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상 타결로 농성을 푼 순간에 파업농성 지도부와 연대단체 활동가 수십 명은 손에 수갑을 차고 쇠창살에 갇히게 되었다. 쌍용차 점거농성파업은 이제 이명박 정부 이후 최대 공안사건 국면을 맞고 있다. 게다가 후안무치한 경찰은 노조 측에 5억 원이 넘는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한 상태다. 아무리 곱게 봐주려 해도, 이명박 시대 한국 경찰은 천하의 상것들이다.
한편, 1천 명에 가까운 노동자들이 두 달 넘도록 이른바 ‘구사대’와 ‘공권력’의 무지막지한 폭력 앞에 떨고 있을 때, 한국의 대다수 부르주아 언론은 이들을 조롱하고, 저주하였다. 협상이 타결된 며칠 뒤에 이들 부르주아 언론들은 ‘폭력노조원’이니 ‘외부세력’ 개입이니 하면서, 오랜 투쟁으로 지친 노동자들의 가슴을 날카로운 펜 끝으로 마구 긁어댔다.
용산 참사가 일어났을 때 ‘전철연’에 대한 마녀사냥을 부추기던 것과 똑 같다. 예컨대 동아일보 8월 11일자는 “점거 농성 노조원들은 악랄한 폭력을 매일처럼 휘둘렀다”는 섬뜩한 내용의 사설을 내보내기도 하였다. 세상에 이보다 무례한 잡것들이 어디 있을까.
반유태주의 광기의 희생양 된 드레퓌스 대위
예로부터 부르주아 국가의 주류 언론은, 대체로 뇌 없는 대중의 광기를 먹고 살아왔다. 때로는 그들의 펜이 살인 무기가 되었다. 반(反)유태주의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던 19세기 후반, 혁명의 나라 프랑스에서도 그랬다. 이른바 드레퓌스 사건을 둘러싼 당시 프랑스 주류 언론의 작태가 그렇다.
1894년 10월 15일. 한 유태인 장교가 억울하게 스파이 누명을 쓰는 사건이 일어났다. 사건의 주인공은 알프레드 드레퓌스. 그는 육군성 정보장교 듀 파티 소령이 시키는 대로 별 생각 없이 편지 한 통을 썼다가 즉시 헌병들에게 체포되어 감금된다. 그리고 감금된 지 두 달 만에 변호사와 첫 접견을 하고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었음을 알게 된다.
이때 프랑스 주류 언론은 드레퓌스 사건을 경쟁적으로 보도하였다. 하지만 이들 언론은, 드레퓌스 사건의 실상 보다는, 그 사건을 무마하기 위하여 유태인들이 로비를 벌이고 있다는 내용을 부각함으로써 반유태주의 여론을 선동하였다.
그러자 반유태주의 광풍에 휩싸인 대중은 유태인 출신 장교가 육군 참모본부에 발령받은 사실 자체가 잘못 되었다며 “유태인을 처단하라”고 미친 듯이 외쳤다. 여론재판이 시작된 것이다.
드레퓌스는 곧 비공개 군법 재판에 회부된다. 논고에 따르면, 드레퓌스는 파리주재 독일대사관 요원에게 편지로 군사 기밀을 유출시켜 적국을 이롭게 하였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피의자의 방어권은 극히 제한되었다. 증거물에 대한 필적감정도, 변호인의 변론과 피고의 진술도 인정되지 않았다.
마침내 재판관 전원은 막강한 여론에 힘입어 드레퓌스에게 종신금고형을 선고하였다. 변호인의 상고도 기각되었다. 그렇게 형이 확정된 드레퓌스는 대서양 너머 남아메리카의 프랑스령 기아나에 있는, 속칭 ‘악마의 섬’에 종신 유배되고 만다.
에밀 졸라의 진리를 향한 펜
한편 드레퓌스가 악마의 섬에 갇힌 뒤, 프랑스 참모본부의 새 정보장교로 임명된 피카르 중령은 참모본부 안에서 계속 드러나는 스파이 징후를 감지하고 재조사를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스파이 사건의 진범이 드레퓌스가 아니라 에스테라치 소령임을 밝혀낸다. 그리하여 참모본부에 재수사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육군성에서 그에게 내려진 것은 북아프리카의 튀니지로 당장 ‘꺼지라’는 전출명령서였다.
분노한 피카르는 전출지로 떠나면서 드레퓌스 사건의 진상을 한 변호사에게 알려주었다. 그러자 변호사는 프랑스 상원 의회에 요청하여 재조사를 벌이게 하였다. 그리고 결국 드레퓌스가 무죄라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그러면서 몇몇 지식인을 중심으로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재심(再審)운동이 벌어졌다.
드레퓌스 구명운동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가한 사람은 유명한 작가 에밀 졸라였다. 졸라는 ‘피가로’지와 ‘로로르’지 등에 날카로운 펜을 휘두르며 ‘진리를 위한 투쟁’에 동참하자고 호소하였다. 그는 진범 에스테라치를 재판에 회부하고, 드레퓌스를 석방하라는 내용의 논설을 줄기차게 써냈다.
1898년 1월 10일. 마침내 진범으로 간주된 에스테라치에 대한 군법회의가 드디어 열렸다. 하지만 군사법정 재판부는 전원일치로 무죄판결을 내렸다. 구명운동보다는 반유태주의 여론의 압력이 더 컸던 모양이다. 애초에 범인으로 지목된 드레퓌스에게 ‘명세서’의 필적 따위는 의미가 없었다. 드레퓌스가 유태인이라는 사실이야말로 문제의 핵심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드레퓌스 사건은 암흑 속에 묻히는 듯하였다. 하지만 에밀 졸라의 양심은 시들지 않았다. 그는 다시 피를 토하는 필치로 ‘나는 규탄한다!’라는 기사를 1898년 1월 13일자 ‘로로르’지에 기고하였다.
그 날짜 신문은 평소의 30배나 되는 30만 부가 발행되었다. 그리고 기자들과 모든 직원들이 이른 새벽부터 직접 신문을 배달하였다. 파리 시내는 온통 잉크냄새 비릿한 신문으로 도배되었다. 결국 졸라는 참모본부를 모략했다는 이유로 재판에 회부되어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시민들의 규탄 목소리가 점점 커지자 프랑스 당국도 무작정 사건을 덮어둘 수만은 없었다. 그리하여 유배 생활 4년만인 1899년에 드레퓌스는 악마의 섬에서 본토로 이감되고, 그해 9월에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풀려나게 된다. 프랑스 정부는 끝내 국가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고 적당히 비껴가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반유태주의 여론이 당시 권력을 떠받치는 힘이었기 때문이다.
언론에 의한 살인의 추억은 계속 된다
언론에 의한 살인의 추억은 21세기 한국에서도 이어진다. 100년 전 유럽에서 ‘반유태주의’라는 악령이 떠돈 것처럼, 지금의 한국에서는 ‘반노동주의’ 악령이 떠돌아다니고 있다. 죄 없는 드레퓌스가 무조건 유죄인 것처럼, 오늘날 한국의 노동자 또한 일단 잡히면 유죄다.
유태인이 잠재적 범죄자였던 것처럼 한국의 노동자들 또한 잠재적 범죄자다. ‘불법 폭력’이라는 두 단어만 덧씌우면 모두가 죄인이 되고 만다. 밥줄 끊지 말아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국익을 해치는 것이고, 공공의 안전을 해치는 행위다.
이처럼 몰상식한 법 집행이 되풀이되는 동안에도 군중은 조용하다. 국가 폭력에 대한 공포 이전에, ‘쌍용차 개입 외부세력 철저히 가려라’고 떠들어대는, 압도적 주류 언론의 선동 때문이다. 흔히 언론의 힘을 말할 때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한다. 그런데 현실 속에서는, 진실을 파헤치는 펜보다는 진실을 덮고 대중의 광기를 부추기는 펜이 더 강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같은 미디어시대에는 펜과 영상이 동시에 작동하며 이전보다 훨씬 더 강력한 힘으로 진실을 덮어버린다. 미디어가 발달할수록 대중의 ‘알 권리’가 충족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아는 힘’을 거세해버린다. 신문사 개수가 늘어나고, 방송국 몇 개가 더 생길수록 시민 간의 소통이 원활해지기는커녕 집단 전체가 먹통이 될 뿐이다. 부르주아 시대의 언론은 광고를 매개로 자본에 기생하는 ‘악어새’일 뿐이기 때문이다.
미디어에 의한 살인의 추억은 계속된다. 여기에 가속도를 내기 위해, 지금의 자본권력은 방송 쟁탈전을 벌이고 있다. 이른바 ‘미디어 악법’을 날치기로 통과한 거대 여당이나, 이에 맞서 작심하고 거리로 나선 부르주아 야당이나, 속내가 그리 달라보이지는 않는다.
그들에게 거대한 대중매체는 어디까지나 정권을 손에 쥐고 이어나가는 데 꼭 필요한 무기일 뿐이다. 결코 대중의 알 권리니, 사회의 목탁이니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악어새는 악어에게서 먹이를 얻는다.
박남일 - 자신을 저술노동자라고 부르는 박남일은 현재 인문서 출판기획과 저술활동을 하면서 칼럼을 연재한다. 청년심산문학상, 창작문학상 등을 받았고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한 우리말 풀이사전>, <청소년을 위한 혁명의 세계사>, <꿈 너머 꿈을 꾸다-정도전의 조선창업프로젝트> 등을 지었으며, KBS에 방연된 <역사의 라이벌>(전4권) 등을 엮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