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서울 주택가에 위치한 정신장애인들이 새로 살 집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이름도 ‘오아시스’라고 명명한 2층짜리 예쁜 집 앞 뜰에는 봄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하고 있었지요. 오랜 시간 정신병과 싸워 온 이들에게 새로 살 보금자리가 생겼다는 것이 여간 기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축하와 행복으로 거듭 나야할 그곳에는 지역주민들의 격렬한 항의와 고함만이 오고 갔습니다. 이를테면 살기 좋은 우리 동네에 정상인(?)이 아닌 정신병자들이 왜 들어오냐는 것이었지요. 정신보건법상의 모든 절차를 밟아 사회복귀시설로 등록도 했고 보건소로부터 허가도 받았지요. 그저 우리 주변에 하숙집이 들어오는 것과 별반 다름이 없는 우리가 사는 집의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은 이 집을 철수하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이성이 존재하지 않는 공간. 바로 그 자체였습니다. 정당한 집값을 지불한 사람들이 주민들의 반대에 입주를 못하고 있는 아파트를 상상해 보십시오. 가장 큰 반대는 바로 정신질환이라는 이유였습니다. 겉으로는 정신장애인도 우리와 함께 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산 좋고 물 맑은 곳에 가서 살라는 것이었지요. 참으로 억울하고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학생들 강의까지 바꿔가며 그 곳에 참석한 저의 입장은 고사하고, 말 한마디 제대로 들어주지 않는 주민들 앞에서 넋 놓고 울먹이는 정신장애인들의 어머니들을 보았습니다. 흐르는 눈물을 제대로 훔치지도 않으시며 그들에게 큰 소리도 제대로 해주지 못하는 그들을 보며 인간의 강박관념에 대해 다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반복강박(反復强迫)이라는 인간 마음의 방어기제가 있습니다. 인간이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 눈을 빤히 뜨고도 사람에게 배신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 노래 부르는 중에 똑같은 대목에서 가사 까먹는 것. 역사가 반복되는 것. 피가 물보다 더 진한 것. 그리고 이 세상에 편견이 없어지지 않는 것. 모두 반복강박으로 설명이 되는 우리 주변의 일상들입니다. 한센병, 정신지체, 게으름, 피부색깔, 남자와 여자, 빨갱이, 외국인 근로자, 중증장애인, 못 배운 사람, 이혼한 사람. 이 모두는 역사 속에서 상황을 반복하며 재현되는 편견의 대상입니다.
반복강박에 대한 치유는 단 한 가지가 존재합니다. 바로 사랑을 느끼게 하는 것이지요. 인간은 본디 이기적인 동물이라 남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사랑이라는 묘약이 흐를 때만 남을 위하는 매우 이중적 동물이지요. 그 날을 계기로 ‘오아시스’에 반대하던 주민들의 마음에 사랑의 묘약이 흘러가기를 기대해봅니다. 남이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의 문제라고 여겨질 때 세상이 바뀌어 온 것처럼 말입니다. 그 날 다하지 못했던 저의 이야기를 이 글로써 대신합니다. 정신장애인의 집 ‘오아시스’는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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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문 님은 아주대학교 의과대학 정신과와 인문사회의학과 교수로 있습니다.