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국제인권] 조작된 이미지에 갇힌 홀로코스트

이스라엘은 집단학살로부터의 역사적 교훈을 얻어야

오랜만에 지면을 통해 인사드리네요. 먼저 새해 첫 호이니만큼 시작하기에 앞서 그동안 한번 쯤 드리고 싶었던 이야기를 꺼내볼까 합니다. 월간 <사람>을 통해 저를 비롯한 여러 활동가들이 버마, 프랑스, 네팔, 나이지리아, 수단, 필리핀 등 세계 여러 나라의 민주주의와 인권, 인종차별, 식민주의, 분쟁과 학살, 다국적기업, 무기통제 등 다양한 주제에 관한 이야기들을 전해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끔씩 이런 글들이 읽는 분들은 어떤 느낌, 어떤 의미로 다가갈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수없이 많은 온오프라인 언론 매체들이 거의 실시간으로 해외에서 일어나는 소식들을 쏟아내고 있고, 개인들도 마음만 먹으면 인터넷을 통해 얼마든지 나라 바깥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을 알 수 있는 시대에, 매달 마감 때만 되면 착하디착한 편집부 사람들에게 인간에 대한 불신과 원망이 어떤 건지를 가르쳐주면서까지 굳이 이런 글들을 싣는 것은 과연 무엇을 위함일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국제인권에 대해 글을 쓰면서


제 글을 통해 부족하나마 독자 여러분들이 미처 잘 몰랐던 나라 밖 일들에 대한 배경 지식과 정보를 얻을 수 있다면 참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연대하든 뭘 하든 간에 일단은 정확한 이해가 가장 먼저이니까요. 그러나 대부분 가본 적도 없고 갈 일도 별로 없을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단순히 안다는 것만으로 개인적인 지식을 넓히는 것 말고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만약 정보 전달이 목적이라면 굳이 쓰기도 읽기도 힘든 글보다는 “어디어디 가면 이러이러한 정보가 있대요.”하고 알려드리기만 해도 참 친절하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고 당장 뭔가를 실천하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하고 싶어도 별로 할 수 있는 것도 많지 않구요. 다만 바라는 것은 국제인권에서 다루는 기사들을 통해서 과연 ‘그들’의 어제가 ‘우리’의 어제와 어떻게 닮아있고 어떤 점이 다르며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이며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를 끊임없이 생각해보고 상상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왕 얘기를 꺼낸 김에 하나만 덧붙이자면, 여기에 실리는 글들이 대부분 정치사회적으로 불안정한 저개발 국가에서의 우울한 얘기들이다 보니 자칫 ‘그들은 항상 불행하고, 불안정하고, 불쌍하고, 그래서 도움과 관심이 필요하다’는 동정론만 불러일으키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생깁니다. “이제 우리도 우리가 이룩한 민주주의, 인권, 자유를 우리보다 못한 처지에 있는 나라들과 나눠야 할 때” 라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데, 저도 기본적으로는 그런 의견에 동의하면서도 동시에 국제연대에 대한 그런 접근법이 가지는 한계와 위험성에 대해 경계하는 편입니다. 그것은 자칫 서구의 시민운동이 보여주고 있는 3세계 국가들의 현실에 대한 몰이해, 3세계 민중들과 운동주체들을 동등한 변화의 주체로 인정하지 않고 시혜와 동정, 측은지심의 객체로만 바라보는 ‘자뻑’(자기도취)형 운동의 길을 우리도 그대로 따라갈 수도 있겠다 싶어서입니다. 그리고 제 글들이 혹시나 거기에 일조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도 자주 하는 편입니다.


일단 시작하고 보니까 글이 점점 더 장황해지는데요, 이쯤에서 제 넋두리는 그만하고 본론으로 넘어가야겠네요. 이번 호에서는 새로운 이슈를 발굴해 다루기보다는 최근 이란에서 열린 반홀로코스트 회의를 보면서 제가 듣고 느낀 점을 함께 나눠볼까 합니다.


반홀로코스트 회의-과연 홀로코스트는 사실인가


지난해 12월 11일과 12일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는 ‘홀로코스트 연구-세계적 관점’이라는 제목의 국제회의가 열렸습니다. 이란 국제정치연구소가 주최한 이 회의는 전 세계 30개국에서 67명의 학자들이 참여해서 “2차 세계대전 중 나치에 의한 유대인 대학살인 홀로코스트가 실제로 일어났는가?”와 “그 피해자 수가 과연 그동안 알려진 바와 같이 600만 명에 이르는 것이 사실인가?” 등에 관한 각자의 견해를 발표하는 자리였습니다. 이 회의가 나라 안팎의 관심을 집중시킨 이유는 회의를 사실상 후원하고 주도한 사람이 그동안 거침없는 반이스라엘 발언으로 자주 이목을 끌었던 이란의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이었다는 점과 “홀로코스트는 이스라엘의 존재와 팔레스타인에 대한 탄압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스라엘 정권이 사용하고 있는 허구”며 “이스라엘은 과거 소련이 그랬듯이 언젠가 지도상에서 사라질 나라다.”라는 그의 발언, 그리고 그와 맥락을 같이한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강제수용소의 가스실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홀로코스트 피해자의 수는 과장되었으며 실제 피해자는 그보다 훨씬 적다”는 일부 학자들의 주장들 때문이었습니다.

지난 해 12월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열린 '홀로코스트 연구-세계적 관점' 국제회의. 이 회의는 이란의 아마디네자드 대통령(맨 왼편)이 후원하고 주도했다.


거기에다가, 참가자들 중에는 극단적인 백인우월주의와 유색인종에 대한 테러로 악명 높은 미국 KKK단의 전 대표 데이빗 듀크,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발언을 했다 대학에서 쫓겨난 프랑스의 로베르 포리송과 조르주 티엘, 심지어는 유대교 사제들인 랍비들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져 더욱더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했죠.


이 회의에 대한 격렬한 비판과 반발은 당연히 예상된 수순이었습니다. 들리는 얘기로는 미국의 전유엔 대사 존 볼튼과 유대인협회 등은 흔히 제노사이드(genocide) 협약이라 불리는 ‘집단학살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에 따라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을 대량학살 선동죄로 기소하겠다는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다고 하는데, 자국민이 처벌받을 것을 우려해 국제형사재판소에 관한 협정에도 가입하지 않은 미국이 어디에다가 기소하겠다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미국뿐만 아니라 홀로코스트를 저지른 독일과 반유대주의의 온상이었던 유럽, 그리고 이란과 같은 이슬람 국가들에서조차 비판과 우려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습니다.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면서 승리를 얻으려 하지는 않을 것”


여기서 잠시 ‘미디어 세탁소’ 모드로 옮겨가보면, 회의 개최 이후 한국의 동아일보에서는 아얀 히르시 알리라는 소말리아에서 망명한 네덜란드 인권운동가의 ‘홀로코스트에 눈감은 무슬림’이라는 글을 통해 마치 대다수 무슬림들이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도했던데, 그건 또 다른 편견과 왜곡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대단히 위험한 보도라고 생각합니다. 당장 제가 인터넷에서 읽은 무슬림들의 글들만 봐도 ‘홀로코스트의 전면적인 부정은 역사적 사실과는 다르며 무슬림에게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주장’이라는 글들이 거의 대부분이었으며, 비록 몇 되지는 않지만 지금 제 주변에 있는 무슬림 친구들도 마찬가지 입장입니다.


일례로, 팔레스타인 인민해방전선(PFLP) 조직원으로 18년을 이스라엘 감옥에 갇혀 있다가 올해 풀려난 마흐무드 알사다피는 <르몽드>지에 기고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당신은 홀로코스트의 부정이 팔레스타인의 독립과 자유를 위한 지원이라고 여기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실수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1948년 이후 우리에게 가해진 박해에 맞서 싸우고 있으며, 우리의 존재와 권리를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땅을 점령하고 우리의 재산을 빼앗아간 사람들이 유대인들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유대인들에게 가해진 집단학살을 부정하면서 승리와 독립을 얻으려하지는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학살의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바뀐 이스라엘


이와 같이, 이번 반홀로코스트 회의에 대한 시각은 대부분 부정적이고 비판적입니다.
사실 저는 그 회의에 초대를 받지 못해서 회의 기간에 구체적으로 어떤 이야기들이 오고 갔는지, 그리고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의 속내가 무엇인지를 속속들이 알지는 못합니다. 홀로코스트에 대한 지식도 보통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정도이구요. 그러나 저는 이번 회의의 내용이나 이란 대통령의 의도와는 별개로, 우리가 그동안 막연히 알고 있던 홀로코스트에 대해 한번쯤은 그 이면을 들여다보려는 노력은 꼭 필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나찌에 의한 유대인의 대학살이 있었다는 것은 그 자체로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고 희생자가 600만 명이든 500만 명이든 간에 그 야만성은 전혀 바뀌지 않는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과거의 홀로코스트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교훈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인류역사에서 다시는 그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 아닐까요? 하지만 현실은 홀로코스트로 인한 가장 큰 피해자들 중 하나인 유대인들이-절대 ‘유일한’ 피해자들은 아닙니다. 나찌의 홀로코스트에서 집시와 공산주의자, 동성애자, 장애인들도 그 먹잇감이 되었으니까요-이제는 팔레스타인과 다른 아랍민족들을 학살하는 가해자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들에 대한 인종청소와 억압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홀로코스트를 이용하고 있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곰곰이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나찌에 의한 유대인 대학살이 있었다는 것은 그 자체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 희생자가 600만이든 500만이든 간에 그 야만성과 비극적 성격은 전혀 바뀌지 않는다. 하지만 홀로코스트의 피해자가 유대인들만이 아니기에 홀로코스트가 이스라엘의 전유물일 수는 없다. 사진은 홀로코스트 가운데서의 휴머니즘을 감동적으로 그렸다는 찬사와 홀로코스트를 상품화하고 유대주의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을 함께 받았던 스트븐 스필버그의 영화 <쉰들러리스트> 포스터.


그럼 이제 좀 더 구체적인 사례 하나를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캐나다의 제1야당인 민주당 소속의 마이클 이그나티프라는 국회의원이 있습니다. 민주당 대표를 뽑는 선거에 후보로 출마한 그는 줄곧 여론조사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었고, 과거 백여 년 동안 민주당 대표 중에 총리 자리에 오르지 않은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던 역사를 비춰볼 때 차기 총리감으로 가장 유력한 사람이었죠. 그런 그가 지난해 여름에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은 전쟁범죄다”라며 이스라엘을 강하게 규탄하는 발언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의 발언은 곧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고 온갖 비난이 쏟아졌죠. 그러자 그는 자신의 발언은 휴먼라이츠 워치와 앰네스티 인터내셔널 같은 국제적인 인권단체들의 보고서에 근거한 객관적인 것이라고 맞받아 쳤는데, 제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던 것은(저도 그런데 당사자는 오죽하겠습니까) 그를 비판하는 논리였습니다. 전국유대인협회와 같은 유대 단체들은 그를 두고 “홀로코스트를 저지른 나찌와 똑같은 정치인”이라며 발언에 대한 사과를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이스라엘을 비판하면 무조건 나찌냐, 이스라엘은 어떤 비판도 해서는 안 되는 나라냐?”라고 다시 항변하자, 되돌아온 대답은 “그렇다, 홀로코스트의 희생 위에 세워진 이스라엘에 대한 비판은 곧 홀로코스트에 대한 옹호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에 대한 언론과 대중 여론도 흥미롭습니다. 처음엔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과 학살에 대해 “이스라엘이 해도 너무한 것 아니냐”며 전쟁범죄 주장에 동조하는 여론이 많았었는데, 홀로코스트 이야기가 나온 이후로는 “그래, 유대인들이 2차대전 때 얼마나 고초를 겪었는데… 그 사람들도 어렵게 세운 자기네 국가 이스라엘을 지키려다 보니까 어쩔 수 없이 한 일이겠지.” 하는 분위기로 바뀌었다는 겁니다. 그나마 ‘그래도 이건 아닌데’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홀로코스트 얘기가 나온 이후론 감히 공개적으로 이스라엘을 비판하지 못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더군요. 결국 선거를 앞둔 정치인의 처지인 마이클은 이스라엘을 공식방문해서 사과의 뜻을 전달하겠다는 입장으로 한발 물러섰고, 이스라엘 전쟁범죄 주장에 대한 부담은 선거 기간 내내 그를 괴롭혔으며, 꼭 그 때문만은 아니지만 여론조사에서 줄곧 선두를 달리던 그는 막판 결선투표에서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성역이 되어버린 홀로코스트


얼마 전 이런 이야기를 여기서 알게 된 유대인 친구에게 꺼내보았습니다. 혹시 제가 지극히 단편적인 부분을 마치 전체인 양 부풀려 생각한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의 반응은 이랬습니다. “온 지 석 달 만에 어떻게 그걸 깨달았냐. 너 참 똑똑하구나.”


이스라엘의 입장을 철저히 옹호하는 유대인 부모들과 친구들을 두었지만, 자신은 열심히 레바논과 팔레스타인 침공과 점령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이는 그는 홀로코스트는 극단적인 시오니스트가 아닌 대다수 평범한 유대인들의 의식을 마비시키는 마취제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2차 세계대전 때 일어난 홀로코스트가 아니라 유대민족주의자들과 시오니스트들이 오늘날 그들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고 있는 홀로코스트, 역사적 진실이자 교훈으로서의 홀로코스트가 아니라 수단이자 이미지로서의 홀로코스트 말입니다. 팔레스타인 민족의 땅을 강탈하기 위해 만들어진 <유대민족기금(The Jewish National Fund)>은 오늘날 캐나다에서는 대표적인 자선단체이자 환경단체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 주된 활동 중 하나가 <힐렐(Hillel)>과 <베나이 브리트(Ben’i Briet)>라는 시오니스트 학생 조직을 후원하고 지도하는 것이고, 캐나다의 모든 대학교에 지부를 둔 두 조직은 매년 학생들을 선발해 무료로 이스라엘에 보내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중고등학교와 대학교 내에서 정기적으로 홀로코스트를 기억하는 사진전과 강연 등을 조직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 작업들을 통해 캐나다 사회와 국민들은 자기도 모르게 ‘이스라엘=역사의 피해자’, ‘아랍=역사의 피해자인 유대인을 없애려는 극단주의자’라는 이미지 조작에 말려들어가게 됩니다. 설사,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인들을 가해자와 피억압자의 관계가 아니라 동등한 입장의 분쟁 당사자, 즉 ‘이스라엘도, 팔레스타인인들도 똑같이 잘못했으니 분쟁은 이제 그만, 아, 특히 테러는 용납 못해’라는 수준의 인식에 머물게 하는 것입니다.


이제 글을 정리하겠습니다. ‘과거의 역사 속에서 교훈을 찾지 못하는 민족은 언젠가 그 호된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홀로코스트에 대한 마무디네자드 대통령의 말과 입장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동의 여부와는 별개로 이스라엘을 비롯한 전 세계는 이번 사건을 통해 역사의 교훈을 되새기는 계기로 삼아야겠습니다. ‘홀로코스트는 인류의 비극이다, 그런 비극은 다시는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 그 짐을 아무런 죄도 없는 팔레스타인 민중들에게 고스란히 전가하는 것은 바로 홀로코스트를 다시 부활시키는 것이다.’라는 교훈 말입니다.

덧붙이는 말

* 참고로, 홀로코스트가 어떻게 일부 시오니스트들의 이익을 위한 산업으로, 그리고 팔레스타인 탄압을 위한 도구로 이용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그 자신이 홀로코스트 생존자 2세이기도 한 노먼 핀켈스타인의 <홀로코스트 산업>이란 책이 시중에 나와 있는데 기회 되시면 한 번 읽어보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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