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23일 서울중앙지법에서는 ‘인혁당재건위 사건’에 대한 재심결과 무죄를 선고했다. 월간 <사람>은 ‘인혁당재건위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대책위원회’에 참여했던 천주교인권위원회에 요청하여 이 사건과 판결의 의미를 담은 기고를 싣는다. |
지난 2005년 인혁당 사건 희생자 30주기 추모식. 사진제공 | 천주교인권위원회 |
한 어린아이가 울고 있다. 그 아이의 목에는 새끼줄이 매여져 있고, 몸은 나무기둥에 묶여져 있다. 동네 꼬마들은 “빨갱이 자식을 총살시켜라!”라고 외치며 잔인한 ‘놀이’를 하고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저 쳐다보고만 있다. 그리고 어느 날, 그 아이의 동생이 소풍을 갔는데 같은 반 아이들이 “빨갱이의 자식”이라고 소리치며 도시락에 돌을 집어 던졌다. 결국 동생은 나무 뒤에 숨어 훌쩍훌쩍 울며 도시락을 먹어야 했다. 32년의 세월이 지나 그 아이들이 국가전복을 기도했다는 엄청난 혐의로 하루아침에 형장의 이슬이 되어버린 아버지가 ‘무죄’였다는 판결을 받는 그 자리에 서 있다.
사법살인,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
1975년 4월 9일, 이수병, 송상진, 김용원, 서도원, 하재완, 여정남, 우홍선, 도예종 등 8명은 국가전복을 기도했다는 혐의(국가보안법·대통령긴급조치 위반 등)로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아, 바로 그 다음 날 새벽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른바 ‘인혁당 재건위 사건’. 이미 2002년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장석구 선생의 의문사 사건에 대한 조사결과 발표를 통해 이 사건이 당시 중앙정보부의 조작극이라는 사실을 밝혔고, 2005년에는 국가정보원이 ‘과거사건 진실 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조사·발표를 통해 국가정보원의 전신인 옛 중앙정보부 조작임을 고백하였다. 그리고 2007년 1월 23일, 32년 전 가족들의 손 한 번 잡아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버린 8명에 대해서 재심 재판부는 ‘무죄’를 선고하였다. 32년 간 ‘간첩’이었던 이들은 죽은 지 32년이 지나서야 가족과 자신들을 한평생 옥죄고 있던 족쇄를 온전히 풀어버리게 된 것이다.
1975년 4월 9일, 국제사회에서는 이 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유난히 기념일을 좋아하는 우리나라로서는 국제적인 ‘기념일’을 만들어준 참혹한 과거에 대해 감사의 훈장이라도 내려야 하는 것일까.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라는 가족들의 우려는 현실이 되어 돌아왔고, 이들이 죽은 뒤 인혁당 사건으로 투옥되어 온갖 고문을 받던 이들은 옥사를 하거나, 출소 뒤 고문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어떤 이는 갑작스레 발병한 암으로, 어떤 이는 자신이 먹는 밥에 누군가가 독을 탄다며 음식물을 섭취하지 못해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가족들 역시도 이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기도 전에 피맺힌 한을 가슴에 품고 하나 둘 세상을 떠났다.
지난 32년간 유족들은 중앙정보부의 끊임없는 감시와 협박 속에서도 전 국민을 향해 억울함을 호소했고 진실을 밝혀달라고 목 놓아 울었다. 가족들은 중앙정보부로 강제 연행당해 육체적·정신적 폭행을 당하면서도, 자식들이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걸 바라보면서, ‘간첩의 가족’이라는 낙인과의 외로운 싸움을 해 왔다. 그리고 20년의 세월이 흘러서야 드디어 처음으로 추모제를 열 수 있었다. 32년의 세월에 비하면 턱없이 짧은 시간 인혁당 사건 진상규명 활동을 해 왔던 나는 기쁘고도 슬펐다. 32년만의 무죄선고로 그 동안 가슴으로 피눈물을 흘렸을 가족들의 한이 조금이나마 풀렸음에, 32년 만에 편히 눈을 감았을 8분들의 생각에, 먼저 떠난 이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한 평생을 살아오셨을 관련자 선생님들의 생각에 기뻤다. 하지만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난, 지금 이 순간 가장 기뻐해야 할 8명의 당사자들이 없다는 것에 슬펐다. 한 번 끊어진 생명은 다시 되살릴 수 없다. 박정희 유신독재정권과 사법부가 그들의 목에 묶었던 그 동아줄은 끊어버릴 수 있지만 그 동아줄에 의해 죽임을 당한 이들의 목숨은 다시 살릴 수 없는 것이다. 하기에 이번 무죄판결은 사형이 얼마나 잔혹한 사법‘살인’인지, 왜 사형제도가 없어져야 하는지를 우리 모두에게 다시금 보여준다.
멀쩡하게 살아있어 죄송합니다
지난 추모제에서 인혁당 사건 관련자 선생님의 추모사가 생각난다.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있어 정말 죄송합니다…’ 그리고 한참을 단 위에서 눈물을 흘리셨다. 자신의 오빠가 죽은 지 30년 만에 처음 추모제에 참석해 영정을 바라보던 한 가족, 독이 들어있을까 봐 밥 한 술 입에 대지 못하고 떠난 오빠가 그리우셨는지, 지난 세월 빨간색 낙인이 두려워 이곳을 찾지 못한 죄책감이 밀려왔는지 한참을 영정을 쓰다듬으며 눈물을 흘리셨다. 멀쩡히 살아있음이 죄가 되는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었다. 아무리 그리워도 빨간색 낙인이 두려워 외면한 채 살아와야만 했던 이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었다. 아니, 지금도 계속 살고 있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차가운 지하실에서 계속되는 물고문으로 폐에 물이 차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던 그들을, 숱한 전기고문과 매질로 탈장이 되어 제대로 앉아있지도 못했던 그들을, 너무 많은 사람의 무게를 감당해왔던 탓인지 줄이 끊어져 여정남 선생을 사형대에 두 번이나 오르게 했던 이제는 반들반들해진 그 동아줄을, 그들이 마지막으로 디뎠을 사형대의 받침대를, 무엇보다도 자신의 권력과 야욕을 위해 숱한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참혹한 과거를 말이다.
이제 국가는 국가차원의 사죄와 마땅한 보상을 해야 할 것이다. 인혁당 사건은 국가권력이 한 개인과 한 가족의 삶을 얼마나 철저하게 파괴할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기에 국가는 32년 전, 국가권력이 저질렀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그에 대한 책임은 국가공권력이 저지른 반인도적인 범죄에 대한 시효배제법안이 국회에서 통과하고, 시대의 악법 국가보안법과 사형제도를 폐지시키는 것이 그 시작일 것이다.
그리고 이제 용서를 구해야 한다. 이 참혹한 범죄에 가담했던 이들은 물론이고, 지난 32년의 세월동안 우리 사회의 철저한 외면으로 유족들을 차가운 거리에서 외롭게 싸우게 한 우리 사회 모두가 유족들과 먼저 떠난 이들에게 용서를 구해야 할 것이다. 또 지난 군사독재시절 오로지 정권 유지를 위해 간첩으로 조작되어 억울하게 죽어가고, 고문 받은 수많은 이들이 진실과 사법적 명예회복을 기다리고 있다. 이번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무죄판결이 계기가 되어 그 분들의 진실도 밝혀지고, 가슴에 맺힌 한이 하루빨리 풀어지길 바란다.
그나저나, 32년 전 그 아이의 목에 줄을 매고, 나무기둥에 묶은 그 꼬마아이들은 32년이 지난 지금,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무에 묶여 아등바등 거리고 있는 아이와 ‘총살놀이’를 하고 있는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은 32년이 지난 지금, 무슨 생각을 했을까.
출처: [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