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23일, 현대미포조선 사측과 노조 그리고 민주노총 울산본부가 극적인 합의를 이루면서 이른바 미포투쟁이 끝났다. 합의서와 미공개된 이면합의서만 놓고 본다면 자본가계급은 백기투항한 셈이었다. 이는 현장활동가들이 끝까지 비타협적으로 투쟁했기 때문이며, 또한 사회적으로 미포투쟁을 지지하는 여론이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미포투쟁은 조합원을 투쟁주체화 하는데 철저하게 실패한 투쟁이었다. 이는 단지 이번 투쟁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정확하게는 그동안 조합원들을 투쟁주체화 시키는데 실패해온 것이 이번 투쟁을 통해서 여실히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2. 대한민국 국민의 평균적인 의식보다 못한 민주노조 조합원?!
이번 미포투쟁에서 대외적으로 부각되지 않았지만 눈여겨 보아야할 것이 현대미포조선소 담장을 사이에 둔 안과 밖의 차이이다. 미포투쟁은 비정규직 해고자들의 복직투쟁에 ‘정규직’ 현장활동가들이 목숨을 걸고 연대한 투쟁이었기 때문에, 대의명분상 사측은 본질적으로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사회에서 비정규직 문제가 심각하고 시급히 해결해야할 사회적 문제라는 것은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 그래서 미포투쟁은 진보적 인터넷 언론은 물론, 중앙 일간지에도 소개되며 방송까지 탔다. 대신 투쟁 내내 미포 사측은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었다.
반면에 조합원들은 어떠했는가? 오히려 정반대였다. 일부 조합원들은 고공농성에 맞서 수백명 규모의 관제시위를 연일 전개했으며, ‘현사태의 혼란을 막자’는 어용 대의원들의 서명운동에 3천 조합원들 중 90% 넘는 숫자가 이틀 만에 동참했다.
왜 민주노조의 조합원들이 대한민국 국민의 평균적인 의식보다 못한 보수적(?) 집단이 되었는가? 미포 사측의 탄압 때문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현장활동가들이 목숨까지 걸고 투쟁하는데 조합원들이 사측의 탄압에 반발해 역으로 투쟁에 동참했어야 맞다.
3. 어용노조의 실리주의 노선이 조합원을 노동자 계급이 아니라 이기적 개인으로 만들고 있다
그래서 어용노조에 주목해야 한다. 어용노조는 단순하게 사측의 노무관리 부서가 아니다. 분명히 형식적이나마 민주적으로 선출되었다. 즉 조합원의 선택이라는 얘기다.
이번 미포투쟁 과정만 보아도 어용노조는 철저하게 조합원들의 실리주의를 파고들었다. 먼저 어용노조는 용인기업 해고자들의 복직을 표면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았다. 다만 ‘과연 목숨까지 버려가며 해야 할 문제인가?’라면서 민주파 현장활동가들의 전투성을 문제 삼았다.
그래서 비정규직 문제 해결에 반대하느냐는 역공은 피해가면서, 투신과 고공농성 등에 공격의 초점을 맞추어 현장활동가들을 조합원 대중으로부터 고립시키고 ‘지양해야할 극단적 노동운동’으로 규정지었다.
그 다음 어용노조는 미포 내부의 문제라면서, 민주노총과 지역연대 동지들을 ‘외부세력’으로 규정하고 개입하지 말 것을 주장했다. 외부세력이라는 공격은 곧 미포 정규직 조합원들에게 사회와 분리된 채, 사업장 내부에서만 문제를 보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어용노조의 악선동은 노동조합을 이익집단이라고만 생각하게 만드는 실리주의에 철저하게 근거한 주장들이었다. 이렇게 어용노조는 조합원들이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을 수 있는 논리들을 끊임없이 제공해주면서, 노동자로서의 계급의식을 철저하게 파괴하고 조합원들을 이기적 개인으로 만들고 있었다.
어용노조가 줄기차게 자극하는 것은 조합원들의 고용과 복지가 최우선이라는 ‘순수한 노동조합’주의였다.
4. 조합주의적 현장활동으로 민주파가 어용노조를 이길 수 있을까?
그럼 이런 어용노조의 실리주의에 맞선 민주파 현장조직들의 현장활동은 어떠했는가? 안타깝게도 민주파 현장조직들의 현장활동은 철저하게 조합주의였다. 지난 몇 년 동안 민주파 현장조직들의 유인물만 본다면 어용노조와의 경계선은 더욱더 애매해진다.
어용노조와 대립했던 직책수당 문제, 민주노총 탈퇴 규약개정 문제 등 직접적으로 노동조합과 관련된 사안을 제외한다면, 한미FTA 반대, 광우병쇠고기수입 반대, 공안탄압 중단, 노동자정치세력화 등에서 어용노조와의 차이는 실질적으로 없었다.
그런데 조합원들을 노동자계급으로 주체화시켜내지 않고 조합원으로, 그것도 현대미포조선이라는 세계 중형선박 1위 조선소의 정규직 노동조합의 조합원으로만 주체화시켜 낸다면, 사측의 노무관리와 어용세력의 실리주의 노선에 당해낼 수가 없다. 그렇다면 고용을 보장받고 임금에서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으며 회사를 통해서 교육,의료,주택 등에서 복지혜택을 받고 있는,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를 어떻게 투쟁주체화 할 수 있겠는가?
발본적인 고민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단순히 어용세력이 아닌 민주파가 당선되기만 하면 현장이 살아난다는 것은 환상적 현실인식이다. 이미 민주노총에서 제명된 현대중공업노조 사례가 충분한 교훈이 되지 않는가.
이미 대공장 정규직 민주노조운동의 성격은 바뀌었어야 했다. 조합주의적 현장활동으로는 대공장 정규직 조합원을 주체화시키는 것이 불가능한 시대임을 자각해야 한다. 시급히 사회주의적 노동운동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를 들어 비정규직 문제만 해도 고도로 발전된 자본주의의 모순적 산물임을 총체적으로 인식할 때 대공장 정규직 조합원들이 투쟁에 나설 수 있다. 자본의 신자유주의적 노동유연화로 생긴 사내하청은 분명 조합원들의 고용안전판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초과착취당하는 집단으로서, 대공장 정규직 조합원들의 상대적 우위의 임금과 사내복지를 보장해주는 기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정규직보다 더 위험하고 더 힘들고 더 더러운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직접적인 실리를 넘어설 수 있는 계급의식을 고취하지 않고서 조합원들을 사내하청 비정규직 문제에 연대투쟁하도록 할 수 없다. 결국 조합주의적 현장활동이 아니라, 사회주의적 실천만이 답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반자본주의 선전과 선동이다.
대공장 정규직 조합원들 역시 자본주의 때문에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훼손당한다. 상대적으로 안정된 고용과 우위의 임금, 사내복지혜택이 있다지만 역으로 그것을 볼모로 사측은 공장에서 노동자로서의 양심마저 버리도록 한다.
사교육비나 내집마련 때문에 대공장 정규직 조합원의 노동시간은 여전히 세계 최고 수준이다. 사회가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삶은 더 고달파지는 게 자본주의 현실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에 대한 총체적 인식을 충분히 심화시켜낼 수 있다.
5. 민주파 현장조직, 무쟁의 10년 동안 조합주의 틀에 박혀있었다
1) 반자본주의, 사회주의 선전선동을 시작하자 : 울산이 노동운동의 메카라는데, 그 흔하디흔한 사회주의정치신문 한번 배포된 적이 없다. 그나마 사안이 터졌을 때에만 현장조직들이 유인물을 배포했고, 일상적이고 정기적으로 유인물을 제작하지도 않았고, 그 내용 역시 노동조합과 관련 있는 것뿐이었다.
2) 현장활동가 학습을 시작하자 : 현장활동가들이 그동안 학습 한번 제대로 한 적이 없다. 조합주의적 현장활동만 하는데 체계적인 학습에 대한 욕구가 생길 수가 없다.
3) 과도적 요구 투쟁을 전개하자 : 세계적 공황의 여파는 조선산업, 특히 대형조선소에도 미치고 있다. 자본의 위기전가에 맞서 과도적 요구 투쟁을 전개하자!
4)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의식화, 조직화를 시작하자 : 수리조선에서 신조사업으로 진출한 현대미포조선의 특성상, 미포에는 사내하청 비정규직 비율이 70%를 넘는다. 보통 대공장에서 정규직 비율이 압도적이고, 바로 옆 현대중공업만 해도 50% 내외인 것과 비교하면 미포의 경우 비정규직 사업장이라고 불릴 만할 정도이다. 하지만 무쟁의 10년 동안 현장활동가들은 비정규직 문제에 소극적이었다.
6. 사회주의적 노동운동으로 전환하라!
자본가계급에게 매수당하지 않았다고 해서 조합원들이 지지할 것이라는 착각을 버리자. 민주파가 당선되기만 하면 현장이 살아난다는 것 역시 환상적 현실인식에 가깝다. 대중은 영악하다.
어떻게 조합원들을 자본주의 사회에서 투쟁하는 노동자계급으로 의식화, 조직화할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 속에 사회주의적 노동운동으로 현장활동을 전환하지 않는다면 답은 없다.
민주노조운동이 망해간 원인은 단순하게 매수당한 노조관료들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이미 자본가계급에게 영혼을 팔아먹은 자들이고 노동자계급은 그들에게 아무런 기대조차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해서 사회주의적 노동운동으로의 전환이 요구되는 시대적 상황에 부응하지 못하는 민주노조운동의 보수적 현장활동가들이 노동운동 위기의 주범임을 명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