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7월 여름, 이른바 ‘부천서 성고문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다. ‘부천서 성고문 사건’은 당시 부천 공단에 위장 취업한 뒤 공문서 위조 등 혐의로 경찰에 연행된 권인숙씨가 문귀동 등 형사 3명에게 온갖 성적 고문을 당한 사건을 말한다. 전두환 정권 당시로서는 시국 사범들에게 가해졌던 비일비재한 고문 방법이었고, 대부분 유야무야 묻혀 지나갔다는 것이 중론이다. 하지만 권 씨는 이를 고심 끝에 용기 있게 사회에 폭로하는 선택을 했고, 고(故) 조영래, 이상수, 박원순 변호사 등의 법정 투쟁과 함께 일반 시민들의 힘으로 정권의 파렴치성과 부도덕함을 까발리며 정권의 붕괴를 재촉했다.
이처럼 ‘성고문 사건’과 그에 대한 대처 및 투쟁 과정은 전두환 독재 정권의 정치적 폭압성과 통치의 부도덕성, 반국민적 폭력성을 전 국민적인 분노의 대상으로 끌어올리게 했으며, 다음 해인 87년 전민항쟁에 가까운 6월 항쟁의 사실상 촉매제 역할을 했다.
20년 동안 한결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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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참고로 ‘보도지침’이란 전두환 정권 시절 언론 통제 정책의 일환으로 매일같이 각 언론사 편집국장에 ‘어떤 사건은 몇 단 정도로 크게 쓰고, 어떤 기사는 쓰지 말 것이며, 제목은 어떤 내용으로 달아라.’는 등 시시콜콜한 내용까지 전화 등을 통해 지침을 내리며 언론을 권력의 입맛에 맞게 길들이는 방법을 말한다. 이는 86년 9월 월간 <말>의 폭로로 세상에 처음 알려지게 됐다. 물론 부천 성고문 사건도 전두환 정권에게는 당연히, 혹은 더더욱 강력한 보도지침 대상이었다.
86년 당대 최고의 유력지 조선일보의 기사 한 토막을 보자. 1986년 7월 17일자 조선일보 11면(사회 1면)의 톱기사 제목은 ‘성적 모욕 없고 폭언, 폭행만 했다’이다. 아래로 늘어뜨린 조그만 제목은 ‘운동권, 공권력 무력화 책동’이라고 달았다. 정부의 입장을 고스란히 담은 검찰의 수사결과를 그대로 ‘받아 쓴’ 것이다(50페이지 당일 지면 참조).
이는 수사결과가 발표되기 전까지는 관련 기사를 보도하지 말라는 지침을 충실히 수용하면서 ‘부천서 성고문대책위’와 학계 교수들, 여성단체, 종교단체 등의 기자회견은 전혀 다루지 않은 뒤 내놓은 기사다. 역시 조선일보 아닌가. 물론 보도지침의 통제를 받는 다른 신문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후 20년이 흘렀다. 87년 6월 항쟁이 있었고, 7,8,9월 민주노조운동이 전국을 휘몰아쳤고, 반세기만에 정치권력이 교체됐고, 남북 정상이 만나 6·15공동선언을 체결했다. 그동안 무엇이 바뀌고, 무엇이 바뀌지 않았을까.
‘제 논에 물대기 식’ 헌재 결정 해석
2006년 6월 말, 7월 초에는 신문 동네에 ‘여러 사건들’이 한바탕 휘몰아쳤다. 6월 29일 헌법재판소의 ‘신문 등의 자유와 기능보장에 관한 법률’(이하 신문법) 위헌 여부 판결이 있었다. 여기에서 절묘한 판결이 내려졌다.
헌재 전원재판부는 경영 정보 공개, 신문 방송 겸영 금지 등 신문법 핵심 조항 대부분에 합헌 판결을 내렸다. 또한 언론중재 및 피해구제 등에 관한 법률(이하 언론중재법)에서도 언론사의 고의 과실이 없어도 정정보도 청구를 가능토록 한 조항과 당사자 아닌 제 3자의 시정권고 조항도 모두 합헌 판결을 내렸다.
그런데 문제는 신문법 17조였다. 17조는 신문 시장에서 시장 지배적 사업자에 대한 규정이다. 3개사가 시장점유율 60%를 넘으면 규제할 수 있도록 한 조항이다. 일반 사업자의 독과점과 또 다르게 여론의 다양성을 존재하게 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항이었다. 실제로 이는 조·중·동 등과 같은 족벌언론과 언론개혁 세력 간에 가장 첨예하게 입장이 맞부딪쳤던 대목이다.
헌재는 이 17조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다. 주선회 재판관은 “신문법 17조는 신문사업자를 일반사업자에 비해 더 쉽게 시장 지배적 사업자로 추정되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이러한 규제는 신문의 다양성 보장이라는 입법 목적 달성을 위한 합리적이고도 적정한 수단이 되지 못한다.”고 위헌 결정의 배경을 밝혔다.
입법을 주도했던 열린우리당과 주무부처인 문화관광부는 아쉬움 속에 ‘절반의 수성’에 만족을 나타냈다. 전국언론노조와 언론 시민단체들은 단순한 시장의 독과점이 아닌, 여론의 독과점을 용인해준 판결에 대해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
언론단체들은 “거대 신문들이 불법·탈법 경품 및 무가지 제공을 통해 신문고시를 밥 먹듯이 위반하고 있는 현실임에도 ‘신문의 시장 지배적 지위가 독자의 선택에 의한 것이어서 불공정행위의 산물로 볼 수 없다는 것’은 무지와 왜곡이 빚어낸 합작품”이라며 소유 분산을 포함해 보다 강화된 개정안을 입법청원하겠다는 방침이다. 언론단체들은 열린우리당 문화관광위 의원 등과 함께 조만간 토론회를 갖는 등 헌재 결정에 대한 구체적 평가와 함께 향후 개정안 마련 작업에 착수할 방침이다.
반면 조·중·동·문과 그들의 충실한 조력자 한나라당은 이러한 일부 위헌만을 중점적으로 보도하면서 아예 신문법 전체를 부정하고 폐기하라는 주장을 펼치는 블랙 코미디를 연출했다.
조선일보는 1면 톱으로 ‘신문법, 언론중재법 일부 위헌’ 제목의 기사에 ‘시장 점유율 규제와 정정보도 청구소송을 민사집행법의 가처분절차에 의해 재판하도록 한 규정이 독소 조항’이라며 위헌 내용을 집중적으로 다뤘다. 중앙일보 역시 ‘시장 점유율 60% 넘으면 규제한다는 신문법 위헌’(1면)이라는 기사와 ‘메이저 신문 옥죄기, 표적입법 제동’(4면) 등 기사를 통해 위헌 부분만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조중동 통해 세상 보는 헌재
이번 판결은 언론 시장 현실에 대해 깜깜한 채 내린 헌재 재판관님들의 결정이었다.
최근 5~6년 사이에 한 번 쯤 이사를 해보신 분들은 다 경험하셨을 것이다. 막무가내로 이삿짐을 날라주는 조선일보 지국 관계자, 이삿짐 정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백화점 상품권, 6개월 무료 구독 등을 한 보따리 들고 오는 중앙일보 관계자 등을 어렵지 않게 겪었을 게다.
실제로 현재의 신문 시장은 자전거와 뻐꾸기시계, 비데, 백화점 상품권 등의 무차별 살포로 만들어진 결정체에 가깝다. 물론 더욱 거슬러 올라가면 과거 군부 독재 정권의 철저한 비호, 혹은 자본과 언론의 화학적 결탁 아래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러한 배경과 역사성을 몰랐을까. 그리고 이러한 비틀어진 언론 시장이 낳은 비틀어진 여론의 흐름을 몰랐을까.
지난 4월 7일 신문의 날을 맞아 언론비평전문지 <미디어오늘>이 헌재 재판관과 신문 구독 성향과 관련된 재미있는 기획 기사를 냈다.
이에 따르면 헌재 재판관 9명 중 조·중·동·문 중 하나 이상을 구독하고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의 제외도 없는 전원이었다. 이중 4명은 네 가지 신문을 모두 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살굿빛 조선일보’인 문화일보를 ‘유이한’ 석간신문이라 치면 조·중·동 세 신문 중 하나를 보고 있는 사람은 김경일 재판관을 제외한 8명이었다.
조·중·동·문의 창으로 세상을 보고 있는 헌재 재판관들이라면 이번 판결은 상식과 사회적 흐름에도 불구하고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최소한의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 조만간 개정 신문법을 놓고 여당과 야당, 수구언론과 시민사회는 또다시 지루한 싸움을 벌일 것이다. 전의를 다지기에 앞서 벌써부터 막막하다.
고 조영래 변호사를 추모함
글머리에 얘기했던 ‘부천서 성고문 사건’은 무려 4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뒤에야 공식 마무리될 수 있었다.
권인숙씨는 그해 11월 공문서 변조 등 혐의로 1년 6개월의 실형이 선고되고, 문귀동에 대한 재정신청은 기각됐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일이었다. 그러나 변호인단의 집요한 법정싸움 끝에 1988년 4월 문귀동은 결국 구속됐고, 징역 5년형이 선고됐다. 1990년 1월, 법원은 ‘국가는 성고문 사건에 대한 위자료 4000만원을 피해자에게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러한 통쾌한 승리에는 피해 당사자인 권 씨의 노력이 가장 중요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목표 지점에 이르기 위한 집요함과, 승리를 낙관하며 일관된 싸움을 벌여온 고(故) 조영래 변호사의 몫은 절반 이상이었다.
헌데 최근 발간된 ‘조영래 평전’을 둘러싼 논란이 너무 많아서 안타까움이 크다. 권인숙씨가 ‘조영래 평전은 나와서는 안 될 책’이라고 폄하했으며, 유족과 추모사업회도 출간을 반대했을 정도로 조 변호사의 삶에 대한 본질적 왜곡이 많다고 하니, 언제쯤이나 되어야 조 변호사가 제대로 된 내면의 모습을 후대들에게 드러내줄 수 있을까.
지난 90년 겨울 폐암으로 갑작스레 세상을 먼저 뜬 조 변호사가 살아있었다면 올해로 얼추 환갑은 됐겠다. 민변 어른들이 “살았으면 정말 큰 일 했을 사람”이라고 평하곤 하는 얘기를 들었다. 혹시나 여전히 관성만으로 움직이려하는 세상과 구태를 끊지 못하는 혼탁한 정치에 대한 새로운 전범을 세워줄 거대한 정치 지도자가 되지는 않았을까. 혹시 대통령이 됐을 수도…. 말해놓고 보니 그의 융숭한 내면과 열정, 통찰적 지성을 보지 못한 난 여전히 속물(俗物)이다.
조 변호사는 부천서 성고문 사건 법정 변론에서 사건 보도에서 기회주의적인 속성을 유감없이 선보였던 언론에 일갈했다. 그 울림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여전히 덜덜 울린다. 그 일부를 소개하며 글을 맺는다. 법과 언론, 정치, 사회의 통합적 사고에 있어 타의 추종을 허하지 않았던 조 변호사가 그립다. 대학 때 봤던 유고집(‘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둬둘 수는 없습니다’ 91년 간)이라도 다시 펼쳐봐야지.
(전략)우리는 모든 언론들이 이 사태의 책임을 스스로 통감하고 다른 누구에게도 전가하지 말기를 호소합니다. “힘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만약 그 같은 변명이 통할 수 있는 것이라면, 히틀러 치하에서 수백만의 유대인을 학살하는데 가담한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용서받지 못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언론의 자유는 쟁취되어야 하는 것이며, 이 싸움에 앞장서야 할 것은 누구보다도 언론인들 자신이라는 것을 우리는 강조하고자 합니다. 언론인들 스스로가 자신의 직분을 지키기 위하여 몸부림치지 않는 한, 언론의 자유는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주어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몸부림은 당장 시작되어야 합니다.(후략)
덧글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무지하게 쏟아진 지난 주말이었다. 한강이 넘쳤고, 안양천이 터져 수재민이 속출했고, 강원도가 물에 잠겼다. 헌재 판결을 본 뒤 ‘인권변호사, 시민변호사’ 조 변호사를 불현듯 떠올리며 글을 쓰는 와중에 이러한 수재를 보니 조 변호사 생각이 더욱 보태졌다. 84년 망원동 수재 사건이 생각났다. 전국적으로 126명의 사망자가 발생할 정도로 엄청난 큰 물 피해였다. 특히 망원동 일대는 완전한 물바다가 됐다. 유수지의 수문 상자가 붕괴된 탓에 피해가 더욱 컸다. 망원동 주민들은 국가와 유수지 건설을 맡았던 현대건설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이번에도 서울 양평동 주민들이, 망원동 주민들처럼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한다. 공통되는 건 상대편에 정부가 있었고, 재벌이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당시에는 현대였고, 이번에는 삼성이었다. 뚝심의 조 변호사는 5년 10개월 동안 이를 붙잡고 끝내 국가 배상 판결을 끌어냈다.
국가와 재벌을 상대로 한 힘없지만 정당한 시민들의 싸움에 언제나 승리가 있기를….
출처: [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