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참세상 |
협상의 추진 과정보다 문제인 것은 협상 추진의 논리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배기찬 씨의 책, 『코리아, 다시 생존의 기로에 서다』에서는 “한국은 동북아에서 미국과 중국의 영향력이 비슷해지는 2020~2030년경에 통일을 이루고 아시아의 스위스, 동북아의 균형자로 거듭난다. 하지만 지금은 한국이 단독으로 동북아의 세력균형자가 되기 힘들다. 그 때까지는 최대 패권국인 미국과의 협력관계를 공고히 해 신뢰를 쌓고 실력을 기르는 일이 급선무다.”(강조는 필자)라고 결론을 맺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러한 인식에 따라 2005년 한미FTA,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등 일련의 정책적 대전환을 시도한다.
강한 이념성, 오도된 신념
한미FTA 협상은 미국과 연대하여 중국을 견제하고, 제조업 대신 서비스 산업을 중심으로 미국식 경제시스템으로 재편하며 이를 위해서는 외적 충격도 불가피하다는 극단적인 논리와 강한 이념성이 담겨 있다.
심상정 의원의 폭로에 따르면 2005년 노무현 정부는 농산물을 제외하고 한중FTA를 체결하자는 중국의 제안을 무시하고 4가지 선결 조건을 수용하며 한미FTA를 전격 추진하게 된다.
농산물을 제외한다면 한중FTA는 한국 측에 대단히 유리한 것이었다. 반면 4가지 조건을 미리 내주고 미국과 협상한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발상이었다. 그만큼 FTA의 추진 방향은 경제적 논리와 함께 정치적 논리가 강하게 반영되어 있었다.
이에 따라 노무현 정부는 4가지 조건, 스크린쿼터.쇠고기.자동차.의약품 등을 미국 측에 양보하고 공청회도 제대로 치르지 않은 채 미 의회에서 협상 개시를 선언한 것이다.
강한 이념성, 오도된 신념에 기초한 한미FTA 협상이 정상적인 협상 과정에 들어서자 곧 난관에 봉착하기 시작했다.
4가지 조건 중 스크린쿼터는 지난해 3월 7일 국무회의에서 의결함으로써 정부의 의도대로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또 다른 전제조건이었던 쇠고기 수입문제는 3월 미국에서 또 다시 광우병 소가 발견됨으로써 무산되었다. 한미를 오가며 광우병 소 발생에 대한 역학 조사가 형식적으로 진행된 후 9월 미국산 쇠고기 수입이 재개되었지만, 비행기로 특별 공수된 쇠고기에서 3차례나 뼛조각이 발견됨으로써 쇠고기 수입 문제는 협상의 최대 난제로 부상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엄선된 쇠고기에서조차 뼛조각이 발견될 정도로 미국 축산 시스템은 광우병에 취약한 것이다.
의약품의 경우 비밀 협상에서 한국 측이 ‘약가적정화 방안’을 철회하기로 약속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은 7월 2차 협상에서 약가적정화 방안의 추진을 강하게 주장했고, 이로 인해 2차 협상 전체가 파행으로 치달았다. 약가적정화 방안이란 효능 대비 약값이 싼 약만을 등재하는 제도로 정상적인 사고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부정하기 어려운 제도이다. 비밀 협상에서는 양보가 가능하지만 언론이 지켜보고 있는 조건에서는 섣불리 양보할 수 없었던 것이다.
3월 말 노무현-부시 전화통화로 마무리?
상황이 이렇게 되자 협상은 난항에 직면했다. 사실상 이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정부 관료들은 12월 무렵부터 정상적인 협상 대신 다시금 고위급 밀실협상을 통해 협상을 강행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12월 초 미국의 서북부 몬태나에서 협상이 열리고 있는 동안 김현종과 산업자원부 차관보가 워싱턴에 날아가 밀실 협상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협상은 사실상 김종훈-커틀러 사이의 공식 협상이 아니라 김현종-슈워브(USTR 대표) 또는 그 이상의 고위급 협상으로 중심이 이동하였고, 3월말 노무현-부시의 전화통화로 마무리한다는 예상이 확산되었다.
상황이 이러했기 때문에 공식 협상을 통해서는 협상이 교착되고 있는데 고위급 관료들은 3월말 타결을 자신하고 누구도 합의한 바 없는 구체적인 협상안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는 기이한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한미FTA 저지 운동과 여론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었다. 정부는 한미FTA저지 범국민운동본부가 주최하는 모든 집회를 봉쇄하고 심지어는 농민들이 제작한 광고의 방영을 불허하였다. 정부에 의해 합법적인 공간이 봉쇄되자 반대 진영은 노상단식, 게릴라 시위 등 격렬하고 초법적인 방식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정부가 3월말 타결하려 한다는 정황이 명확해지자 미국 측은 자국의 협상안을 보다 공격적으로 짜기 시작했다. 자동차의 경우 미국 측은 자동차세제 개편 등이 수용되지 않으면 자동차 관세인하를 수용하지 않겠다고 버티고 있으며, 한국 측은 미국 측 자동차 관세의 완전 철폐에서 ‘3년 내 철폐’로 물러서는 비참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이는 민주당이 의회를 주도하면서 나타난 현상이기도 하지만 미국 측이 협상 타결 자체를 목표로 하는 한국정부의 약점을 교묘히 파고든 결과이다.
3월 중순 이후 협상 결과가 상식을 뛰어 넘는 굴욕적인 양상이 될 것이 분명해지면서 범여권의 유력 정치인들, 가령 김근태, 정동영, 천정배 등이 반대 운동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3월말 타결 여부를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발전하고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설사 협상이 타결되더라도 국회비준, 대선 과정에서 대단히 예민하고 심각한 쟁점으로 심화될 가능성이 커졌다. 타결안이 공개된다면 국민여론이 악화될 소지가 크고, 협상에서 피해를 입은 계층의 반발이 예상되며 여기에 정치권이 가세할 경우 향후 전망은 예측불허의 상황으로 발전할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된 이유는 역설적으로 광개토왕, 장보고를 들먹이지 않고서는 협상의 성과를 선전할 만한 내용이 없기 때문이다. 미국과 연대하여 경제시스템을 선진화한다는 노무현 정부의 구상은 미국 측의 끝 간 데 없는 탐욕 앞에 허망하게 무너지고 있다.
출처: [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