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인권이에요, 당연하지] 국가인권위원회의 국민훈장 석류장?

인권상은 반인권적이다

한해를 마무리 하는 시기이다. 이맘때쯤이면 각종 시상식이 열린다. 영화대상, 대종상, 연예대상, 가수상… 비단 연예계 쪽만 상을 주는 것은 아니다. 비록 화려한 레드카펫에 플래시세례와 포토라인에서 멋진 드레스를 뽐내지는 않더라도 바람직한 어머니상, 효행상, 무슨 상, 무슨 상… 등 시상식의 행렬은 여기저기서 이어진다.



그 동안 국가인권위원장의 명의로 인권활동가나 단체에 포상을 해왔던 인권상이 올해부터는 국민훈장 석류장과 근정포장을 신설해 ‘대한민국 인권상’으로 개편되었다. 국가인권위가 정부 부처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우라고 해 봐야 실질적인 이행의무도 없는 권고안을 내는 것 정도이겠지만 그나마도 여기저기의 행정부처에서 두들겨 맞느라 무척 정신없었을 것을 생각해보면 이번 인권상 개편은 어쩌면 국가인권위원회에게는 위상이 올라간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되지 않을까 하는 쓸데없는 추측을 해 본다.


‘상’의 의미는?


잘하는 사람 더 잘하라는 독려의 의미로, 혹은 잘 했다는 칭찬의 의미로 우리는 ‘상’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다. 16년의 교육과정기간동안 그 흔하다는(?) 개근상을 한 번도 못 타본 필자로서는 ‘상’은 꼭 한번 받아보고 싶은 무엇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상이라는 것이 참 묘한 것이, 못 받은 사람들에게 위화감을 조성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나눠주는 것이 아닐 바에야 상이라는 것은 항상 주는 사람의 기준과 입맛에 맞는 최저의 조건을 충족시킬 수 없는 사람에겐 요원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개근상만 해도 그렇다. 한 번도 결석하지 않은 사람의 성실, 근면한 점을 높이 사 주는 것이라고는 하나, 체력적으로 열등(!)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성실함을 ‘개근상’의 기준으로는 도저히 충족시킬 수 없는 것이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주는 상은 말 그대로 국가에서 인정하는 인권옹호자에게 주는 상일 것이다. 국민훈장을 내주려면 국가에서 그만큼 인정받아야 한다는 의미일 텐데, 과연 국가에서 인정하는 인권과 진정한 인권의 의미가 서로 양립할 수 있을까?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가 한 달에 한 번씩 내는 양심수 자료만 봐도 자신의 신념과 양심을 지키기 위해, 인간으로서의 기본적 권리, 생존권을 위해 투쟁했던 많은 사람들이 아직 감옥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다. 내 선조가, 내가 일군 땅에서 주민들이 안전하게, 정당하게 살 권리를 주장한 평택 대추리의 김지태 이장도 구속되어 있는 상황이다. 노동권을 지키기 위해,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내 땅에서 살 권리를 찾기 위해 투쟁한 사람들이 지킨 것은 과연 국가인권위가 정한 인권의 기준보다 미달하는 것인가? 누가 상을 받을 사람이고 누가 상을 받지 못할 사람인가? ‘상’이 갖는 본래적 의미가 다만 ‘독려’일 뿐이라면 괜찮다. 그러나 인권운동에 있어 활동가들을 독려하는 것은 ‘국민훈장 석류장’을 수여하는 것 보다는 구속자를 풀어주는 것, 실질적인 인권을 증진하기 위한 노력을 보여주는 것이 더욱 필요할 것이다.


상이 주는 박탈감과 경쟁심


누구에게나 평등할 수 있는 보편적 기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훈장을 줄 수 있는 인권옹호자의 기준이라는 것도 국가인권위의 주관적 판단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일 뿐이다. 인권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환기와 인권의식 신장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었다면 차별을 조장할 수 있는 상을 주는 방식은 피했어야 한다. 상을 받는 순간 수상자는 많은 이들에게 축하를 받고 추앙되며 기억되지만 상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아카데미상조차도 여러 상들의 후보자들은 전혀 기억되지 못하고 수상자들의 이름만 남는다. 노력의 경중을 컵에 담긴 물처럼 계량할 수 없는 것인데도 수상자를 제외한 사람들의 노력은 ‘상’을 기준으로 삼는 순간 물거품이 되어버린다. ‘세상은 2등을 기억하지 않습니다.’라는 끔찍했던 예전 광고의 카피가 떠오른다. 당연히 상을 못 받는 사람은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끼게 된다. 거기에 덧붙여 상금이라도 걸려 있다면 이는 심리적 박탈감뿐만 아니라 경제적 박탈감까지도 불러일으킬 것이다. 어떤 상이라도 수상후보를 정할 때는 대부분 다수가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을 우선 뽑게 된다. 그 상의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해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보편적 기준을 내세워야 할 테니 말이다. 그 보편적 기준에 미치지 못한 유별난(!) 소수들은 상을 받을 기준에서도 누락되고 상금을 타 볼 기회도 잡을 수 없으며(보편적 기준에 도달할 때까지는!) 계속 배제되고 차별받고 소외 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의 인권이 평등하다면


100명의 사람들에게는 100가지의 특성이 있다. 인권이 각자의 특성을 차별하지 않는 것이라면 당연히 그들은 모두 인정받을 권리가 있다. 이를 ‘상’이라는 경쟁으로, 그리고 결과로서 선을 긋는 것은 오히려 인권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차별을 조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국민훈장’을 받을만한 보편적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 인권분야들은 아직도 많다. 장애인, 여성, 동성애자, 비정규직 등 차별받는 소수자들의 인권을 증진시키기 위해서 인권운동은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런 점에서 인권위의 보편적 기준을 적용시키는 인권상은 오히려 다른 인권과의 차별을 부각시키는 반인권상이 될 수도 있다.


정말 이 사회의 인권을 증진시키고 싶다면, 그리고 훈장을 받을 만큼 중요한 일을 인권활동가들이 하고 있다면 더 많은 인권활동가들에게 상을 줬으면 좋겠다. 그것이 ‘인권상’이라는 이름으로 특화되는 것이 아니라 인권 증진을 위해서 활동가들이 노력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 쪽으로 말이다. 상금이 있다면 골고루 나눠주고, 상을 주고 싶다면 ‘훈장’이 아니라 모든 영역의 인권이 중요함을 부각시키는 상. 안 받은 사람, 받은 사람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모두 다 받거나 받지 않아도 기쁜 그런 상이었으면 좋겠다. 과연 ‘상’이라고 하는 것이 그럴 수 있을 까는 의문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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