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당 조합원들에게는 무기한 일을 주지 않겠다는 의미이므로 사실상 해고와 다를 바 없다. 지금 집단 해고 철회를 요구하는 노동조합의 투쟁은 5개월째 계속되고 있다.
조합원들은 지난해 6월 회사 임원진이 교체되자마자 노골적인 노조탄압이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회사가 민영화를 하려고 하는데 노조를 가장 큰 걸림돌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기획재정부가 지난해 10월 발표한 공기업 선진화 3차 추진방안에 따라 국가보훈처 소유의 88관광개발(주)은 민영화 대상으로 확정되었고, 88cc는 매각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다.
집회가 열리고 있는 골프장 정문에는 30여 명의 조합원들이 노란 옷을 입고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그들은 회사에서 요구하는 노조탈퇴 서약서와 회사에서 만든 자치회 가입을 거부하고 투쟁을 선택한 조합원들이다.
왜 이 힘든 투쟁을 선택했느냐는 질문에 조합원들은 “그냥 노조에 있고 싶으니까”, “노예가 되기 싫어서”라고 대답했고, 왜 회사가 아니라 노조를 선택했느냐는 질문에는 “노조가 자신의 이익을 보호해주니까”, “노조가 있어서 편안했다”고 대답했다. 솔직히 교과서 같은 이런 대답에 나는 적잖이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1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조합원들은 당당했다.
88cc 노조가 탄생한 건 정확히 1999년 10월 6일이다. 첫 임단협에서 그들이 얻어낸 건 출산휴가였다. 2006년엔 정년 40세를 57세로 올렸다. 전에는 일 끝나고 코스 청소하고 손님의 가방을 현관으로 나르는 일도 아무런 보수 없이 시키는 대로 해야 했지만, 임단협을 통해 일인당 교통비 만원과 식권 지급, 다음날 근무기회를 제공하도록 바꾸었다.
그들이 최우선으로 여겼던 것은 조합원들의 고용안정과 복지개선이었다. 그리고 그 혜택은 비조합원들에게도 똑같이 돌아갔다. 노조간부와 평조합원 사이의 괴리감도 없었다. 다들 언니고 동생이었다. 그들에게 노조는 가족이고 공동체였다. 그들은 투쟁의 경험이 있고 강고한 자부심이 있었다.
“노조 시작할 때 대부분의 언니들이 가입했기 때문에 저도 가입했어요. 그 땐 언니들 따라서 머릿수 채우기 바빴지, 특별한 건 없었어요.” 노조 출범 이후 계속 활동해온 위신애씨는 노조 경험으로는 선배지만 30대 초반이라 나이로는 아직 막내에 속한다.
“우리 일의 특성상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간부들은 수입을 일정하게 포기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간부들에 대한 조합원들의 신뢰가 있어요. 서로의 사정을 잘 알고 우리는 한마음이에요.” 점점 더 하면 할수록 노동자조직이 필요하다는 걸 절감한다는 그녀는 끝까지 싸울 거라고 한다.
“노조가 오래돼서 조합원들이 두려워하는 시기는 지났어요. 전에도 직장폐쇄 당하고 투쟁했던 경험도 있어요.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생계죠. 처음엔 동료들끼리 서로 빌려주고 했는데 지금은 조금씩 아르바이트 하고 있고 재정사업도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사실 대책이 없어요.”
그녀는 다섯 살짜리 아들을 둔 싱글맘이다. 투쟁의 현장에 항상 엄마를 따라 오는 아들은 엄마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아져서 좋아한다고 한다.
골프장이 으슥한 곳에 있는 탓에 돌아오는 길에는 조합원의 차를 타고 시내까지 이동했다. 짧은 시간에 이름조차 물어보지 못한 그녀는 답답함을 토로했다.
“국가보훈처를 상대로 싸울 때 우리 존재가 너무 미약하구나 그런 생각이 들면 몸에 불 지르시는 분들 심정이 이해가 가요. 방송국 앞에서 집회를 해도 사진 한 장 찍어가는 사람이 없어요. 아무도 관심을 안 가져요.”
대부분이 가장인 이 여성들은 이제 고단한 장기투쟁의 길로 접어든 듯하다. 삭발투쟁, 단식투쟁, 고공농성... 그들도 그 길을 밟게 될까. 집에 전기가 끊기고 수도세 달라는 소리가 무서워 초인종이 울리면 가슴이 내려앉았다는 한원cc 조합원들의 말들이 이제 그들의 현실이 될까.
의심이 많은 나는 그들에게 몇 번이나 물었다. 왜 그래도 투쟁을 선택했냐고. 그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노조를 탈퇴하면, 자신들은 그만두라면 그만둬야 하는 파리목숨이라고. 노동조합은 진정한 노동자의 학교인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