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진보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이 ‘어떻게 일상을 살 것인가’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던 것 같다. 90년대 초반에 일부 운동진영에서 청바지를 입지 말자거나 커피와 콜라를 마시지 말자고 주장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이런 주장을 소부르주아들이나 하는 비본질적인 것으로 가치폄하를 했었던 기억이 난다. 이들은 사회를 바꾸는 운동은 생산의 영역에서 일어나야 하는 것으로 믿었기에 이를테면 소비의 문제는 이들에게 부차적인 것이었으리라. 이런 협소한 관점에서 보자면 소비자 운동은 평가절하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자급자족을 하는 사람들을 제외한 모든 노동자는 동시에 소비자일 수밖에 없는 대기업 자본주의 체제에서 우리가 무엇을 먹을 것인가, 무엇을 타고 움직일 것인가, 어디에서 살아갈 것인가 그리고 무엇을 살 것인가 하는 것들은 자본가의 입장에서 보면 이 이윤의 체제를 재생산할 수 있을 것인가, 없을 것인가를 규정짓는 가장 중요한 쟁점이 된다. 사람들이 한미FTA를 지지하는 이유는 보다 다양한 상품을 보다 저렴한 가격에 구매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 아닌가.
이 사회에서 편리함이란 불편함을 없애줄 새로운 상품의 등장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자본가들은 원래 불편하지 않았던 것들을 불편한 것으로 만드는 전문가들인 것이다. 휴대전화가 없었을 때 불편하지 않았고, KTX가 없었을 때 우리는 불편하지 않았다. 우리가 편리해진다는 것은 다른 누군가 불편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KTX가 생겨나 삶이 편리해졌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천성산의 꼬리치레도롱뇽은 서식처를 잃어야 했던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지금 우리가 누리는 편리함은 일상의 삶에 대한 무관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대량으로 생산되고 대량으로 폐기되는 이 낭비의 체제가 자원을 얼마나 불평등하게 고갈시키고 있는지, 그래서 거기서 나타나는 생태계의 피해는 또 얼마나 힘없는 자들에게 집중되고 있는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때 우리는 편리함을 계속 누릴 수 있다. 자본주의는 편리함에 대한 갈망으로 유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