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특집] 존재 자체가 인권침해가 될 수도 있다

인권활동가들이 말하는 헌법재판소

지난 5월 25일 시각장애인만 안마사 자격을 얻을 수 있도록 한 보건복지부 규칙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내린 위헌 결정은 그 법리적 판단의 옳고 그름 여부를 떠나 헌법재판소가 얼마나 소수자들의 삶과 실생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지를 확인시켜 주었다. 그동안 국가보안법이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등과 같은 인권 현안에서 보수 일변도의 판결을 내려 각계의 지탄을 받기는 했으나 역시 헌법재판소가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그 위력을 발휘한 것은 대통령 탄핵심판이나 행정수도 이전 위헌 결정 등 굵직굵직한 정치적 사안이었다. 그러나 이번 결정은 차원을 달리해서 “대법원이 기관총이라면 헌법재판소는 박격포”라는 한 판사의 말마따나 일상에서 헌법재판소의 가공할 영향력과 그 치명적인 일격의 피해 정도를 가늠하게 해준 사건이었다.


법 논리에 빠져 휘두른 헌재의 폭력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에 대해 정부를 상대로 적절한 입법조치를 하지 않은 책임을 물어 국가부작위 헌법소원을 낸 바 있는 새사회연대 이창수 대표는 “사실 법률적으로만 봤을 때 판결은 문제가 없다고 본다. 하지만 최종적인 구제기관이자 소수자 인권보호를 그 사명으로 해야 할 헌재의 판결이란 점에서 최소한의 인권감수성도 없는, 턱없이 모자라는 결정임이 분명하다. 민간인 학살 헌법소원에 대한 각하 결정도 헌재는 국가의 의무를 묻기보다는 다분히 형식적인 법 논리만을 가지고 국가 입법정책 사안이라며 정부에 면죄부를 줬다. 이는 헌재가 법 형식주의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라고 진단했다.


장애인차별금지법제정추진연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박옥순 활동가는 “그 어떤 이유로도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옹호될 수 없다. 한 순간의 결정이 시각장애인 안마사의 생존권을 송두리째 날려버린 거다. 이것은 법의 외피를 두른 폭력일 수밖에 없다. 장애인이 처한 현실에 대한 무지가 빚어낸 결과이고 헌법재판소의 존재이유 자체를 부정하는 결정이다. 헌재가 소수자의 인권을 보호하지 못한다면 있을 이유가 무엇인가.”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명패만 바뀌는 거 아냐?
헌법재판소장을 비롯한 재판관 9명 중 5명 8~9월 교체 예정
헌법재판소가 대폭적인 물갈이를 예고하고 있다. 오는 14일 퇴임하는 권성 재판관을 시작으로 9월 14일 윤영철 소장, 김효정, 김경일, 송인준 재판관 등 9명의 헌법재판관 중 5명이 교체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새사회연대, 민주주의법학연구회 등이 참여하고 있는 민주사법국민연대는 지난 7월 19일 ‘헌법재판관 후보자 민간단체 추천위원회’를 제안했다. 이 기구는 헌법재판관 자질 및 인선 기준에 대한 토론회 등을 거쳐 헌법재판관 후보자 공개추천 및 공개검증 결과를 발표할 계획이다. 이와는 별도로 참여연대도 8월 초 토론회를 갖고 재판관에 대한 선정 기준 등을 발표할 계획이며 법원노조는 전국 20여개 지부의 의견수렴과 인터넷 투표 등을 실시해 10명의 후보자를 선정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러한 추천운동이 헌법재판소의 근본적인 개혁 내지는 변화를 가져오리라 전망하기는 어렵다.


우선 헌법재판관 자격이 만만치 않다. 헌법 제111조에 의하면 “헌법재판소는 법관의 자격을 9인의 재판관으로 구성”하게 돼 있다. 그렇다고 법관이면 다 되는 것도 아니다. 헌법재판소법은 제5조 1항에서 판검사나 변호사 또는 변호사 자격을 가진 교수 등의 직에 15년 이상 있던 40세 이상의 사람이어야 한다고 못 박고 있다. 또한 헌법재판관은 65세가 정년이므로 65세를 넘겼거나 6년 임기를 채우기 전에 65세를 맞게 되는 사람도 관례상 헌법재판관이 되지 못한다. 결국 5명의 헌법재판관이 교체된다고는 하지만 후보군 자체에서 다양성은 배제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새사회연대 이창수 대표는 “번외 추천이 되더라도 문제제기 차원에서 법률적 자격기준에서 벗어난 사람을 추천할 것”이라고 밝혔다. “법률전공이 아니더라도 상식을 반영할 수 있는 교수, 인권단체 활동가 등이 들어갈 수 있어야 하는데 법이 그 자격조차 주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다. 사실 그동안 판검사 출신이 독점해 왔던 기존 관행의 전면적인 재검토 요구는 꾸준히 제기돼 왔다. 헌법을 고쳐야 될 사항이 아니라 헌법재판소법을 개정하는 것만으로도 최소한이나마 다양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무엇이 되었든 당장 실현될 가능성은 적어 전망은 더욱 어둡다.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 헌재는 어떠해야 하며 인권운동은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는가를 물어봤다. 사회보호법 폐지 운동을 하며 헌법소원을 제기한 바 있던 천주교인권위원회 김덕진 사무국장은 “사회보호법 관련해서 수차례 재판관들에게 청송 보호소를 단 한번이라도 방문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면 교도소와 보호소가 전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심판과 관련된 장소를 조사하는 것은 헌법재판소 법에도 규정되어 있는 것이지만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헌재의 역할과 기능에 대한 장기적이고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지만 당장 지금의 법률체계 안에서 요구할 것은 요구하고 강제할 것은 강제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또한 “국가보안법 폐지 투쟁이 점차 활발해져가던 2004년도에 헌재의 전원일치 합헌 결정은 큰 타격이었다. 지문날인에 대한 헌재 결정도 결국 안 좋은 사례만 남긴 셈일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대법원 항고와는 다르게 전략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인권운동의 딜레마? 혹은 가능성


다산인권센터 박진 활동가 또한 이러한 신중론에 동의한다. “합법과 불법의 경계선에서 활동해야만 하는 인권운동에게 있어서 헌법재판소는 비판의 대상인 동시에 활용해야 할 존재다. 헌법소원이란 운동방식은 여전히 유효하다. 마치 유엔이 현실적으로는 강대국 위주로 철저히 국제정치의 역학관계에서 돌아가는 다분히 비도덕적인 기구이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각종 유엔인권기구와 조약 등을 최대한 활용해야 하는 것처럼 그런 딜레마를 안고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점을 유의하고 헌법소원 등을 활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편 천주교인권위원회 조백기 활동가는 헌법재판소의 정치적 성격에 주목할 것을 주문한다. “헌재는 사법기관이지만 또한 정치적인 기관이다. 정치적 결정이 헌재의 중요한 역할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법, 제도적 개혁으로 접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치적인 방향을 잡아나가야 한다. 이를테면 헌법재판소가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려도 그 취지와는 무관하게 국회에서 개악하는 것이 다반사다. 반면 국회에서의 입법을 통해 헌법재판소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여지도 있다. 지금과 같은 구조에서는 입법부와 행정부를 어떻게 견제하고 민주적으로 만드는가 하는 것이 곧 사법부를 개혁하고 견제하는 지름길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창수 대표는 보다 적극적인 활용론이라 할 수 있다. “과거에 합헌 결정이 났다고 해도 지금도 여전히 그런지, 아직도 그렇게 판단하는지 계속 확인할 필요가 있다. 판례는 절대 진리가 아니라 시대에 따라 형성되어야 하는 것이고 그렇게 만드는 것이 인권운동의 역할이다. 또한 국제인권조약 등에 대한 언급 자체를 하지 않고 있는 헌재와 대법원의 판결을 끊임없이 유엔으로 가져가고 국제기준으로 일치시켜 나가야 한다. 또한 최소한 헌재 결정이 어떤 과정을 통해 나왔는지 그 회의록을 공개하도록 하는 것이 헌재에 대한 비판과 견제, 더 나아가 통제할 수 있는 중요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구체적 실천과 정치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인권운동사랑방의 배경내 활동가의 문제제기는 보다 근본적이다. “헌재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우리의 인식조차 닫혀있다. 파리코뮌에서는 이미 모든 사법 권력에 대한 인민들의 직접 선출권과 소환권을 주장했다. 비현실적이고 이상적이란 비판이 있을 수 있지만 헌재를 어떻게 인민주권의 통제에 둘 것인지에 대해서는 세밀한 고민과 함께 정치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대통령도 탄핵하고 국회의원을 국민이 소환하자는 마당에 사법부는 상상조차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장기적으로 가능성을 열어놓고 민주주의와 사법부, 인민의 권리와 헌재가 공존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한다.


인권운동에 있어서 헌법재판소, 나아가 사법 권력에 대한 일치된 견해는 없다. 하지만 헌법재판소가 스스로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헌법을 구체적으로 실현하여, 공권력이 남용되는 것을 방지하고, 공권력 행사에 의하여 침해된 국민의 기본권을 회복”하기 위해 “인권보장기관으로서의 적극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고는 그 누구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헌법재판소가 책임을 면할 길은 없어 보인다.


헌법재판관, 그들은 누구인가
너무나 닮아 있는 헌법재판관들
헌법재판소에는 소장을 비롯해 모두 9명의 재판관이 있다. 헌법재판소장은 국회 동의를 거쳐 대통령이 임명하고 임기는 6년이다. 헌법재판관들 또한 대통령이 임명하는데, 그 중 3인은 국회가, 3인은 대법원장이 지명한 사람을 임명한다. 그들이 하는 일은 크게 다섯 가지로 △위헌법률심판 △탄핵심판 △정당해산심판 △권한쟁의심판 △헌법소원심판 등이다. 모든 심판은 원칙적으로 9인의 재판관 전원이 참여하는 전원재판부에서 다루며 그밖에도 재판관들은 3인의 재판관으로 구성되는 지정재판부에도 참여해 헌법소원 심판의 사전심사를 담당한다.


헌법재판관, 그들은 누구인가. 결론적으로 헌법재판소 사이트에 올라와 있는 약력만을 참고하면 그들은 모두 엇비슷한 사람들이다. 우선 그들의 연령은 대부분 60세 전후로 1937년생인 윤영철 헌법재판소장을 제외하고는 1940년대 초반에서 1950년대 초반 사이에 출생한 사람들이다. 전효숙 재판관만을 제외하고는 모두 남성이며 전효숙, 주선회 두 재판관만 빼고는 또한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 또한 지검, 고검을 거친 검사출신 송인준, 주선회 두 명의 재판관을 제외하고는 모두 오랜 판사 생활을 지낸 사람들이란 공통점도 있다. 역대 헌법재판관 30명 가운데 21명이 고등부장 이상의 판사 출신이었고 단 5명만이 검찰 출신, 나머지 4명이 변호사 출신이었으나 이들마저도 판검사 경력자였다.


이를 문제 삼고자 한다면 학력과 경력, 나이와 성별에 의한 차별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런 것은 어떤가. 지금은 모르겠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헌법재판관은 모두 표현의 자유보다 국가안보를 우선시하는 사람들이었다. 지난 2004년 8월 헌법재판소는 국가보안법 7조1항과 5항, 이적표현물 소지와 찬양·고무죄를 단 한 명의 이견도 없이, 전원일치로 합헌 결정을 내렸다. 이들 조항은 한나라당조차 폐지 의견이 냈던 조항들이었다. 2004년 대한민국의 헌법재판관들은 국가보안법이 필요하며 그중에서 7조 하나도 버릴 수 없다고 믿는 사람들로만 모여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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