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9월, 미국계 투자은행들의 파산이 속출했고, 자본주의라 불리는 모든 것들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불과 1년여 만에 자본주의경제는 다시 회생을 준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증시는 뜨겁고, 투자를 말리던 애널리스트들은 반성문을 쓰고 있다.
물론 경기가 완전히 회복될 것이라는 뚜렷한 증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여전히 세계자본주의경제는 ‘제조업의 과잉설비’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있고, ‘정교한 모래성 같은 금융체계가 부풀려놓은 과잉소비’라는 시한폭탄을 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낙관적인 분위기는(이는 아직은 소수의 인간들 즉, 투자자와 경제분석가 등만이 공유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위기, 혹은 적어도 신자유주의의 종말을 부르짖어온 좌파들의 기세를 주춤하게 한다. 그리고 어느새 포스트 신자유주의/자본주의에 대한 논의들이 자취를 감추고 있다.
이러한 일들로부터 우리는 다음을 깨달아야 하고, 다음의 질문을 던져야 한다. 자본주의가 사람들을 먹여 살리지 못한다는 명백한 증거들이 제시되고 있는데도, 자본주의의 진정한 위기, 정치적 위기는 시작조차 않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자본주의에 도전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할 수 있는가?
위기를 먹으며 자라온 괴물
우리는 경제위기를 곧장 자본주의의 위기로 받아들이곤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경제가 위기에 처한다고 해서 자본주의 원리도 자동적으로 함께 위기에 처하지는 않는다.
물론 자본주의 원리가 경제위기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가령 이윤동기와 시장경쟁이 체계적인 과잉투자와 팔리지 않는 상품을 낳아 결국 대규모 파산과 해고의 물결을 일으키는 것처럼, 이러한 경제위기는 자본주의에 대한 반성을 촉구한다.
그러나 이는 적은 수의 사람들 사이에서만 자본주의에 대한 회의와 도전을 불러일으키는 것에 그치곤 한다. 어쨌든 이윤극대화와 자본축적이 어떤 가치와 사회적 목표보다 우선하는, 자본주의 운영원리는 견고하다.
오히려 자본주의 또는 자본은 경제위기를 틈타, 위기를 자양분으로 삼아 스스로를 더 강화하곤 한다. 실제로 한국자본주의는 IMF 이래로 계속 위기를 불러일으켜왔고, 항시적 위기 가운데서 위기를 먹으면서 완전한 괴물로 자라왔다.
이 신자유주의 괴물은 경제살리기, 경쟁력 강화를 명분으로 얼마나 쉽게 사람을 자르고, 임금을 깎고, 정규직을 비정규직으로 대체해왔던가? 그리고 지금, 이명박이 계승한 신자유주의는 쌍용차에서의 승리에 힘입어 한층 높은 수준으로 자본제일주의를 모든 노동현장에 강요하려 든다.
반대로 휘청거리는 노동운동
신자유주의화를 완성해오며 자본이 경제위기로부터 막대한 이득을 취해온 동안, 반면에 노동자는 더 빈곤해졌고 노동운동은 더 취약해졌다. 이러한 안타까운 비대칭성, 자본의 유능함(!)에 대비되는 노동의 무능력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자기 계급의 독자적인, 자기 계급을 위한 경제대안과 체계적 강령의 부재 때문이다.
자본주의경제의 고유한 특징은 ‘이윤극대화와 자본축적의 자본주의 운영원리’와 ‘노동자들의 복지’가 모순되고, 특히 경제위기 하에서는 이러한 모순이 어느 한쪽이 완전히 굴복하지 않고서는 해결 불가능할 정도로 심화된다는 점이다. 이는 대규모 정리해고가 기어코 관철된 쌍용차사태가 잘 보여주는 바이다.
이러한 자본주의경제의 고유한 특징으로부터 노동자계급이 끌어낼 수 있는 일관된 전략은 자본을 완전히 굴복시키는 것을 노동운동의 현실적 과제로 설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자본이 내세우는 경제회생논리와 철저하게 결별하고, 자본의 논리와는 전혀 다른 토대 위에서 독립적인 경제대안을 수립하며, 자신의 대안이 정치권력과 전사회적 동의(헤게모니)를 획득하는데 주력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런데 한국 노동운동은 자본과 헤게모니 투쟁을 벌이기는커녕 도리어 자본의 논리에 자신을 종속시키고 있다. 그리고 종속의 대가는 계속되는 양보와 무력감이다.
종속성의 이유
노동운동의 자본에 대한 정치·이념적 종속성은 조직된 노동자대오의 현 상태인 조합주의, 조합주의적 노동자정치(개량주의)의 당연한 결과이다. 자본의 지속적인 성장에 힘입어 그 과실을 분배받는 것이 자신의 존속기반인 조합주의의 특성상 탈-자본주의적 실천은 전혀 진지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자본에 대한 정치·이념적 종속성은 또한 노동자대오의 의식을 반자본주의(사회주의) 계급의식으로 고양시키는 실천의 부재, 이러한 실천을 집행할 진정한 전위의 부재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임금노동자는 자본과 자신 사이의 화해 불가능한 모순을 노동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체득한다. 그러나 전체 노동자들 사이에서 계급의식의 형성은 매우 불균등하게 일어나며, 계급의식의 대대적인 고양은 먼저 결집한 선진노동자들의 의식적인 활동이라는 매개를 필요로 한다.
우리 노동운동에서 진정한 문제는 이러한 매개가 없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가장 먼저 풀어야 한다. 이 문제를 풀어낸다면 노동운동의 종속성을 극복하는 것도, 사회주의정당 건설의 중핵과 사회적 기반을 형성하는 것도, 자본주의에 도전하며 자본주의 위기의 불을 댕기는 것도 더 이상 풀 수 없는 문제가 아니다.
당장 사회주의 활동을 시작하자!
앞서 문제의식을 심화시키며 문제의 형태를 바꾸어왔다. 노동운동이 무능력한 문제는 자본에 대한 종속성의 문제이며, 종속성은 계급의식을 고양하는 의식성 부재의 문제이다. 그렇다면 의식성을 어떻게 개진할 것인가?
문제해결의 전제는 이 문제를 단지 현재의 빈약한 역량으로 가늠해서는(역량이 없으니 과제를 나중으로 미루자는 식의 접근) 안 된다는 것이다. 현재 사회주의운동은 질과 양의 절대적인 부족으로 전진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따라서 없는 역량을 질과 양의 측면에서 어떻게 형성해나갈 것인가가 이 문제에 대한 올바른 접근법이다.
해방연대는 작년부터 이 문제에 일관되게 대응해왔다. 대표적으로 ‘사회주의정치 실천의 날’을 통해서 소수이지만 꾸준하게 핵심투쟁에 대한 과도적 요구와 사회주의를 선동해왔다. 이는 해방연대 자신부터 조합주의 활동과 단절하고 사회주의활동(노동자의 진정한 계급의식은 사회주의이다.)을 전면화하는 자기쇄신의 과정이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부단한 자기쇄신의 과정을 한국의 어떤 사회주의자도 우회할 수 없을 것임을 분명하게 인식했다. 사회주의활동은 선언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경험의 누적과 자기평가, 자기쇄신을 요구한다.
계속 사회주의자이기를 진정 바라는 활동가들 사이에는 어떠한 규모와 모습으로든 사회주의활동에 당장 나서는 시기만의 차이만이 존재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질적 향상 없는 무원칙한 양적 결합과 확대는 정체와 변질만을 심화시킬 것이다.
과도적 요구 투쟁과 민주주의 투쟁
2000년대 한국사회의 두드러진 성격은, 자본주의 모순 심화와 노동자 민중의 궁핍화에도 불구하고 반자본주의 계급의식이 고양되고 있지 않으며, 사회불만이 자본주의가 아니라 집권세력에게로 집중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명박정권은 집중되고 있는 사회불만을 통제하기 위하여 민주주의를 계속 후퇴시키고 있다.
사회주의활동의 내용은 이러한 객관적 조건을 정확히 반영해야 하며, 사회주의자는 현실의 조건으로부터 고리를 연결해나가야 한다. 여기에서 과도적 요구와 민주주의투쟁은 강력한 고리가 돼줄 것이다.
과도적 요구란 객관적 조건은 급진적, 사회주의적 조치를 필요로 하는데도 투쟁주체의 의식이 이를 뒷받침하지 못하는 국면에서, 투쟁주체의 당면요구와 사회주의 계급의식 사이에 다리를 놓는 기능을 함으로써 수세적 국면을 전환시킬 수 있는 요구를 말한다.
정리해고 분쇄를 위한 공적자금 투입과 국유화 요구가 한 예이다. 국유화 요구는 정리해고 분쇄라는 당면요구에 기반하면서도 소유 변화와 국가책임이라는 합리적 해법을 제시하며, 투쟁의 진전에 따라 자본가국가를 폭로하며 노동자국가를 선동하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과도적 요구는 투쟁주체의 의식이 객관적 조건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는 오늘의 한국정세에 매우 적절한 전략이다.
한편, 이명박정권 하에서 의제화 된 민주주의투쟁에서 자유주의세력과 대비되게 노동자조직은 수동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적절치 않다. 민주주의투쟁에 계급적 관점과 요구를 결합시킴으로써 의제를 풍부하게 할 수도, 급진화 시킬 수도 있다. 그리고 노동자계급에는 조합주의투쟁을 넘어선 풍부한 정치투쟁의 경험이 필요하다.
운동은 어느 때보다 의식성을 요구한다
이 글은 의식성 즉, 사회주의 계급의식과 이를 고양하는 사회주의활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는 새로울 점이 전혀 없는 사회주의운동의 당연한 원칙이다. 그러나 이른바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원칙은 살아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 같다.
고루한 관념이 그들을 좀먹고 있다. 관료주의적 노조지도부와 전투적 현장조합원으로 기계적으로 나누어, 노조지도부를 타격하고 현장에서 전투성을 선동하는 것이 마치 사회주의활동인 양 착각한다.
그러나 전투성과 의식성이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이를 잊은 현장의 무오류성에 대한 신화는 자생성(자본에의 종속성)에의 굴종일 뿐이다. 사회주의자가 있을 곳은 대중의 꽁무니가 아니다. 결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