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에는 진보운동 진영들이 대체로 구분되어 있다. 많은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민중운동진영과 시민운동진영으로 나누는 것이 보통이다. 민중운동 진영은 한국의 진보운동의 전통을 잇는 대중운동조직들로 이루어진다. 민주노총이나 전농, 전빈련과 같은 대중조직들과 청년, 학생들의 조직들이 민중운동진영에서 포함된다. 그리고 시민운동진영은 대체로 1990년대를 전후하여 민중운동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조직들로 이루어진다. 앞의 민중운동진영은 이전에는 전국민중연대로 묶였다가 최근에는 한국진보연대(준)로 대체로 묶여 있다. 시민운동진영은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로 묶여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연대조직들을 통해서 개별 단체의 수준을 넘는 조직동원력을 만들어 내거나 사회적 의제를 제기하게 된다.
사실 인권운동은 이런 운동들에 비하면 조직동원력이나 사회적 의제를 만들어내는 데에는 상당히 취약한 게 사실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인권운동은 대중조직으로 구성된 것도 아니고, 시민단체들처럼 전문성을 바탕으로 하여 조직된 것도 아니어서 사회적 의제 설정 능력도 취약하다. 그럼에도 인권운동은 독자적인 운동진영으로 인식되어오고 있다.
그것은 인권운동단체들이 갖는 힘 때문이다. 그 힘의 원천은 지속적으로 다른 코드가 아닌 인권이란 이름으로 인권의 논리로, 즉 권리담론으로 사회 문제에 접근하고 분석해온 과정들, 그리고 인권의 현장 속에서 보여 온 나름의 역사와 헌신성 등이 인정받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인권운동은 현실에서 인권단체연석회의(약칭 인권회의)로 대체로 묶여 있다. 인권단체들은 개별 단체별로 다른 운동단체들과 연대하게 되거나 인권회의를 통해서 연대하게 된다.
진상조사 또는 정책연대
지금까지 민중운동진영이나 시민운동진영이 인권단체들에 연대하자고 제안하는 경우는 대체로 이런 경우들이었다.
민중운동진영에서 구체적인 인권피해를 당했을 때 그에 대한 진상조사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2005년 11월 전용철 농민 사망사건 시기에 인권단체들도 당연히 자신들이 해야 할 역할로 인식하고 있었지만 당시 민중운동진영에서는 인권단체들과의 연대를 요청하여 왔다. 그리고 인권단체들은 진상조사단의 주축을 이루면서 사건에 대한 자료를 정리하고, 조사를 진행하고, 그를 진상조사결과라는 방식으로 발표했다. 이와 같은 진상조사결과를 바탕으로 전용철 농민이 경찰폭력에 의해서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는 나름의 객관적인 주장이 사회적 힘을 얻게 되었고, 그에 따라 국가인권위원회의 조사와 그 결과 발표, 그리고 결국은 대통령의 사과와 경찰청장의 사퇴까지 끌어낼 수 있었다. 물론 이런 성과는 인권단체들의 노력에 민중운동진영의 강력한 항의투쟁이 결합되어 투쟁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경찰이나 검찰의 탄압에 직면하였거나 그런 직후에 요청되는 연대는 사실상 인권단체들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분야이기도 하다. 감옥이나 외국인보호소, 사회복지시설, 군대 등에서 발생한 인권침해에 대해서도 인권운동은 우선적으로 진상조사와 같은 작업에 나서게 되며, 인권운동은 진상조사를 넘어서 그런 인권침해를 낳은 정책이나 제도의 문제까지를 제기하게 된다.
다음으로 민중운동진영이나 시민운동진영이 공통으로 연대를 제안하는 경우는 인권적 사안이 발생하는 경우다. 국가보안법의 폐지운동, 집시법개정운동과 같은 경우는 민중운동, 시민운동진영을 관통하는 성격의 투쟁이고, 거기에 인권운동의 전문성도 기대할 수 있으므로 인권단체들은 반드시 이를 위한 연대단위에 끼게 된다. 여기에 인권운동이 제외된다고 생각하면 사회적으로 당연히 인권운동은 민중운동이나 시민운동진영과는 다른 입장이라는 인식을 주게 된다.
그것은 결국 그 운동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서로를 관통하는 사안이 아닐 경우 민중운동 또는 시민운동이 별도의 인식을 갖고 다르게 움직일 때, 그렇지만 인권적 사안일 때 인권운동은 각기 다른 경로로 연대를 요청받기도 한다. 이럴 경우는 인권운동이 갖는 사회적 상징성이 동원된다. 인권의 관점으로, 인권의 논리로 누구든 주장할 수 있으나 인권단체들이 나서서 주장하는 것 자체가 그 주장에 권위를 실어주게 된다고 판단될 경우다. 공무원노동조합의 탄압에 대해서 인권운동이 국제인권조약에 근거하여 정부의 방침을 비판하거나, 이라크 파병에 대해서 평화권의 관점에서 문제제기를 해줄 것을 요청받는 경우가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정책적인 입장을 낼 경우에도 인권이란 권리담론이 갖는 위력은 나름대로 인정받고 있다.
연대운동의 두 개의 경우
그렇지만 예를 들어서 한미FTA저지범국민운동본부나 평택 미군기지 확장저지 범국민대책위원회와 같은 연대체에서는 굳이 인권단체들의 결합이 아쉽지 않다. 한미FTA 저지 투쟁에 인권단체들이 나서야만 하는 고유의 역할이 있다고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 전문성을 가진 단체들이 포진해 있고, 그들도 나름대로 권리담론을 동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인권단체들은 다른 운동진영과 같이 이름을 걸고 움직일 수는 있지만 다른 운동단체들과 차별화된 역할이 주어지지 않을 경우 또는 스스로 찾지 못할 경우 인권단체들은 소극적으로 이에 대응하고, 연대를 요청하는 다른 단체들도 대충 그렇게 인정하고 넘어간다. 이럴 경우 연대를 요청하는 다른 단체들의 역할보다 인권운동 스스로 연대의 목적이나 필요성을 절감하느냐가 중요한 연대의 판단 기준이 된다.
평택범대위에 인권단체들이 결합하여 이 운동에 두 가지 방향에서 큰 영향을 미쳤다. 첫째는 평화적 생존권이라는 화두를 던짐으로써 반미운동으로 협소화되어 가던 운동을 보다 보편적인 투쟁으로 확장하였다는 점이다. 이렇게 평택투쟁이 확장됨으로서 반미운동을 넘는 평화운동으로 나아갔고, 매우 상이한 입장을 가진 운동단위들이 결합될 수 있었다. 또 현장에서 비폭력불복종운동을 제기하고 실천하는 상을 제시한 점도 운동사회에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보편적 권리담론으로 평화를 주장하고 실정법을 뛰어넘는 인권옹호활동으로 이런 투쟁들을 옹호하면서 실제로 정부의 행정대집행을 맨몸으로 나서서 제지하고, 그것이 현실에서 위력을 발휘하였단 점으로 인해서 인권운동의 독자적인 역할에 주목을 받게 되었다. 평택투쟁의 경우는 인권운동이 자신의 논리와 역할을 적극적으로 찾아내어 운동을 확장하고 능동적으로 연대의 요청에 결합해 들어갔던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위와 같은 경우처럼 인권운동단체가 아닌 단체들로부터 연대 요청을 받는 경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인권적 사안이 발생하였을 때 인권운동은 자신들 독자적인 힘보다는 다른 운동진영과 연대하였을 때 더욱 큰 힘을 발휘할 것이라는 판단이 선다면 당연히 인권단체들도 다른 운동진영에 연대를 요청할 수 있다. 그것은 국가인권위원회의 설립과정에서 공대위를 만든 경우가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국가인권위원회설립공대위에는 당시 대표적인 운동단체들이 모두 망라되어 국가인권위원회 설립이라고 하는 인권운동의 목표에 함께 복무한 것이다. 이 운동에서 인권단체들은 중심적인 역할을 했지만 다른 운동진영과 연대하지 않았을 경우 3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국가인권위원회 설립이란 목표를 달성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와 같이 전체 운동을 관통하는 사안의 해결을 위한 연대나 정책적 연대가 이루어져왔다. 이런 연대는 장기간에 걸친 연대로도 이어지고 있지만 대체로 한시적이거나 부분적인 연대로 그치고 있다. 더욱 적극적으로 연대의 질서를 고민할 필요성은 우리 사회가 당면한 문제들이 보다 전면적인 연대를 통해서 해결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의 경제, 군사적 침략이 동시적으로 진행되고, 그것이 한국사회 전체에 상당한 변화를 주면서 지금까지의 진보운동의 성과를 형해화할 수 있는 위기의식을 조성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공세는 총체적인 것이지 어느 분야만 국한되어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이런 총체적인 대응이 요구되는 질적으로 변화된 상황에서 인권운동이 자신들의 독자적인 영역을 고수하면서 부분적인 연대로 만족할 수 있을까?
부분운동을 넘어 총체성을 획득해야
권리는 투쟁을 통해서 제기되고 형성된다. 그래서 권리는 해방의 요소일 수 있지만, 결코 해방을 향한 완전하고 배타적인 도구는 아니다. 권리는 그것이 떠오르는 “상식”이 되고 사회적 실천 속에 구체화될 때 사회변혁의 전략적 요소로 작용한다. - 알란 헌트(Alan Hunt).
인권운동이 사회변혁(그것이 개혁이라고 해도)이라는 진보운동 공통의 목적에 복무해야 한다는 점에 공감한다면 인권운동은 연대를 위한 적극적인 기획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지금까지 다른 운동진영과의 연대는 인권운동이 적극적인 연대의 손길을 내밀었다기 보다는 외부의 연대 요청에 응했던 측면이 강했다. 즉 인권운동진영은 연대에 대해서 수동적인 위치에 있었다고 해야 옳다. 그것은 인권운동이 가진 역량상의 한계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인권운동이 자신의 보편적인 가치를 확장하려는 노력이나 기획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인권운동이 자신들이 독자적인 실천과정을 통해서 진보운동의 방향을 설정하는 것에 만족할 수 없는 것은 결국 전체적으로 보아서 인권운동은 진보운동의 일부를 형성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떤 분야나 영역의 운동이 운동사회 전체를 대표할 수 있거나 그 목적을 부분을 가지고 이룰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착각이 아닐 수 없다.
세계를 인권의 관점으로 해석하고, 세계의 변화에 인권의 논리로 파악하고 접근할 수 있다고는 해도 이것이 전면적인 해석이나 파악일 수 없다는 점을 굳이 설명해야 할까? 가령 생태운동의 관점에서 보면 인권운동은 결국은 인간을 중심으로 놓고 보면서 자본주의가 야기하는 생태파괴의 측면은 간과하고 있다고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이 파괴된 가운데서 인권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최근 자연생태계의 파괴로 인한 피해들이 속출하고 있고, 이렇게 인간에 의한 생태의 파괴가 멈추지 않는다면 곧 인류가 자연의 역습을 받아 멸망할 수도 있다는 신호음이 발해지고 있다. 이럴 경우 인권운동은 생태운동의 관점과 논리를 적극적으로 배워 보완하면서 생태운동과 연대할 방안을 찾아나서야 할 것이다. 그리고 생태운동의 입장에서도 인권의 관점과 논리는 생태운동이 보지 못한 한계들을 보완할 수 있는 요소들을 갖고 있을 것이다. 이처럼 진보운동의 각 영역이 소통하면서 자신들의 단점을 지속적으로 보완하면서 진보담론들을 형성할 필요성이 있다.
더 나아가서 전통적인 운동인 노동운동을 비롯한 민중운동에 대해서도 인권운동은 상호침투하는 과정을 통해 연대를 확장할 수 있다. 1990년대 이후 발전해온 보편가치를 추구하는 운동들의 이념과 관점, 논리들을 민중운동이 수혈하게 된다면 집단의 이익을 위해 투쟁하는 단위를 넘어서 보편적 권리담론의 정당화를 요구하는 투쟁으로 진일보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그래서 각각의 운동은 서로 주고받으면서 서로의 단점들을 보완하고, 특히나 신자유주의 지구화 시대에서 운동이 분절화되어 각개 약진할 때에 오는 무력감을 극복해낼 수 있지 않을까.
상호침투를 통한 진보운동의 새로운 가능성
인권운동은 지금 시민단체연대회의에도, 한국진보연대(준)에도 참여하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인권운동은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는 것이 더욱 필요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런 인식이 인권회의로 모아졌고, 인권회의를 중심으로 진행되어온 다른 진보운동영역과의 연대를 통해서 인권운동진영이 진보운동 사회에서 뚜렷이 인식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렇지만 이제는 독자적인 인권운동진영을 구축하는 것으로는 명백한 한계점에 도달한 것은 아닌가 싶다. 그것은 일시적인, 부분적인 연대로는 해결할 수 없는 자본과 권력의 전면적인 공세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국내에서만 이런 연대를 고민할 것이 아니라 전세계적인 차원에서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연대질서를 형성해야 할 필요성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이제 인권운동도 사안별 연대나 부분적인 연대를 넘어서 진보운동의 발전을 위해, 그리고 사회변혁을 위해 한 걸음 더 나아가 연대질서를 고민해야 할 때다. 인권운동이 그렇게 나설 때 다른 운동진영에 신선한 충격을 던지면서 다른 운동으로부터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고, 그것으로 인권운동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킬 수 있다. 진보운동이 추구하는 가치들을 ‘상식’으로 만들고 권리담론을 들어서 민중들의 변혁적 요구를 옹호할 수 있고, 인권운동의 평등주의적(수평적) 조직운영의 방식은 다른 운동들에 지금까지의 운동과는 다른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그러면서 인권운동은 다른 진보운동들의 문제의식과 조직운영방식으로부터 인권운동의 약점을 보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상호침투하는 가운데 서로를 풍부하게 만드는 운동, 그런 가운데 진보운동의 담론도 형성하고, 본격적인 신자유주의 투쟁의 총체적인 전선을 확고하게 다질 수 있는 가능성은 늘 우리에게 열려 있다. (계속)
출처: [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