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의 야만적인 ‘축적’ 본능에 제동이 걸렸다. 단순한 불황이 아니다. 경제공황이다. 금융 위기가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의 붕괴다. 그래서 2008년은 전 세계적으로 독점 자본가들의 똥줄이 타들어가기 시작한 해로 기억될 것이다.
1990년대 초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의 정치체제가 무너졌을 때 그토록 의기양양하게 사회주의를 조롱하며 야유를 퍼붓던 자본주의 중심국 미국의 시장경제가 줄줄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물경 20년도 지나지 않아서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금융위기가 어쩌고 실물경제가 저쩌고 하면서 호들갑이다. 부르주아 언론은 경기침체니, 불경기니, 장기불황이니 하는 식상한 말로 언죽번죽 지금의 상황을 묘사한다. 그냥 “우린 망했다”고 하면 될 것을.
‘재테크’의 함정과 ‘내 집 마련’의 환상에 숨은 속임수
물론 독점 자본가만 망한 게 아니다. 근근이 먹고사는 임금 노동자나 서민들 상당수도 이미 망했거나 망하기 일보 직전이다. 쌈짓돈이 모자라 빚까지 내어 ‘재테크’에 투자한 사람들 대부분이 지금 낙엽처럼 떨어진 주가시세를 지켜보며, 살 떨리는 겨울을 맞이하고 있을 것이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억울함을 억누르면서.
사실 지난 십여 년간 우리는 ‘재테크’니, ‘주식’이니, ‘펀드’니 하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재테크를 모르면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금융기관에서는 달콤한 말로 ‘투자’를 권했고, 숱한 서민들이 거기에 귀가 솔깃하여 지갑을 열었다.
그러나 ‘투자’라는 말의 뒷면에 ‘착취’가 숨겨져 있음을 알려주는 이는 별로 없었다. ‘재테크’라는 말이 불로소득을 정당화하는 뻔뻔한 신조어임을 지적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더욱이 그것을 거래하는 과정이 철저한 속임수에 기초한다는 것을 잘도 숨겼다. 그 결과 수많은 ‘개미’들은 자고 일어나면 원금까지 증발해버리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한편 국내 부르주아 경제학자들 모임인 미래경제사회포럼에서 내놓은 ‘한국 경제위기 국면의 전개와 정책 대응 시사점’ 보고에 따르면, 한국판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가 이미 진행 중이라고 한다.
국내 주택담보대출 금액은 2008년 8월말 기준으로 307조원 가량이며 이중 17.8~28.5%가 위험성이 높은 대출로 분석돼, 2007년에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맞은 미국(16%)보다 훨씬 높은 수치다.
일자리가 감소하고 가계 소득이 떨어지면 끔찍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끊임없이 집값이 오를 것이라고 선전하며, 건설 자본가들이 금융권과 결탁하여 한껏 부풀린 가격에 집을 팔아먹은 결과다. 한마디로 엄청난 ‘바가지’를 쓴 주택 금융 채무자들이 집을 날리고 망할 위기에 처한 것이다.
성장, 발전, 일자리 창출 논리는 허위 이데올로기
사실 지금의 경제 위기는 미국 발 금융위기와 이명박 정권의 실정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다. 80년대의 호황이 전두환-노태우 정권의 업적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다. 지금 위기의 배경에는 파시즘의 무덤에서 신자유주의의 꽃을 피워낸 김대중과 노무현 정권이 있다.
이명박 정권은 현상적으로는 김대중-노무현 정권과 대립, 단절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착시현상이다. 본질적으로 이명박 정권은 그들이 경멸해마지 않는 이전 정권을 훌륭하게 계승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지난 10년은 파시즘 세력보다는 남한의 기층 민중에게 ‘잃어버린 10년’이었다.
지난 정권 10년, 다수 대중이 착시현상을 겪는 동안 남한사회는 자본주의 최후 단계인 제국주의적 질서에 편입되어 왔다. 레닌에 따르면, 제국주의란 “독점체와 금융자본의 지배가 확립되어 있고, 자본수출이 현저한 중요성을 가지고 있으며, 국제 트러스트들 간의 세계분할이 시작되고, 자본주의 거대열강에 의한 지구상의 모든 영토분할이 완료된 발전단계에 있는” 자본주의를 말한다.
남한 자본주의는 이른바 ‘성장’과 ‘팽창’의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그런데 성장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자본의 이익을 위한 것이지, 노동자계급을 위한 것이 아니다. 성장은 인간과 자연에 대한 착취를 밑절미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장을 해야 모두 잘 살게 된다’는 논리는 ‘착취를 당해야 잘 살게 된다’는 말과 같다. 또 남한의 자본가들은 ‘안정된 착취’를 ‘일자리 창출’이라는 말로 교묘하게 위장한다.
고대 노예들은 직접적인 폭력에 의한 착취, 즉 눈에 보이는 ‘정직한’ 착취를 당하면서 스스로 사슬을 끊었다. 하지만 자본주의적 착취는 바람 같은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어느 순간 폭풍이 되어 나무를 부러뜨리고, 배를 뒤집는 바람 말이다.
그렇듯, 호황기에는 살랑살랑 불던 바람이 불황을 거쳐 공황에 이르면 폭풍으로 몰아친다. 그 거친 바람에 지금 노동자와 민중의 삶이 통째로 날아가고 있다.
부족해서가 아니다. 과잉생산과 과잉축적의 결과다. 예컨대 미국에서 잠재적으로 생산 가능한 식량만으로 전 세계 인구가 먹고 살 수 있다. 또 프랑스에서 생산한 곡물로 유럽 전체가 먹고 살 수 있다.
그럼에도 세계 한 편에서는 굶어죽는 어린이의 무덤이 늘어만 간다. 기아에 허덕이는 어린이의 생명보다, 끝없는 이윤 추구와 자본 축적을 신성불가침의 권리로 보호하는 제국주의적 속성 때문이다.
이제 사회주의가 대안이다
하지만 인류역사상 영원한 체제도, 영원한 제국도 없었다. 고려도 망하고 조선도 망했다. 요컨대 고대 로마제국의 노예들은 자신들의 고달픈 신세를 견디다 못하여 대탈출을 감행하였고, 그로 인하여 로마사회는 생산력이 급격하게 떨어져서 결국 망했다.
이제 자본주의가 역사의 관 속에 들어갈 때다. 더불어 그 빈자리는 이제 노동자계급이 차지해야 한다. 물론 몰락한 자본가들이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노동자계급에게 순순히 물려줄 리는 만무하다. 그래서 해고와 실업, 파산 등 당분간은 많은 고통이 따를 것이다. 그러나 고통에 직면한 노동자계급과 민중은 비로소 자신의 존재가치 또한 찾아 나가게 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 자본주의의 무덤 위에 서 있다. 하지만 그 무덤 위에서 지금과는 다른 세상이 펼쳐질 것이다. 그 세상에서는 풍요로움보다는 소박함이 미덕이고, 많이 가진 것보다는 많이 나누는 것이 더 행복하다.
맹목적 경쟁보다는 여유로운 공존을 추구하고, 조작된 편리함보다는 자연스러운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하는 나라, 착취에 의한 자본축적이 없는 나라, 그것이 진정으로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세상, 사회주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