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정치세력화와 민주노동당
87년 노동자대투쟁을 시작으로 민주노조에 대한 대중적 열망은 전노협 시기를 거쳐 민주노총에 이르러 전국적인 노동자조직의 확립으로 결실을 맺게 되었다. 민주노조운동은 드디어 산업적 시민권을 온전히 획득하고, 하나의 사회세력으로서 인정받게 되었다. 그리고 노동자계급은 이를 지렛대삼아 노동조건을 개선하고, 발전해나갈 수 있었다.
민주노조운동의 전진에 이윤과 현장통제력의 일부를 양보할 수밖에 없었던 자본가계급은 그러나 법과 제도, 국가라는 우회로를 거쳐 다시 노동자계급을 압박해 들어왔다. 96년 정리해고제, 파견법 도입을 신호탄으로 노동법개악에 근거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현장으로 본격적으로 밀어닥쳤다. 이에 민주노조운동진영은 첫 총파업까지 성사시키면서 맞섰으나 결국 신자유주의 공세에 현재까지 수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렇지만 민주노조운동이 자본의 반격에 맞서는 과정에서 노동자정치세력화에 대한 대중적 열망이 형성될 수 있었고, 그 결과로 수세에 몰리는 상황에서도 민주노동당 창당이라는 ‘한계 속의 성과’를 획득할 수 있었다. 국가를 통한 자본의 우회적 반격에 대응하는데 현장에 기반을 둔 투쟁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점을 절감한 민주노조운동진영은 “노동자도 정체세력화를 해야 한다”는 열망을 품게 된 것이다. 그리고 민주노동당 창당은 이러한 대중적 열망을 실체화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의미가 있었다(그래서 노동자정치세력화 열망을 재생산할 수 있었다).
노동자정치세력화 열망을 배반한 민주노동당
민주노동당은 노동자정치세력화에 대한 열망을 동력으로 2004년 총선에서 원내진출을 이뤄냈다. 이는 민주노조운동의 목소리를 의회에서 직접 낼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 그리고 진보불모의 한국정치지형에 첫 파열구를 냈다는 점에서 큰 성과였다. 그러나 총선 이후 민주노동당이 지금까지 달려온 길은 실망스럽게도 내리막길이며 퇴보의 과정이었고, 이번 2007년 대선참패는 결국 민주노동당이 정치적 몰락위기에 처하게 되었음을 드러내었다.
민주노동당이 몰락위기에까지 몰리게 된 핵심이유는 자신의 존재근거인 노동자정치세력화의 의의를 대공장노조 대변이나 체제안주적 의제제시 등의 협소한 틀에 가두고 왜곡함으로써 그 열망을 배반했기 때문이다.
노동자정치세력화가 온전히 발전하기 위해서는 일부가 아닌 노동자계급 전체의 이해와 의지를 대표할 수 있어야 하며, 노동자정당이라는 자기정체성의 진정성을 노동자계급에게서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은 2005년 울산불파투쟁 방기와 당에 대한 민주노총당이라는 비아냥거림(이것이 민주노총이 대공장정규직노조 중심으로 굴러간다는 비판과 짝패임은 주지의 사실이다)에서 드러나듯이 비정규직 문제의 해결에 진정성있게 나서지 않았다.
또한 민주노동당은 자본주의로 인한 노동자, 민중의 인간다운 삶의 파괴가 급속하게 확대되고 있는 정세에서 자본주의의 야만성을 적극적으로 폭로하고 부정의한 체제를 지양해가는 급진적인 요구를 걸고 투쟁하기보다, 오히려 자본주의에 위협적이지 않은 체제안주적인 실천만을 반복하여, 보수정당과 별 다를 바 없는 당으로 전락했다. 그 결과 열우당2중대, 범여권으로 불리며 마땅히 심판받아야 할 세력과 한 묶음으로 취급받은 끝에 노동자, 민중에게 함께 심판받고 만 것이다.
이제 사회주의정당만이 노동자정치세력화 열망을 계승할 수 있다
민주노동당이 비정규직 문제의 해결 및 노동자계급 전체 이해를 대표하는데 실패한 것, 아니 사실상 의도적으로 회피한 것은 오늘날 이러한 과제의 해결 자체가 자본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급진적인 투쟁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체제와 정면대결하려는 태세, 반자본주의 투쟁기조를 구조적으로 결여하고 있는 민주노동당이 당면과제의 해결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자본주의 즉 노동에 대한 자본의 독재, 이윤을 최우선하는 체제가 노동자계급에게 질곡으로 작동하고 있음이 더욱 분명해진 오늘날, 노동자계급에게 있어 유일한 진보는 반자본주의, 그리고 공공선의 실현을 위한 경제와 노동자의 자기결정을 추구하는 사회주의이다. 따라서 반자본주의 기조를 분명히 하는 사회주의정당만이 노동자계급을 온전하게 대표할 수 있는 정치세력이 될 수 있으며, 민주노동당이 배반한 노동자정치세력화 열망을 이어갈 수 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사회주의정당으로의 발전가능성이 없는 민주노동당은 반자본주의 기조에 동의하는 세력과 그렇지 않은 세력으로 분화되어야 한다. 사회주의자들은 민주노동당 내에서 비판자의 역할에 자신을 가두어놓지 말고, 독자적인 사회주의세력화를 위한 실천을 결단해야 한다. 또한 노동자정치세력화 열망 계승 및 반자본주의 투쟁 예각화라는 관점에서 괴리되어 있는, 종파적인 종북주의청산 기조에 근거한 ‘새로운 진보정당운동’에 대해서는 그것이 민주노동당의 오류를 답습할 수밖에 없음을 철저하게 비판하자.
사회주의정당 건설을 결코 선언이 대신할 수 없다. 그러나 실천의 첫 걸음은 언제나 결단일 수밖에 없다. 이 길이 옳고 합당한 길이라는 결론이 서면 단호하게 결단하고, 행동에 옮기자! 우리에게는 사그라지지 않은 노동자정치세력화 열망과 인간다운 삶을 향한 반자본주의 투쟁, 그리고 혼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