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상한 점은, 수용소로 끌려가는 발걸음이 왠지 너무 얌전하다는 것이다. 죽음에 이르는 마지막 길에서 한번쯤 커다란 저항이 일어날 법도 하건만, 그건 관객의 희망사항일 뿐이다. 실제로 죽음의 수용소로 가는 도중에 저항이 일어났다는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나치 치하에서 희생된 유태인들. 그들은 왜 죽음 속으로 질서정연하게 걸어 들어갔던 것일까.
유태인이 죽음 앞에서 침묵한 것은 독일군의 거짓말 때문
예컨대 철도 교통의 요충지에 세워진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원래 나치에 저항하는 폴란드 사람들을 격리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그곳이 학살 수용소로 이용된 것은 1941년 말부터였다. 하지만 그 후에도 4개의 가스실을 갖춘 제2수용소에서만 학살이 이뤄졌으며, 제1수용소와 제2수용소 일부는 여전히 노역시설로 이용되고 있었다.
유태인이 죽음 앞에서 침묵했던 이유는, 결국 독일군이 정교하게 연출한 거짓말 때문이었다. 기차에 오르기 전에 독일군은 ‘노동력이 필요한 곳으로 집단 이주할 것’이라고 속이며 유태인을 모았다. 일부 유태인에게는 우크라이나에 상점을 열도록 해준다는 계약서까지 써주었다고 한다. 당시 유태인들은 자신들이 죽으러 간다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유태인 90만 명을 학살했다는 인간 도살장 트레블링카 수용소. 거기서도 독일군은 각종 표지판에 문자화된 거짓말로 유태인을 속였다. 그곳 플랫폼에는 다른 지역으로 가는 길을 안내하는 방향표지판과 기차 시간표 따위가 붙어 있었다.
누가 보아도 그곳은 실제 역사(驛舍)였고, 다른 노동수용소로 가는 도중에 잠시 머무르는 임시수용소 같았다. 더불어 독일군은 ‘다음 기차를 타기 전에 위생을 위하여 반드시 목욕을 해야 한다’는 등의 수칙을 표지판에 적어 놓았다. 모두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운동장에는 꽃이 만발하고, 확성기에서는 고상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아우슈비츠. 1백만 명 이상이 학살당한 그 수용소 가스실 입구에는 ‘샤워실’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또 ‘옷을 벗은 위치를 표시해 둬야 나중에 옷이 바뀌지 않는다’는 내용의 안내문도 있었다. 그리고 유태인들에게 비누 한 조각씩을 나누어 주며 독일군은 마지막 거짓말을 한다.
“여러분의 위생을 위해 목욕부터 할 것이다.”
그 거짓말에 따라 유태인들은 가짜 샤워기가 붙어 있는 가스실 쪽으로 걸어갔다. 250명가량을 수용하는 목욕탕이 꽉 차면 살인기술자들이 출입문을 잠그고, 가스 밸브를 열었다. 그로부터 20분 남짓 지나면 유태인은 모두 마른 풀잎처럼 쓰러졌다. 그리고 시체들은 곧 소각장이나 매립지로 옮겨 처리되었다. 모든 일은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그렇게 24시간을 가동하면 하루 최대 9천 명을 처리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처럼 대규모 ‘도살 공장’을 운영하는 데 필요한 독일인 인력은 극히 적었다. 아우슈비츠의 경우 독일 경비대원은 151명이었고, 트레블링카 수용소는 고작 40명이 운영하였다. 나머지 경비는 우크라이나 경비대를 활용하였고, 시체 처리는 유태인 중에서 뽑은 작업 인부들에게 맡겼다. 물론 그들도 나중에 처형을 당하지만.
거짓말에 대한 히틀러의 믿음
어이없게도 다수를 학살한 것은 극소수였다. 지배하는 소수가 거짓말에 능숙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거짓말은 물리적 힘보다 더욱 무서운 폭력이다. 학살의 주범 히틀러는 “거짓말 규모가 거짓말을 믿게 하는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말했다.
히틀러는 이미 제2차 세계대전 직전인 1938년, 영국과의 외교협상에서도 거짓말로 재미를 보았다. 그는 당시 영국 측에 “체코슬로바키아가 국경을 새로 정하는 것에 대해 협상한다면 전쟁은 피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 때문에 영국을 비롯한 서방세계는 방심하였다. 하지만 히틀러는 곧 전쟁을 일으켜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군중은 극적인 거짓말에 쉽게 넘어간다는 것이 히틀러의 믿음이었다. 게다가 큰 거짓말일수록 잘 먹힌다고 믿었다. 그는 군중을 매우 원초적이고 단순한 무리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 전쟁광은 또 “승리자는 진실을 말했는지 여부에 대하여 질문을 받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오로지 이기는 것이 진리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더불어 자신이 역사 속에서 영원한 승자로 남을 줄 알았을 것이다.
정치가가 되었으므로 거짓말을 하는 것일까, 아니면 거짓말을 잘 해서 유력한 정치가가 된 것일까. 히틀러만큼은 아닐지라도 자신의 권좌를 지키기 위해서 굵직한 거짓말을 했다가 곤욕을 치른 정치가의 예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미국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워터게이트 호텔에서 열린 민주당 전국위원회 때 행한 도청 및 무단침투 사실에 대하여 몰랐다고 주장했지만 곧 들통 나서 대통령직을 내놓아야 했다. 이른바 ‘워터게이트 스캔들’이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백악관 인턴직원과 바람피운 사실을 마지못해 시인하면서도 ‘성관계는 갖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한 침대에 있었어도 ‘삽입’은 하지 않았다고 벅벅 우기는 한국형 마초들이나 별로 다를 바 없다. 하지만 그는 당선되어 대통령직을 무사히 마쳤다. 닉슨 입장에서는 배 아플 일이다.
전쟁 기간에는 이른바 ‘전략’이라는 이름으로 거짓말이 정당화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총리였던 윈스턴 처칠은 “전시에 진실이라는 것은 너무도 소중하기 때문에 가끔 ‘거짓’이라는 경호원을 대동하기도 한다”고 궤변을 늘어놓았다. 어쩌면 그 어록마저 거짓말일 가능성이 높다.
한국 현대사의 거짓말쟁이들
한국의 역대 대통령들 또한 거짓말에는 일가견이 있는 인물들이다. 이들이 국민을 상대로 행한 거짓말을 책으로 엮으면 웬만한 도서관 하나쯤 채우고도 남을 것이다.
5.16 쿠데타를 일으킨 뒤 박정희는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추겠다”고 약속했다. 또 1963년 2월 27일에는 눈물을 흘리며 정치를 민간인에게 넘기고 자신은 대통령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선서를 하였다. 하지만 그는 영구 독재를 꿈꾸다가 부하의 총탄에 맞아 죽었다.
12·12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과 노태우는 자신들이 저지른 쿠데타는 물론이고 1980년 5·18 광주학살에 대해서도 줄곧 거짓말로 일관하였다. 특히 “내 재산은 29만 원뿐”이라는 ‘히트작’을 남겼다.
1992년, 이른바 ‘문민정부’의 대통령이 된 김영삼은 대선 직후인 1987년 12월 17일. “국민주권을 도둑질한 파렴치하고 부도덕한 정권과는 결코 같이 일할 수 없다”며 ‘노태우 정권 타도를 외쳤다. 하지만 그는 5년 뒤인 1992년, 자신이 ‘타도 대상’이라고 지명한 세력들과 ‘3당 야합’을 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한편 김영삼과 정치적 라이벌인 김대중은 1986년 11월, 야권 대통령 후보 단일화를 위하여 불출마를 선언하였지만, 이듬해 대통령 선거에 버젓이 출마하였다.
노무현은 ‘솔직함’이라는 이미지로 대권 도전에 성공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 이미지 또한 거짓이었음이 곧 들통이 났다. 그가 저지른 최대의 거짓말은 이른바 ‘진보좌파’ 흉내를 내면서 ‘보수우파’ 정책으로 일관한 것이다. 결국 그는 ‘검정새치’였던 셈이다.
거짓말이 일상화된 이 환멸스러운 메커니즘은 일찍이 시장자본주의에서 비롯되고, 돈 놓고 돈 먹는 금융자본주의에서 강화되었다. 상품을 팔아먹기 위해서는 거짓말이 필수다. 수많은 광고수단은 우리 일상을 거짓된 이미지로 덧칠하며, 모든 인간을 소비기계로 만들어버렸다. 더불어 상품화된 정치는 대다수 유권자를 거짓말에 무감각하고 무기력한 바보로 만들어 버렸다.
죽음의 수용소로 얌전하게 끌려 들어간 유태인의 뒤를 따르지 않으려면, 지금의 경제와 정치와 사회의 틀을 완전히 무너뜨려야 한다. 그것이 변혁이다.
박남일 - 자신을 저술노동자라고 부르는 박남일은 현재 인문서 출판기획과 저술활동을 하면서 칼럼을 연재한다. 청년심산문학상, 창작문학상 등을 받았고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한 우리말 풀이사전>, <청소년을 위한 혁명의 세계사>, <꿈 너머 꿈을 꾸다-정도전의 조선창업프로젝트> 등을 지었으며, KBS에 방연된 <역사의 라이벌>(전4권) 등을 엮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