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상영되어 큰 흥행을 기록한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사형수를 다룬 이 영화로 다시 한 번 사형제에 대한 관심이 모아졌다. |
사형폐지론의 기원-목숨까지 양도한 사람은 없다
사실 지금까지 사형폐지법안은 모두 3차례 국회에 제출된 바가 있는데, 1999년, 2001년 그리고 2004년의 법안이 그것이다. 이들은 대체로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으나 최초의 법안이 사형을 대신하여 단순히 무기징역형을 그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는 반면, 2001년의 법안은 무기징역을 선고할 때 15년이 경과하지 않으면, 가석방이나 사면을 할 수 없다는 취지를 같이 선고할 수 있도록 하는 별도의 예방장치를 마련하고 있고, 가장 최근의 법안은 아예 수형자가 사망할 때까지 석방할 수 없도록 하는 ‘종신형’을 제안함으로써 사형의 대체수단을 마련하고 있다는 점에서 조금씩 다를 뿐이다. 결국 이러한 법안들은 사형을 (가석방 없는) 무기징역형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취지의 것들인데, 곧이어 살펴보는 바와 같이 이 같은 주장은 최초의 사형폐지론에서부터 그 근거로 들어진 것이었다.
사실 사형은 형벌의 역사, 아니 어쩌면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제도 가운데 하나이다. 본래 동서양을 막론하고 근대 이전의 형벌이란 곧 신체형을 의미했고 신체형이란 사형 내지는 신체에 대한 물리력의 행사를 말하는 것이므로, 대개 중한 범죄에 대해서는 사형이 일반화되어 있었다고 해도 큰 과장은 아닐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사람에게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 그러니까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그의 모든 것을 빼앗는 것이고, 이것은 말하자면 근대 이전 봉건 절대권력의 강력한 힘을 보여주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즉 왕이나 귀족이 정한 법을 위반한 자는,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놓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지나친 절대군주의 권력남용을 비판하고 형벌권의 행사를 제한하자는 주장을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최초의 범죄학자로 일컬어지는 체자레 베카리아(Cesare Beccaria, 1738-1794)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동시에 사형제도의 폐지도 제창하였는데, 말하자면 이것은 세계 최초의 사형폐지론이라고 할 수 있다. 베카리아의 사형폐지론은 크게 2가지 근거를 가지고 있다. 그 하나는 근대의 정부 혹은 권력이란 인민들이 자신의 권리를 자발적으로 양도한 것에 기초하여 성립된 것인데-사회계약론의 입장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자신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다는 내용까지 양도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범죄의 예방을 위해서도, 사형은 사람들에게 일시적인 충격을 주는 것에 불과하고 인간의 정신이란 어떤 사건의 강도보다 반복되는 지속성에 더 큰 영향을 받는 것이므로, 예컨대 더 오랜 기간 동안 고통 받는 종신징역형이 사형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여전히 주요한 형벌제도 ‘사형’
이와 같은 베카리아의 논거는 지금까지도 사형폐지론의 중요한 근거로 이용되고 있다. 그러나 여하튼 사형폐지론이 아직도 주장되고 있다는 것은, 최초의 폐지론이 등장한지 무려 200년이 넘게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형이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몇몇 현대국가의 주요한 형벌제도의 하나로 활용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하에서는 사형의 존치론과 폐지론의 주장을 다시 한 번 검토해 보고 이에 대한 간단한 평가를 해보려 한다.
사형이 여전히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입장의 첫 번째 근거는 무엇보다 이것이 잔혹한 중범죄에 대한 정당한 대가라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입장은 형벌이론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것이어서 근대의 형벌제도를 처음으로 정당화한 칸트나 루소와 같은 철학자도 이러한 주장을 펴고 있다. 즉 형벌이란 다른 사람의 법익을 침해한 행위에 상응하는 보복이므로 가능한 같은 양의 해악으로 되갚아져야 하고, 따라서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은 사람은 자신의 생명으로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와 같은 동해(同害)보복 사상이 지금까지도 사형제도에 대한 가장 강력한 존재근거로 인식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사형 존치론의 또 다른 이유는 이것이 다른 흉악범죄들을 예방할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이라는 것이다. 범죄예방이 문제가 될 때마다 가장 먼저 대안으로 제시되는 것은 형벌의 강화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가장 강력한 수단이 바로 사형의 존속 내지는 집행일 것이다. 이것이 비슷한 범죄를 계획하고 있는 잠재적 범죄인들에게 효과적인 경고가 될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좀 더 이론적인 사형제도의 필요성은 이른바 ‘특별예방’의 관점에서도 주장될 수 있다. 현대의 형벌이론은 범죄인에 따라 개별적으로 처우하고 각자를 효과적으로 사회에 복귀시키는 특별예방 또는 교육형 이론이 주류의 입장을 차지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는 것처럼 형벌제도도 범죄인의 문제점을 찾아내어 이를 재교육 내지 재사회화 프로그램을 통해서 치유함으로써 사회에 재통합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특별예방이론은 다른 한편 치유 자체가 불가능한 사람들을 상정할 가능성이 있다. 지나친 흉악범죄인이나 상습범죄인, 정신이상 범죄인 등은 재사회화 형벌이 효과가 없는 대표적인 사람들이고, 따라서 이들은 본질적으로 다른 형벌, 즉 사회로부터 영구히 격리시키는 무해화(無害化)형벌을 부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형벌은 바로 사형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형제도의 정당성은 국민의 법감정에 의존하여 주장되기도 한다. 일반 국민들은 여전히 사형이 필요하고 또 유용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 대법원은 사형은 ‘우리나라의 현실과 국민의 도덕적 판단을 고려’할 때 위헌이 아니며(1991.2.26, 대판?90도2906), 나아가 사형의 존치가 ‘국민적 총의’라고까지 보고 있다(1983. 3. 8, 대판 82도3248).
원칙적으로도 실용적으로도 사형제는 없어져야
이러한 전통적인 사형존치론에 대하여 폐지의 입장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내세운다. 우선 첫째로 사형이라는 형벌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라는 우리 헌법, 나아가 우리 사회가 가장 우선하여 보호하고 있는 가치에 정면으로 반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나쁜 일을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국가가 그의 생명을 빼앗을 권리는 없다. 이것은 합법적인 살인을 국가가 스스로에게 허용하는 것이며, 인간의 생명이란 어떤 전제나 조건과 상관없이 절대적으로 보호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소개한 베카리아의 첫 번째 사형반대 논거도 이와 비슷한 종류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보다 실용적인 논거는 사형의 효과와 관련하여 주장되어 진다. 사형이 중범죄를 예방하는데 효과적이라는 명제는 결코 증명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사실 이에 대해서는 어떤 일치된 결론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형의 (중)범죄 예방효과에 대해 서로 상반되는 여러 연구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사정이 이와 같다면 사형이 어떤 실제적인 효과가 있다는 주장은 사형을 존치하자는 쪽에서 입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불분명한 효과를 두고 귀중한 인간의 생명을 희생시킬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합리적인 정당성이 없기 때문이다.
셋째, 특별예방이론에 근거하여 범죄인을 분류하는 입장에 대해서도 이것이 충분한 과학적인 근거를 갖고 있는지가 의문시된다. 어떤 범죄인은 징역형을 통하여 개선이 가능한 것이고, 또 어떤 범죄인은 절대적으로 개선이 불가능하여 사회에서 격리되어야 하는가를 밝혀줄 기준이 뚜렷이 알려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와 같은 생각은 매우 위험한 결론, 즉 어떤 종류의 사람들은 살 가치가 없다거나 적어도 다른 정상적인 사람들과 함께 살 수 없다는 주장에 이를 수 있다. 과거 전체주의 독일이나 이탈리아가 이러한 이론에 근거한 형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넷째, 사형제도는 그 내용의 중대성으로 말미암아 예기치 못한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 우선 대표적으로 많이 들어지는 것이 오판의 가능성이다. 사형 존치론자들은 어떠한 재판이라도 오판은 있을 수 있는 것이라고 항변하지만 결론이 사형인 경우에 그 의미는 엄청나게 달라질 것이다. 잘못 잡힌 범죄인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후에 진범이 잡히자 양심의 가책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을 선택한 한 판사의 사례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또 사형은 정치적 반대자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국가권력에 의해 남용될 가능성도 가지고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최근의 인혁당 사건에 대한 재심선고는 이를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아무런 죄가 없는, 또는 설령 어느 정도 죄가 있다 할지라도 국가는 이를 가능한 한 확대 과장하여 자신들의 권력 강화의 기회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사실 범죄와 형벌의 문제는 이를 통해 전체사회 공동의 적을 만들어 내부결속을 다지는, 말하자면 정치적 희생양으로 이용될 수 있다는 점이 여러 범죄학자들에 의해 지적되어 왔다. 그리고 그 가운데 국민들에게 가장 큰 선전효과를 갖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사형인 것이다.
결국 폐지론자들의 주장을 종합해보자면 사형과 같은 극형은 안정되고 문명화된 사회에서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사형으로 다스려야만 하는 중범죄도 그리 많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범죄가 있다 하더라도 사형이란 범죄예방효과도 없는 범죄인에 대한 잔혹한 보복만을 의미할 뿐이므로, 이를 얼마든지 다른 수단으로 대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사형을 폐지한 국가들이 특히 범죄율이 높아졌다거나 치안의 유지에 특별한 문제가 없다는 사실은 이에 대한 좋은 예증이 될 것이다.
형벌문화 변화를 가져올 선택을 해야 할 시기
지금까지 사형을 둘러싼 존치론과 폐지론의 입장을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사실 여러 쟁점들은 다시 크게 2가지 종류의 논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이론적으로 사형이 정당화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현실적으로 사형제도가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지는 않느냐 하는 것이다. 위의 폐지론에 따른다면, 첫 번째와 세 번째의 주장이 전자에 속할 것이고, 둘째와 넷째는 후자에 해당될 것이다.
보는 이에 따라 어느 종류의 논거가 더 중요한 것인가 하는 점은 생각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현실적인 문제만을 지적하는 것은, 이러한 문제가 보완된다면 사형도 허용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다시 답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다. 예컨대 만약 사형이 범죄예방효과가 있다는 점이 입증된다면 사형은 유지될 수 있는 것인가. 또는 만약 오판 없는 사형선고가 가능하다면 어떠한가. 물론 이렇게 흠결 없는 제도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어느 누구도 사형이 존재하는 한 잘못된 사형선고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부작용이 우리가 감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라면 설령 아무리 이론적으로 정당화된다 하더라도 사형은 허용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여하튼 좀 더 근본적인 것은 이론적인 논쟁이다. 우리에게 무엇을 이유로 하든 다른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권리가 주어져 있다고 할 수 있을까?
형벌이 그 기원에서부터 인간의 원초적인 복수심을 근거로 하고 있다는 것은 범죄학자들 간에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사실이다. 인간의 동물적인 본성은 자신에게 해를 입힌 상대방에 대해 보복을 원하지만, 이러한 사적인 복수를 금지하는 대신 국가가 공적으로 해악을 부과하는 것이 형벌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형이 피해자나 피해자의 유족의 감정을 배려하는 것이라는 주장은 충분히 일리가 있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경우처럼 가해자를 살려두는 것이 견디기 어려운 경우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는 이러한 동물적 본성을 이겨 나온 과정이다. 감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가해자에게 다시 잔혹한 보복을 하기 보다는 그를 용서하고 마음속으로 끌어안는 것이 자신의 상처를 진정으로 치유하는 길이 아닐까. 사실 피해자에 대한 형벌의 효과는 이렇게 복수심을 충족시켜 주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가해자의 고통만을 목격할 수 있을 뿐 형벌을 통해 어떤 직접적인 보상을 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최근에는 형사사법제도와 관련하여 ‘회복적 사법’이라는 것이 주장되고 있다. 형사사법절차를 범죄인에 대한 일방적인 단죄의 과정이 아니라 범죄인과 피해자가 만나 서로의 입장과 아픔을 이해하고 화해와 용서에 이르는 대화와 타협의 장으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아직은 피해가 경미한 범죄나 소년범죄에 한정되어 시행되고 있지만 앞으로 그 적용의 확대가 기대된다고 할 것이다.
물론 사형에 해당하는 중범죄에 당장 이러한 변화를 꾀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형벌을 보는 우리의 관점을 다시 생각하게 해준다. 결국 사형제도를 유지하느냐 폐지하느냐 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가치합의와 문화의 문제라면 개개인에게 이것은 신념과 믿음의 문제가 된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어떤 특정한 종류의 (나쁜) 행위를 한 사람을 우리는 살해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생명에 대한 복수는 우리 영역 밖의 일임을 인정하고 제도로써 이를 금지할 것인가. 정답은 물론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이 선택이 우리사회의 형벌문화를 변화시킬 수 있는 밑바탕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출처: [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