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혈사태의 발단은 지난 6월 광둥성 완구공장에서 발생한 위구르 노동자 피살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위구르인들의 시위였다. 중국 당국은 이 시위가 한족에 대한 계획된 테러였다고 주장한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보도를 철저하게 통제해왔던 관행과 달리, 당국은 시위대의 폭력 및 방화 장면을 담은 동영상을 공개도 했다.
그러나 외신들은 현지 목격자의 증언을 빌려 무장경찰의 과잉진압이 유혈사태의 발단이 되었다고 전달하고 있다.
이어서 7일에는 한족 1만여 명이 쇠파이프와 칼, 체인 등으로 무장하고서는 보복시위에 나섰다. 위구르인들도 군인과 장갑차의 진주에도 불구하고 기습시위를 연이어 벌였다. 8일, 위구르 망명단체는 “위구르인 사망자수를 600~800명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밝혔다.
사태가 진정되지 않고 민족 간 대결로 번지자, 후진타오 주석은 G8 정상회의 참석을 포기하고 급히 귀국했다. 56개 민족으로 이루어진 중국에서 민족갈등은 안보에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화와 한족 대량이주가 위구르 대중봉기를 낳았다
유혈사태의 직접적인 발단과 별도로 대개 언론들은 사태의 배경으로 중국의 소수민족 차별정책과 경제적 불평등, 종교 및 정치 탄압 등을 꼽고 있다.
이슬람교를 믿는 위구르족은 2차대전 이후 일시적인 독립을 누렸으나, 인민해방군이 국민당을 축출한 직후 진주해 자치구로 편입시켰다. 하지만 역사·민족·종교적 고유성과 독립의 기억은 민족독립운동을 고무해왔고, 위구르인들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시위와 봉기가 일어났고 무장단체가 결성됐고 폭탄테러까지 벌였다. 베이징올림픽이 열렸던 작년에도 신장에서 폭탄테러가 잇따랐다.
그런데 이번과 같이 대규모 군중이 참여한 시위는 이례적이다. 현재 중국 정부의 소수민족 정책이 과거보다 더욱 억압적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운데 말이다. 이러한 대중적인 불만은 최근 10년간 이루어진 신장지역의 자본주의화와 한족의 대량이주에서 기인한다.
중국 정부는 지역 간 격차를 해소한다는 명목으로 99년부터 ‘서부대개발’을 추진해 농업지역이었던 신장과 티베트에 대대적인 투자를 해왔다. 그 결과, 신장지역 GDP는 최근 5년 새 280억달러에서 600억달러로 2배 이상 증가했다.
그러나 ‘서부대개발’의 실상은 본토 공업화에 따른 필요에 따라 이 지역의 석유·천연가스 등의 자원을 개발하는 것이었고, 개발에 필요한 노동력도 한족에게서 충당했다. 자본이 없고 개발 과정에서도 소외된 위구르인들은 개발이익을 전혀 누리지 못했다. 수도 우루무치의 위구르 청년실업은 한족의 5배에 달한다.
그리고 대량이주에 따라 1945년 당시 5%에 불과했던 한족의 비율은 41%까지 늘어났고, 위구르족의 비중은 45%로 줄어들었다. 이주해온 지배민족 한족은 경제를 장악했고, 위구르족은 ‘2등시민’으로 전락했다. 이러한 경제적 소외와 사회적 격차, 차별을 조장하는 중앙정부정책이 대중봉기를 낳은 것이다.
더 많은 피를 뿌리거나, 해방과 분리의 자유를 주거나
작년 티베트에 이은 위구르에서의 대중봉기는 중국의 자본주의적 발전이 민족갈등을 심화시키고 있음을 보여준다.
급속한 공업화를 지탱하기 위한 자원 확보의 중대한 필요성은 자원의 보고인 신장·티베트 지역의 전략적 가치를 높였고, 중국 정부는 이 지역에서의 지배적 지위를 영구화하기 위해 한족을 대량이주시켜 식민지화하고 있다. 그리고 자본주의적 개발은 부를 자본을 가진 소수 한족에게로 집중시켜 민족 간 격차를 넓히고 있다.
중국의 자본주의화가 가속화될수록 중국 정부는 계속 커져가는 민족분리운동에 직면할 것이다. 중국의 선택은 더 많은 피를 뿌리거나, 소수민족에게 해방과 분리의 자유를 주거나이다. 위구르 민족에게 해방과 분리의 자유를 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