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이후 구조적 장기불황
전후 자본주의는 전후 재건이 끝난 50년대부터 70년대 초까지 예외적인 장기호황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자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이제 자본주의에서 ‘공황’이 사라졌다고 하거나, 이 시기를 자본주의의 ‘황금기’라고 치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후 자본주의는 위기 없는 부단한 발전을 향해 순항하고 있던 것이 아니라, 이윤율이 저하하고 인플레이션이 급등하며 심각한 대량실업이 발생하는 장기적인 구조적 위기로 나아가고 있었다. 이러한 구조적 장기불황은 전후 자본주의의 발전이 과잉축적을 낳으며 이윤율을 지속적으로 저하시켰기 때문이었다.
이윤율의 저하와 금융화
이러한 자본주의의 위기는 주기적 공황의 성격을 넘어서 자본주의 발전에 내재한 이윤율 저하의 경향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자기 증식하는 가치’인 자본의 최대목적은 끊임없이 자신의 몸뚱이를 팽창시키는 것이다.
이 몸뚱이가 커지는 비율을 결정짓는 이윤율은 자본가의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경제활동 동기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이윤율이 저하하게 되자 자본가들은 심각한 위기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이윤율의 저하와 생산부분의 축적에 투하되지 못하는 과잉자본의 증대는 결국 과잉자본이 생산부문의 이윤율보다 더 높은 수익성을 찾아 투기의 길로 가게 만들었다. 더욱이 독점자본주의에 들어서서 거대 독점자본의 등장으로 생산활동에 들어가는 자본규모가 증대하면서 소규모 자본들은 생산자본으로 전화하지 못하고 투기화하게 된다.
따라서 현대자본주의의 금융화는 70년대 이후 분명하게 드러난 이윤율 저하의 결과로 생긴 과잉자본이 보다 높은 수익성을 위해 투기화, 부유화된 결과라 할 수 있다.
맑스는 이러한 금융화의 과정에 대해서 자본론 3권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윤율의 저하와 함께 노동의 생산적 사용을 위해 개별자본가가 필요로 하는 최소자본량은 증대한다.” “동시에 자본의 집적도 증대한다. 왜냐하면 어느 일정한 한계를 넘어서면 이윤율이 낮은 대자본이 이윤율이 높은 소자본보다 더 빨리 축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집적의 증대는 다시 어느 일정한 수준에 다다르면 이윤율의 새로운 저하를 유발한다.
그리하여 소규모로 분산된 많은 자본들은 모험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투기, 신용사기, 주식사기, 위기. 소위 자본과잉이란 항상 근본적으로 이윤율 저하가 이윤량으로 상쇄시키지 못하는 자본의 과잉을 가리키거나 또는 스스로 자신의 사업을 할 능력이 없어서 신용의 형태로 대사업가들에게 처분이 위임되는 자본의 과잉을 가리킨다.”
“실제 축적이 끊임없이 확대되는 경우에 화폐자본의 축적의 확대는 한편으로는 실제 축적의 확대의 결과일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실제 축적을 수반하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계기들의 결과일 수 있고, 마지막으로 실제 축적의 정체의 결과일 수도 있다.
이미 대부자본의 축적은 실제 축적과는 무관하나 그것을 수반하는 계기들에 의해 증대하므로 산업순환의 일정한 국면에서 끊임없이 화폐자본의 과잉이 발생할 수밖에 없으며 이 과잉은 신용의 발달에 의해 증대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화폐자본의 과잉과 함께 생산과정을 그의 자본주의적 한계를 넘어서까지 추진시켜야할 필요성, 즉 과잉거래, 과잉생산, 과잉신용 등이 전개될 수밖에 없다. 동시에 이것은 항상 반작용을 야기하는 형태로 발생할 수밖에 없다.”
맑스의 견해를 현실에 적용해보면 현재의 금융부문의 팽창은 “축적의 정체의 결과”로 볼 수 있다. 과잉자본은 생산부문에서의 낮은 이윤율을 만회하기 위해서는 위험성이 크지만 고수익을 얻을 수 있는 금융투기의 길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70년대 이후의 현대자본주의의 전개과정
70년대의 구조적 불황에 직면하여 자본가들은 신자유주의라는 새로운 방식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이는 이윤율 저하를 극복하기 위한 근본적 처방이 될 수는 없었다.
이윤율 저하가 자본축적의 결과물이기 때문에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공황의 과정을 통해 과잉자본에 대한 폭력적 청산이 이루어지고 소위 산업합리화가 이루어져야 하였지만, 거대자본화된 독점자본주의하에서 과잉자본의 폭력적 청산은 그 규모와 청산시의 파급력(편집자 주 - 파산, 사업장 폐쇄, 설비가동률 저하에 따른 실업증가, 인력구조조정과 사회불안 확대 등을 의미) 때문에 이루어지기는 어려운 조건이 되었다.
따라서 과잉축적 상태는 그대로 유지한 채, 감세나 노동자에 대한 착취의 강화를 통하여 이윤율을 높여보려고 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이는 언 발에 오줌 누는 정도에 불과하였다.
더욱이 세계공황의 파국적 결과에 대한 우려는 자본가들이 공황을 심화시키는 것을 회피하게 하였다. 과잉축적 상태가 해소되지 않는 상황에서 자본가들이 선택한 것은 이 과잉부분을 재정적자와 신용확대로 메우는 것이었다.
79년 미연준 의장 볼커가 시도한 긴축정책이 외채위기의 심화와 세계공황의 가능성 때문에 포기된 이후, 자본가계급이 택한 방식은 유효수요를 창출하고 신용을 확대하여 과잉축적, 과잉생산 상태에 있는 자본을 구해주는 것이었다.
80년대 초반 레이건 정부의 경우, 군비 지출을 확대하고 연방정부의 차입을 대대적으로 늘려 위기에 대응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연방정부의 재정적자를 천문학적 규모로 확대시켰을 뿐이다.
클린턴 정부에 들어서 균형재정을 실시하였지만, 이는 케인즈주의적 수요팽창이 사라졌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90년대에는 가계부채를 증가시키고, 주가거품 등을 통해 변형된 형태로 수요팽창을 하게 되었다. 특히 미국은 GDP의 73% 규모를 가계소비에 쓰는 최대의 소비국으로서 과잉축적 상태의 세계 경제를 지탱하는 역할을 하였다.
한편 97년 동아시아 위기에서부터 시작한 경제위기의 확산은 심각한 세계공황으로 확대일로에 있었다. 당시 미국은 헤지펀드였던 ‘롱텀캐피탈매니지먼트’가 무너지면서 금융체제 자체가 붕괴될 위험이 있었다.
이를 막기 위해 롱텀캐피탈매니지먼트에 긴급자금을 지원하였고, 연준 그린스펀 의장은 대대적인 주식부양을 하였다. 이로서 생긴 주식거품이 세계경제가 심각한 공황으로 나아가는 것을 저지하였다.
그러나 이 주식거품이 2001년에 꺼지면서 새로운 위기가 발생하였다. 이 위기는 다시 0% 수준의 금리인하와 부동산 거품으로 지연되었다. 금리인하와 부동산 거품은 상호 결합하여 미국민들이 막대한 신용확대를 누릴 수 있게 해주었으며, 이 신용확대를 통하여 세계경제가 유지될 수 있었다. 그 결과 남은 것은 재정적자와 경상수지 적자라는 미국의 “쌍둥이 적자”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드러난 가계부채의 누적이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는 금융전체로 확산되어 세계경제에 큰 타격을 주고 있다. 그리고 심화된 세계경제의 연관성 때문에 미국의 경제위기는 전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한국의 경우에도 2000포인트였던 주가가 1000포인트로 하락하고 무역수지 적자가 발생하며, 물가인상이 야기되고 있다. 중국 또한 몇 개월 사이 주가가 3분의 2이상 하락하였다.
이렇게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촉발된 금융위기는 점차 심화, 확산되어 전세계의 금융위기로 발전해가고 있다.(21세기 초반 세계자본주의 경제의 구조에 대한 분석은 해방 22호, “중국의 검은 화요일에서 미국의 부동산 거품 붕괴까지 세계자본주의에 공황은 임박했는가?”를 참조하기 바람)
요컨대, 현재의 금융부문의 팽창, 이로 인한 세계적 금융위기는 70년대 이후 자본주의 체제의 구조적 위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윤율의 저하는 과잉자본과 이 자본들의 투기화를 낳았다.
그리고 신자유주의로도 극복되지 않는 위기상황에서 세계자본주의체제는 미국의 신용확대, 소비팽창, 주식/부동산 거품을 통하여 전세계적인 과잉축적, 과잉생산 상황을 무마해왔다.
이러한 두 가지 요인은 상호 결합하여 엄청난 금융부문의 팽창을 낳았으며, 이러한 상황은 그 속성상 오래갈 수 없는 것이었다. 주류적 시각에서는 금융위기가 실물경제로 확산되었다고 보지만, 실상 금융위기는 실물경제 위기라는 빙산의 드러나 있던 일각에 불과하였다.
현시기의 자본주의의 위기상황은 자본주의의 모순이 어떠한 것인가를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위기를 낳은 이윤율 저하와 과잉생산, 과잉자본 등은 결국 자본주의의 생산력이 높은 수준에 발달하였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이 발전이 인류 전체를 위해 쓰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본주의의 위기만을 낳고, 대다수 인간들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게만 할 뿐이다.
한편에서는 과잉자본에 기인하는 금융부문의 팽창이라는 돈 놀음이 벌어지고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먹을 식량이 없어 진흙으로 쿠키를 만들어 죽지 못하고 생명을 겨우 유지하는 세계가 바로 자본주의이다.
한국에서도 금융위기가 심화되면서 노동자 민중들의 삶이 철저하게 파탄 나고 있다. 발전된 생산력이 낡은 생산관계와 충돌하고 있는 모습이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