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해방실천연대의 기관지 사회주의정치신문 해방

[32호] 티베트 사태를 어떻게 볼 것인가?

티베트가 피로 물들고 있다. 중국정부의 언론통제로 정확한 사상자는 알 수 없지만, 베이징 올림픽을 앞둔 중국은 국제적인 비난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티베트 독립운동은 국제사회의 관심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고 있고, 이에 반해 중국은 ‘인민전쟁’도 불사할 거란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사회주의자는 민족자결권을 옹호한다

티베트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전에 일단 사회주의자는 민족문제에 대해서 어떠한 관점을 가져야 하는가라는 기본적인 전제부터 정리하기로 하자. 사회주의와 민족문제는 옛날부터 관심의 대상이었기에 그 기본적인 전제는 명확하게 나와 있는 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회주의자는 모든 민족독립과 자결권을 옹호해야한다. 즉, 민족적 억압에 기초하여 어떤 국가의 경계 안에 피억압민족들이 강압적으로 억류되는 것에 반대해야 한다. (물론 사회주의자들은 억압을 당하는 민족의 노동자와 억압을 하는 민족의 노동자 사이의 완전하고 절대적인 단결을 위해 싸우고 이를 유지하려고 해야 한다. 이러한 단결이 없다면, 자본가들의 민족주의적 술책에 빠져서 각 민족의 노동자 계급의 억압만 깊어지기 때문이다.)

원래 ‘노동자에게는 조국이 없다’는 말처럼 사회주의는 민족국가의 틀을 부정한다. 민족주의는 피억압민족이나 억압하는 민족이나 마찬가지로 그 민족 안의 노동자계급을 억압할 뿐이다. 자본주의로 하나가 되어가고 있는 세계 속에서, 민족국가란 사실 자본가들이 자신의 노동자들을 착취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내는 기구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억압하는 제국주의 현실 속에서 사회주의자는 모든 민족의 자결권을 옹호하고 이를 위한 투쟁을 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민족의 독립이 지상과제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민족적 분리를 없애기 위해서다. 인류는 모든 억압된 민족들의 완전한 해방과 분리의 자유를 가지고 있을 때에만 민족들의 경계가 사라지고 민족 간의 융합을 이뤄낼 수 있기 때문이다. 각각의 민족이 충분한 독립의 자유를 가지고 각 민족의 구성원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게 된다면, 민족국가라는 굴레를 스스로 벗어던지게 될 것이다. 경제적 진보의 관점에서나 대중들의 이득의 관점에서나 커다란 국제적 연대를 형성했을 때의 이점은 사실 의심할 여지가 없다.


티베트 사태의 원인

이제껏 티베트 독립운동은 역사가 깊다. 1950년 중국 인민해방군에 의해 병합된 이후 59년에 독립을 요구하는 민중봉기가 있었고, 89년에도 소요가 존재했다. 종교가 세속사회를 지배하는 티베트의 특유의 봉건적 질서 속에서 달라이라마는 종교지도자이면서, 중국에 권력을 빼앗긴 구지배층이고, 티베트 독립운동의 지도자이기도 했다.

59년의 봉기가 실패하자 달라이 라마는 자치정부 관리 및 추종자 약 1,000명과 함께 인도로 망명하여 후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중국의 티베트 탄압에 대한 국제적 관심 제고를 위해 대외활동을 적극 전개한다. 주로 선진 서방권을 대상으로 티베트의 열악한 인권상황을 알려서 서방권이 중국에 대한 압력행사를 호소하는 방식으로 독립운동을 해왔다. 그래서 달라이라마가 친미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사실 부정하기 힘들다.

그렇기에 중국은 이번 시위의 배후로 달라이라마를 지적하고 이와 연동하여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음모가능성을 제기한다. 물론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서 아프간에 무기를 뿌려대고, 이란을 견제하기 위해서 이라크에 후세인을 키워낸 미국을 기억한다면 아예 빈말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하지만 본토에서 축출된 지 거의 50년이 되가는 달라이라마가 본토의 시위의 배후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봐도 어불성설이다.

이번 티베트 독립 투쟁은 티베트 안에 있는 주민들이 중심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물론 시위의 중심에는 승려들이 여전히 존재하지만, 이미 달라이라마의 비폭력 노선은 찾아보기 힘들다. 외부의 세력이 아무리 노력해도 티베트 민중들의 적극적인 결합이 없었다면 이렇게 폭발적인 시위를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티베트의 민중들은 왜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원하는가?

그간 티베트 독립운동의 핵심이 달라이 라마였다는 사실을 보더라도 티베트 본토 내의 저항이 그리 심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법에 명시되어있는 중국 민족정책은 소수민족에 대한 상당한 배려가 존재해왔다. 중국의 전국인민대표대회 의석비율을 소수민족에게 2배가량 배정해주며, 소수민족은 한 자녀만 낳는 산아제한 정책도 적용받지 않는다. 소수민족을 위한 대학가산점을 받고, 소수민족 대학도 존재한다. 자치지역구에서는 조선족 동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소수민족의 문자와 풍습, 관습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90년대 들어와서 중국은 강한 융화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핵심은 바로 한족의 강제이주였다. 강제이주로 티베트 내에서는 자치도, 고유한 민족문화를 지키는 일도 어려워졌다. 10억이 넘는 한족이 500백만 정도인 티베트인을 제치고 티베트 자치구에서 다수가 되는 것은 너무도 쉬운 일이다. 이번에 티베트 독립시위에서 한족의 상점들에 방화를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주정책에 대한 티베트인의 적대심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강제이주정책은 이제까지 인정해왔던 자치민족의 영토적 경계의 틀을 해체시켜버린다. 실제로 자치구라는 형식으로 소수민족에 부여됐던 자치는 다수민족이 이주해버림으로써 형해화된다. 과거 소련에서는 스탈린 집권이후 강제이주를 통한 민족지배를 노골적으로 진행했는데, 이는 소수민족에 대한 자결권을 옹호함으로써 그 민족 스스로 소비에트 연방으로 참여했던 이전의 사회주의적 방법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이런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은 곳곳에 민족분쟁의 씨앗을 뿌려 소련이 해체된 이후에도 분리된 나라들에서 계속되는 갈등을 만들고 있다.


민족주의를 신봉하는 자본주의 중국

그렇다면 중국의 이런 강한 융합정책은 도대체 어디서 기인하는가? 그것은 지역적으로 엄청난 불균형을 가지며 발전하는 중국의 자본주의발전 과정 때문일 것이다. 중국은 자국의 자본주의발전을 위해서 민족주의를 꺼내들고 노동자계급의 수탈을 도모하고 있다. 한족의 융합정책과 맞물려 진행되고 있는 역사왜곡만 보더라도 중국은 인민의 해방구 사회주의 중국을 부르짖는 것이 아니라, ‘중화’라는 옛 봉건사회의 영광을 호출하는 것이었다. 세계의 공장이 되어버린 중국은 노동자에게, 엄청난 도시 농촌 간의 불균형 발전 속에서 희생된 농민들에게, 그리고 진정한 사회주의에는 있어서는 안 되는 빈민에게 위대한 ‘중화’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리고 자원 때문에 혹은 시장을 확대하기 위해서 중국은 영토적 경계를 명확히 하고 이전에는 자치구로 인정했던 곳에서 민족적 분쟁가능성을 미연에 막는 것도 필요하다. 강한 융화정책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 기인한다.

그러나 문화적으로 이질적인 티베트 인들에게 이런 중국의 민족주의가 먹힐 리는 만무하다. 자본주의를 해야 한다면, 티베트 인들은 중국에 예속되기 보다는 광대한 영토와 엄청난 자원을 보유하고 있는 티베트의 독립을 통해 세계 자본주의 시장에 직접적으로 진출하는 것이 자민족의 자본주의 발전에 유리한 방향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 결국 중국은 사회주의를 포기하고 자본주의 발전을 택한 순간 강한 민족적 대립에 직면하고 있다. 티베트뿐만 아니라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서도 강한 저항이 조직되고 있으며, 중국은 이를 통제하기 위해서 이전에 제국주의국가가 그러하듯이 무력을 사용하고 있다.


새로운 민족주의의 시대

구소련이 무너지면서 민족주의는 대세가 되었다. 체첸의 전쟁이나 티베트 사태도, 중국도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자본주의적 발전을 염원하는 자본가들의 나라에서는 어김없이 민족주의가 발호한다. 민족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는 세계화시대에 한편에서는 경쟁하기 위해 끊임없이 민족을 부르짖는 기현상이 벌이지고 있다. 세계경제가 통합이 되면 될수록 자본주의적 시장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자국의 노동자들과 자원을 더욱 수탈하기 위해서 민족주의는 ‘위대한’ 이데올로기가 되고 있다.

인간이 신분제로 예속된 ‘천민’을 넘어서 평등한 공화제적 ‘국민’이 되었을 때까지만 해도 민족주의는 발전의 모습이었다. 경제적으로는 국가차원의 시장이 열려 국가차원의 노동분업이 이뤄지고 정치적으로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국민의 권리를 얻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민족주의는 그렇지 못하다. 세계적 차원의 분업은 이미 심화되고 있고, 자유와 평등은 자본주의 발전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억압당하고 있다. 지금의 민족주의는 개개의 인간에게 피해만 줄 뿐이다. 자본주의와 민족주의의 결합은 사회주의와 노동자계급의 국제연대로 대체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모든 민족에게 자결권을 주어야 한다는 사회주의자의 원칙은 그 방법에 대한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하게 한다. 사회주의자들은 티베트처럼 강제적 융합과 계속되는 폭력진압으로는 어떠한 것도 바꾸어 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회주의자는 각 민족이 자유를 통해 사회주의로 나아갈 것임을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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