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권리라는 개념은 6, 70년대 미국에서 있었던 소비자 운동과 일본의 의료생활협동조합 운동의 영향을 받아 80년대 후반 우리나라에 소개되기 시작하여 ‘환자권리장전’이란 이름으로 구체화 되었다. 요즘은 거의 모든 병원에서 볼 수 있는 ‘환자권리장전’은 대체로 △인격적 대우를 받을 권리 △알 권리 △자기결정권 △개인 신상 비밀보호 △배울 권리 △진료 받을 권리 등을 담고 있다. 이러한 환자권리장전이 병원 문을 여는 순간부터 사회적 약자가 되어버리는 환자와 환자 보호자의 권리 확보에 얼마나 기여하였는지를 확인하기란 쉽지 않지만 수원의 한 병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경기도립의료원 수원병원(아래 수원병원)은 지난해부터 국내 의료기관으로는 최초로 ‘환자권리위원회’를 구성하여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환자권리보장의 첫 발을 내딛었다. 환자의 보호자로 환자권리위원회에 참여하여 위원장을 맡고 있는 홍수자 위원장을 만났다.
홍 위원장은 수원병원에서 10년 가까이 가족을 간병해왔던 베테랑 보호자다. 하지만 홍 위원장이 환자권리위원회란 듣도 보도 못한 곳에 활동하게 된 사연은 남다르다. “시아버님이 병원에서 8년 있다가 돌아가셨어요. 그리고 친정아버지가 춘천에서 크게 다치셔서 다시 이 병원에 오게 되었죠. 그런데 어머니가 간병을 하던 중에 간호사들과 간병인 침대 문제로 다퉜어요. 병실이 비좁으니까 간병인 침대를 환자 침대 밑에 넣었다가 잘 때만 꺼내라고 하는 거예요. 젊은 사람들은 돈 벌러 다녀야 하니까 노인 분들이 간병을 맡을 수밖에 없는데 옆에서 서서 보호하라니 말이 안 되죠. 제가 수간호사에게 따졌죠. 이런 규칙이 병원에 지정되어 있냐? 그렇지 않으면 사과를 해라, 병원이 다 떠들썩했죠. 의외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더라고요.”
얼마 뒤에 수간호사가 찾는다는 소리를 듣고 병원을 나가라는 말이 아닌가 하며 찾아갔던 홍 위원장은 환자권리위원에 추천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합리적인 문제제기를 했다는 것이 환자권리를 대변할 수 있는 적임자였음을 역으로 병원에 보여준 것이다. 환자권리위원회를 제안하고 주도했던 수원병원 박찬병 전 원장의 취지문에도 “환자의 권리라는 것이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만 하는 시대적 요청이기에 권리장전을 만들어 접근하고 있기는 하나 실제적인 권리보장에는 썩 마음이 내키지 않는 것이 또한 사실”이라고 솔직하게 털어놓고 있다는 데서 수원병원 환자권리위원회가 얼마나 의욕적으로 만들어졌는지 엿볼 수 있게 한다.
격이 다른 환자권리장전
지난해 6월 환자보호자와 지역 인권시민단체, 노조대표, 병원장 등으로 구성된 수원병원 환자권리위원회의 활동은 월 1회 회의와 위원들의 병원 순회를 통한 환자들의 의견 수렴, 환자권리위원회 홍보와 환자권리장전 마련 등이다. 여기서 홍 위원장이 주력했던 부분은 병원 순회 활동이었다.
“환자권리가 뭔지도 잘 몰랐지만 내 입장에서는 환자와 환자 보호자의 애로사항을 듣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오래된 간병인은 터줏대감이어서 병원 돌아가는 것을 다 알고 문제점도 나름대로 꿰뚫고 있지요. 한편 새로 들어온 환자나 보호자는 또 새로운 시각에서 지적을 할 수 있고요.” 순회를 통해 수렴된 의견은 병원장에게 직접 보고되기도 하고 환자권리위원회 회의에서 이야기되기도 한다. 병원 내 청결상태에 대한 지적, 소액에 대한 현금영수증 발급 문제, 응급실 운영의 문제 등등 작지만 사소하다고 할 수 없는 문제들이 쏟아져 나왔다. “수원 한 대학병원에서는 보호자들이 식사비를 내면 환자와 같이 밥을 먹을 수 있었는데 여기서는 3,000원짜리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어야 했어요. 그래서 문제제기를 했죠. 보호자가 교대해야만 밥을 먹을 수 있으니 너무 불편했거든요. 결국 1,000원만 부담하면 환자와 같이 밥을 먹을 수 있게 되었죠.”
환자권리장전을 마련한 것도 큰 성과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수개월에 거친 초안 검토 작업과 다양한 의견수렴을 통해 A4용지 10장 분량의, 총 36개 조항의 내용을 담고 있는 수원병원 환자권리장전은 다른 병원의 표어와 같은 선언적 장전과는 격이 다르다. 이 장전에는 위원회의 시정권고 권한과 직원교육은 물론 법적 분쟁 시의 지원까지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그 실효성은 여전히 의문이다. 아직까지 이 권리장전이 쓸모를 발휘한 적은 없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심각한 사건이나 의료분쟁이 일어났을 경우 얼마나 권리장전이, 그리고 환자권리위원회가 역할을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어요. 쉽지 않은 일이겠지요. 하지만 위원회에 참여하고 있는 분들이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으니 기대할 수 있겠죠.”
얼마 전 종영했던 한 방송사의 의료드라마를 모두 모아 봤다는 홍 위원장은 의욕적으로 위원회를 제안하고 추진했던 병원장이 중간에 교체되어 걱정을 했으나 다행히 새로 부임한 원장이 흔쾌히 의의에 동의하고 계신다며 밝은 전망을 내놓았다.
“누구도 병원에 와서 아는 사람을 찾으려 하거나 속았다는 느낌이 들지 않고 정직하고 친절한 병원을 만들어 나가고 싶다.”라는 소망을 밝히며 환자권리위원회 취지문은 끝맺고 있다. 절박한 마음으로 병원을 달려가 본적이 한 번이라도 있는 사람은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 바람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사회적 약자와 빈곤층에게 더 가까울 수밖에 없는 공공의료기관이란 점에서 수원병원 환자권리위원회의 활동은 한 병원의 획기적인 시도를 넘어 사회적 가치와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수원병원을 주목하자.
출처: [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