을 쏟아 부었으며, 철도의 경우 ERP를 마무리하는데 무려 1,400억 원이 소요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런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는 문제 이상으로 ERP가 실행되는 방식에 맞추어 일하는 노동자들의 노동환경은 실로 심각한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일일 결산 시행, 실시간 모니터링, 평가에 따른 보상으로 노동강도는 한층 강화되는 반면, 팀별·개인별 경쟁 체계와 다면평가 등 평가에 따른 보상체계의 시행은 동료의식을 급속히 무너뜨릴 것이며, 상시적 구조조정의 위협에 노출될 것이다.
또 한편으로, 효율성과 비용절감 등 시장적 요소가 강조되고 ‘이윤 극대화’의 목표가 부각됨으로써 건강보험의 민영화 의도가 더욱 노골화될 것이며, 이는 노동자, 민중에 대한 공공의 의료서비스 체계를 심각하게 위협할 것이다.

‘ERP 전면 거부, 도입 저지’에 힘을 모아야 한다!

지난 시기 노사 간의 일정한 합의 하에 철도 현장에 ERP 도입이 진행 중이었지만, 벌써 그 폐해가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에 대해 철도노조 현 집행부가 취하고 있는 태도는, 앞으로 ERP 추진에 대한 대응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설명해준다.

“철도공사는 ERP가 대세라고 이야기 하지만, 현재 대세는 ERP의 실패와 노동자들의 투쟁을 통한 철폐이다. 철도노조는 철도노동자들이 구조조정에 내몰리고, 일터에 남아있는 노동자들도 끊임없는 살인 경쟁과 강화된 노동강도에 짓눌려 죽어나가게 만드는 ERP를 철폐할 그날까지 끝까지 투쟁할 것이다.”(출처 : [극악의 노동자 통제 시스템, ERP[철도노조])

‘노동자 착취 시스템’에 지나지 않는 ERP가 ‘통합경영정보시스템’으로 불리는 만큼 ERP는 공단의 운영을 완전히 바꾸는 솔루션과 같은 것으로, 전체 ERP의 영역에서 일부를 취하거나 누락시키기는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약에, ERP 방안 중 일부를 취사선택하려 하거나, 도입 시기 조정 등 세부적인 사항을 협의하려는 순간부터 노동자들은 차근차근 밀리고 말 것이다.
따라서 건강보험공단의 ERP 추진에 대한 사회보험 노동자들의 태도는 복잡할 게 없다. 공단의 ERP 추진 자체를 전면 거부하는 것이 올바른 태도다. 경영합리화라는 미명하에 노동자의 삶을 극도로 피폐하게 만들 ERP의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공단의 ERP 도입 저지 투쟁에 적극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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