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공과 애국은 항상 짝이 되어 우리 뇌리에 각인이 되었다. 남자들은 ‘신성한’ 국방의 의무에 동원되어 군대에서 전쟁 기술을 익히고 온 것을 자랑스레 여겼다. ‘국가보안법’이라는 야만적 법률에 의하여 개인의 생명과 인권이 무참하게 유린당하는 일쯤은 ‘국익’이라는 말 한마디로 덮어버렸다. 개인의 권리와 인권을 입에 올리면 국가를 위협하는 ‘빨갱이’로 낙인찍으면 그만이었다.
21세기에 들어와서도 맹목적인 국가주의는 이어진다. 한국인은 세계 다국적 자본의 홍보이벤트장인 월드컵이나 올림픽이 열리면 시청 앞 광장에 모여 ‘대한민국’을 목이 터져라 외치며 응원하는 것을 숭고한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국가주의자들은 거리에서 죄 없는 이웃이 공권력이라는 이름의 군홧발에 짓밟히고, 방패 모서리에 찍혀 피를 흘려도 그저 냉랭한 눈길을 보낼 뿐이다.
국가라는 이름의 괴물
그런 동안에도 국가의 폭력은 이어진다. 급기야는 개발이익에 눈먼 건설투기자본의 횡포에 시난고난 힘없는 저항을 하던 용산 철거민들이 공권력의 무자비한 진압에 떼죽음을 당했다.
그래도 이 땅의 국민은 그저 덤덤할 뿐이다. 그뿐이랴. 옥상의 화마(火魔)속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철거민들이 ‘공무집행방해’ 따위의 올가미를 뒤집어쓰고 철창 속에서 절규해도 돌아보는 사람이 별로 없다.
모든 것이 국가와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일들이다. 개인에 대한 억압도, 폭력도, 심지어는 살인까지도 국가의 이름으로 행해지면 정당화되고 만다. 국가란 도대체 무엇이기에, 이토록 힘없는 개인에게만 잔혹한 것일까?
플라톤은 일찍이 <국가론>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이상적인 국가상(像)을 그려냈다. 그가 추구하는 이상 국가는 정의로운 통치자 계급이 다스리는 공동체다. 플라톤은, 통치자는 약자의 이익을 대변한다고 믿었다. 그러면서 통치자를 개에 비유하기도 한다. 주인과 낯익은 사람에게는 꼬리를 치며 반기지만, 낯선 사람과 적을 만나면 으르렁거리며 용맹하게 덤벼드는 명견 말이다.
또한 플라톤은 지혜와 용기와 절제를 겸비한 철학자가 통치하는, 정의로운 국가를 꿈꾸었다. 하지만 자고이래(自古以來) 명멸한 국가의 꼴들을 보면, 플라톤의 국가론은 다분히 몽상적인 그림일 뿐이다. 게다가 플라톤 시대나 지금이나, 국가를 다스리는 통치자들은 명견(名犬)이 아니라 아무에게나 으르렁거리는 변견(便犬) 같은 존재들이 대부분이다.
한편, 중세 영국의 정치사상가 토마스 홉스는 <리바이어던>이라는 책에서 ‘국가’라는 개념을 한층 구체적으로 형상화하였다. 그에 따르면 국가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에서 탄생한 합의체다.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 간의 자잘한 싸움에 지친 인류가, 그러한 싸움을 피하기 위해 만든 기구라는 것이다.
더불어 그 기구를 통치하는 군주는 절대 권력을 위임받은 괴물이다. 홉스는 그 괴물의 이름을 ‘리바이어던’이라고 하였다. 구약성서 ‘욥기’에 나오는 무적의 바다짐승 이름에서 차용한 것이다.
국가는 개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주는가?
홉스의 <리바이어던>은 지난 20세기에 이르러 대대적으로 실험되었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인 세계에서 국가가 없다면, 포악한 개인의 폭력이 난무하게 될 것이라는 논리가 전 세계적으로 관철되었다.
더불어 국가가 전쟁이나 범죄로부터 개인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이 세계인의 뇌리에 각인되었다. 그렇다면, 과연 세계의 국가들은 지난 100년간 그러한 믿음에 보답하였을까?
불행하게도 국가는 토마스 홉스와 20세기 인류의 믿음을 완전히 배반하고 말았다는 것을 입증하는 자료가 있다. 하와이대학 교수 럼멜의 <정부에 의한 죽음>이라는 책에 따르면, 지난 20세기 100년 동안 전 세계에서 2억 3백만여 명이 군대와 경찰 등 공권력에 의하여 살해되었다고 한다.
인류 역사상 유난히도 전쟁이 많았던 시기인 만큼 그리 놀랄 일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역시 놀랄 수밖에 없는 것은, 이 가운데 83%인 1억 6천9백만여 명이 민간인이고, 전사한 군인은 17%인 3천 4백만여 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더욱 경악할 것은, 사망자의 65%인 1억 3천여만 명이 자신이 속한 국가 권력으로부터 살해되었다는 사실이다.
어이없게도 지난 100년간 국가는 자국민에 대하여 일상적 폭력을 행사해 왔다. 미국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는 정치학자 더글러스 러미스는 <경제성장이 안 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라는 저서에서, 그 상시적 국가 폭력을 세 가지로 밝히고 있다.
첫째는 ‘경찰권’이다. 국가는 ‘범죄자’ 혹은 ‘용의자’를 체포하여 구속할 수 있다. 대중은, 체포된 용의자에 대한 인격적 모욕이나, 잠을 안 재우는 따위의 고문쯤은 너그러이 눈감아 준다. 더러는 흉악한 범죄자에 대한 대리 보복쯤으로 여기기도 한다.
둘째는 ‘처벌권’이다. 국가는 구금된 용의자에 대하여 얼키설키 짜놓은 법조문을 들이대며, 몇 년씩 좁은 방안에 가두어 두기도 하고, 강제로 노역을 시키기도 한다. 또 ‘벌금’이라는 명목으로 돈을 빼앗기도 한다.
셋째는 ‘교전권’이다. 한마디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흔히 외세의 침략에 대비한 방어적 권리를 뜻한다.
납치, 구금, 갈취, 살인이나 다름없는 국가의 폭력이 공권력, 또는 법집행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동안에도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줄어든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더불어 지난 20세기 동안 한국 군대의 교전권 또한 베트남 침략전에서 양민을 학살하거나 한반도 내전 상황에서 자국민끼리의 교전에 발휘되었을 뿐이다.
용산 참사는 자국민에 대한 정부의 선전포고
오늘날 자행되는 국가의 폭력에는 필히 자본이 결합되어 있다. 그리하여 자본국가는 총이나 칼뿐만 아니라 ‘경제발전’이라는 허위 이데올로기로 자국민의 뇌리에 폭력을 내면화시킨다.
또한 개발과 성장을 하지 않으면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공포를 퍼뜨려, 만인에 대한 만인의 일상적 폭력을 강요한다. 뉴타운 개발과 용산 참사는 바로 그 자본국가의 폭력이 구체화된 것이며, 눈에 보이지 않는 수탈 구조의 한 단면일 뿐이다.
자본주의는 이윤을 먹고 산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제 아비 무덤이라도 파헤쳐 팔아먹는 게 자본주의 체제의 생리다. 물론 아무 때나 그러하지는 않는다. 일에도 순서가 있는 법. 가장 많은 이윤이 나는 곳에 가장 먼저 삽질을 시작한다.
그런 점에서 서울의 ‘뉴타운’ 개발이야말로 건설투기자본이 군침을 질질 흘릴만한 사업임에 틀림이 없다. 똥냄새를 맡고 똥파리들이 꼬이듯, 돈 냄새를 맡은 세력들이 꾸역꾸역 모여든 용산에서, 공권력이 철거민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한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하지만 용산 참사는 이명박 정권이 이끄는, 대한민국이라는 자본국가가 앞으로 자국민에게 가할 폭력의 시작일 뿐이다. 그것은 자국민에 대한 정부의 선전포고이며, 그 전쟁은 자본주의 국가 체제가 해소되지 않는 한 계속될 것이다. 국가의 본질은 폭력이므로.
박남일 - 자신을 저술노동자라고 부르는 박남일은 현재 인문서 출판기획과 저술활동을 하면서 칼럼을 연재한다. 청년심산문학상, 창작문학상 등을 받았고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한 우리말 풀이사전>, <청소년을 위한 혁명의 세계사>, <꿈 너머 꿈을 꾸다-정도전의 조선창업프로젝트> 등을 지었으며, KBS에 방연된 <역사의 라이벌>(전4권) 등을 엮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